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장공시 불똥 튈라" 악재 자발공시 확산

제약업계 한미사태 후 자정움직임 “호재만 알리는 시기 끝났다”

한미약품과 베렝거인겔하임 간의 수조원대 계약 해지 및 늑장공시 파동이 일어난 지 2개월이 지났다. 한미약품은 지난 9월 30일 베렝거인겔하임과 폐암 항암신약 라이선스 계약 해지를 공시했다. 그러나 계약 해지일로부터 수 일 동안 침묵하다가, 바로 전날 제넨텍과 1조원 기술수출 계약을 공시한 이후에야 해당 건을 발표하며 이른바 ‘늑장 공시’ 파문에 휘말리는 위기를 맞았다.

한미사태 이전까지, 국내 제약사들은 임상 돌입이나 기술수출, 수출계약 등의 호재성 이슈는 적극적으로 공시하거나 보도자료를 통해 홍보하는 반면, 악재성 이슈는 숨기기 급급했다. 이번 늑장공시 사태 역시 이러한 고질적 악습의 일환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번 한미약품 사태를 반면교사 삼아, 악재 공시에 소극적이었던 제약업계의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 의무공시 대상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동안 쉬쉬했거나 시기를 봐 가며 늑장 공시했던 임상 중단, 계약 해지 등 악재성 이슈를 적극적으로 알리기 시작한 것이다.

제약업계 전반의 이 같은 행보는 떨어진 업계 신뢰도를 회복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비록 단기적으로는 손해가 될 지 몰라도, 기업 가치를 정확히 측정하고 투명성을 확보함으로써 장기적으로 제약업계 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리라는 평가다.

한미사태 이후 약 두 달간, 자사의 개발 중단이나 연기, 계약 해지 등의 악재를 자발적으로 공시한 제약사는 녹십자, 유한양행, 한국유나이티드제약, 동아에스티 등이다. 늑장 공시 논란의 중추였던 한미약품 역시 신약 개발 일정 연기 소식을 적극적으로 알리며 이미지 쇄신에 나섰다.

▲녹십자 본사 전경

녹십자는 지난 10월 13일, 혈우병 치료제인 '그린진에프'의 미국 임상을 중단했다고 공시했다. 이는 같은 날 이뤄진 미국 FDA 보고보다도 빠른 자진 공시였다.

녹십자는 당초 미국 임상을 2~3년으로 예측했지만, 혈우병이라는 희귀질환 특성 상 신규 환자 모집에 시간이 걸려 임상 기간이 당초 2~3년으로 예정했던 것보다 길어졌다. 이는 결국 투자비용 증가와 출시 지연에 따른 사업성 저하로 이어지기 때문에, 결국 임상 중지를 결정했다.

공시 전날인 12일 17만7500원으로 마감했던 녹십자 주가는 해당 악재 발표로 장 기준 이틀 만에 175500원으로 1.1% 감소했다. 그러나 기존 제품 대비 약효 지속기간을 2배 가량 늘린 장기지속형 혈우병 치료제로 미국 시장 문을 다시 두드림과 동시에 중국 시장 공략에 집중하겠다는 전략 발표로 더 큰 하락세를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같은 날, 한국유나이티드제약도 중국 업체 장시지민커신집단유한공사(이하 JJK)로부터 '실로스탄CR정' 공급계약 해지 통보를 받았다는 사실을 공시했다.

▲중국 머웬파마와 실로스탄 CR정 공급계약을 체결하는 한국유나이티드제약

이번에 해지된 계약 규모는 384억원으로, 유나이티드제약 2015년 총매출의 24%에 달하는 대규모였다. 이번 계약해지는 JJK사의 일방적인 요구로, 공시 전 1만8700원이었던 유나이티드제약의 주가는 14일 최저 1만6350원선까지 12.5% 가량 떨어졌다.

그러나 이는 일시적인 감소만으로 그쳤다. 11월 15일 중국 머웬파마(Beijing Meone Pharma. Technology)와 ‘실로스탄 CR정’ 15년 계약을 체결함에 따라 오히려 호재로 작용했다는 평가다. 이번 계약 규모는 743억원 규모로, JJK와의 계약 규모의 두 배에 달한다.

한미약품은 10월 28일, 지난해 사노피와 5조원 규모의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한 당뇨신약 ‘에페글레나타이드’의 임상 3상이 당초 