트로이 목마, 의약품 자판기

[보건포럼] 이광민 부천시약사회장

지난 6월 경기약사학술제 심포지엄에서 우석균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실장은 원격 화상 의약품 투약기(일명 의약품 자판기) 도입을 트로이목마에 비유하여 설명하였다. 그렇다! 이는 아주 적절한 비유이다.

의약품 자판기는 시장에서 경제성도 전혀 없으며, 개발 업자들이 주장하듯 그리 대단한 융합기술력을 전제로 하지도 않은 것으로써 의료 영리화를 위한 확장성을 전제로 한다고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먼저 의약품 자판기의 시장성을 살펴보자.

정부가 구상한 의약품 자판기는 약국의 개설약사 및 관리약사가 자신이 관리하는 의약품 자판기를 통해 화상으로 소비자를 상담하고, 일반의약품을 판매할 수 있도록 한 형태이다.

이는 약국의 현실을 전혀 도외시한 접근으로 근무약사가 별도의 적절한 보상이 따르지 않는 화상상담에 참여하는 것은 애시 당초 기대난망이며, 시간 외 근무 수당을 지불해 가면서까지 일반의약품 자판기를 운영하기에는 매출이 비용을 감당할 수 없는 구조이다.

퇴근한 개설약사 역시 수면 시간이나 개인 업무 중 컴퓨터나 휴대전화로 의약품 자판기에 화상응대를 할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전혀 현실적이지 않다.

상담약사의 응대를 기대할 수 없는 의약품 자판기는 단지 값비싼 의약품 보관기계일 뿐, 민원 발생의 온상으로 천덕꾸러기로 전락할 것이 불 보듯 뻔하다. 언급되고 있는 몇몇 자료들을 살펴보면 의약품 자판기의 가격은 한 대당 1,500 ~ 2,000만 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반면에 매출은 설치장소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대체로 일평균 5만 원, 월 150만 원 정도이며, 이 중 순이익은 50만 원이 채 되지 않을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보건복지부 입법예고안에서 의약품 자판기 설치 비용은 설치 약국에서 부담한다는 것을 명확히 하고 있다. 또한 고장, 교체 등의 관리비용을 감안하면 이익은 고사하고 손익분기점을 넘기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 은행 ATM의 경우에도 한 대당 임대료와 유지·보수로 연간 2,000만원이 드는 반면 수수료 수익은 1,000만 원대 초반으로 통상 한 대를 운영하는데 연간 160만 원 가량의 손실로 설치대수가 급감하고 있는 실정이다(해럴드경제 2016.4.5.일자).

종합해보면 보건복지부가 입법예고안을 통해 구상하고 있는 의약품 자판기는 한마디로 시장성, 경제성이 전혀 없다. 그렇다면 외국에서의 의약품 자판기 운영 현황은 어떨까?

의약품 자판기는 미국, 독일, 스웨덴, 핀란드, 불가리아, 중국 등 일부 국가에서 운영되고 있다. 이 국가들은 모두 약국용 의약품이 아닌 일반 소매점에서 자유롭게 판매가 가능한 자유판매 의약품을 대상으로 소비자 선택권을 전제로 의약품 자판기를 운영하고 있다.

그렇다보니 약사와의 화상 상담을 전제로 의약품 자판기를 운영하고 있는 나라는 단 한 곳도 없다. 종종 사례로 화자되는 독일의 “비사비아(Visavia)”라는 제품도 자판기를 통해 소비자가 의약품을 선택할 때 제품별로 녹화된 약사의 복약설명 화면을 참고할 수 있도록 한 구조이지 화상 상담을 통해 의약품 구매로 이어지는 형태는 아니다.

그렇다면 다른 나라에서는 원격 화상 투약 방식의 기술이 부족하여 의약품 자판기에 이 기술을 도입하지 않고 있는 것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2015년 독일에서 열린 엑스포팜에서 약국 외벽에 설치하여 약국 내에서 대기하지 않고도 전화 상담을 거쳐 처방 조제한 의약품을 받아갈 수 있는 투약기인 로보월이 이미 소개되었다.

미국이나 영국에서는 처방의약품을 대상으로 약사 화상상담 방식의 Medicine vending machine이 시범적으로 운영됐거나, 활용되기 시작했다. 중국의 경우 실무에 적용된 단계는 아니지만 화상 상담 가능한 다양한 유형의 의약품 투약기를 개발해 시장에 선보이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기술이 충분히 발달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건의료 선진국들이 자판기를 통해 자유판매 의약품 중 다빈도 상비약 취급 정도를 허용할 뿐 약사 상담을 전제로 한 의약품 판매를 허용하고 있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보건의료 분야의 최우선 가치는 안전에 있으며, 약사 화상 상담 방식의 자판기가 최소한의 경제성조차 없기 때문일 것이다.

자판기는 기본적으로 여러 대를 운영하면서 판매량 편차 및 높은 관리 비용에 따른 위험을 분산하고, 광고수익과 높은 마진의 제품 취급 등의 환경이 마련됐을 때 경제성이 있다. 이러한 자판기의 속성으로 인해 상비의약품에 대한 소비자의 접근성을 향상시켜 얻을 수 있는 기대 효과에 비해, 자판기 운영의 효율성을 개선하기 위해 보건의료 분야에 뻗는 자본의 힘에 의한 폐해는 훨씬 클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과연 보건복지부는 왜 현실성도, 경제성도 없는 의약품 자판기 도입을 위해 약사법 50조를 개정하고자 할까? 보건복지부는 법 개정 이유로 국민의 의약품 접근성 향상을 들었다. 27,000여 24시 편의점을 통해 안전상비의약품 판매가 허용된 상황에서 국민의 의약품 접근성 향상을 위해 의약품 자판기 도입과 관련 법개정이 필요하다는 것은 약사법 개정의 충분한 이유가 되기에 궁색해 보인다.

논리적으로만 보자면 자유판매 의약품 도입을 포함한 의약품 3분류, 안전상비의약품을 대상으로 한 의약품 자판기 도입 등을 검토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국면은 사회적 요구도 없고, 필요성 및 현황 검토를 바탕으로 충분한 대안 검토나 여론수렴 과정도 없는 상황에서 복지부가 약사법 50조 개정에 집착을 보이고 있는 비정상적인 상황으로 밖에 보기 어렵다. 

약사법 50조는 약사와 환자 간의 대면상담의 가치를 담고 있는 주요 조항이다. 약사법 개정안과 함께 20대 국회에 상정되어 있는 원격의료허용 법안이 통과되면 의약품 택배 배송 허용도 급물살을 탈 것임은 충분히 예상 가능하다.

원격 화상상담과 의약품 택배배송이 만나면 온라인 약국 허용의 전체 퍼즐이 완성된다. 이미 올해 식약처에서는 국내외 의약품 온라인 유통거래 안전관리제도 연구용역을 7,000만원에 발주하여, 연구용역이 진행되고 있다. 온라인 약국 허용은 자연인 약사만의 약국 개설 허용, 1약사당 1약국 개설을 기본으로 한 약사법의 가치를 모두 무력화 시킬 것이다. 이는 약국시장이 기업과 자본의 영토 안에 포함되는 것을 의미한다.

보건복지부와 의약품 자판기 개발자들은 이러한 의구심을 그저 비약이나 기우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시장성도, 도입의 효과도 없지만 의약품 자판기 도입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 법 개정까지 불사하겠다는 일련의 억지스러운 과정에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반응은 과연 무엇일까?  지나친 비약이라 비판하기 전에 이를 우려하는 국민과 관련 전문가들을 먼저 이해시켜야 하는 것이 법을 개정하고자 하는 이들의 마땅한 책무이다.

아니라고는 하지만 여론의 우려를 의식함인지 제5차 규제개혁 장관회의 및 민관합동 규제개혁 점검 회의에서 사용된 “원격 화상 의약품 판매 시스템”이란 명칭이 복지부 입법예고안에는 “의약품 자판기”로 슬며시 바뀌었다.

보건복지부와 개발자는 단순히 취약시간, 취약지역의 의약품 접근성 보완이란 순진한 발상에서 발로한 신념이 있을지 모르지만, 뒤에 숨어 조정하는 보이지 않는 손은 의료법이나 약사법에 원격의 개념을 이식하고, 보건의료시장을 기업과 자본의 영역으로 침탈하고자 하는 의료영리화의 교두보 확보가 목적임을 직시해야만 한다. 방심을 타고 성내에 잠입하여 트로이를 멸망에 이르게 한 그 트로이 목마 말이다.


보건신문의 전체기사 보기
  • 이 기사를 공유해보세요  
  • 카카오톡
  • 네이버
  • 페이스북
  • 트위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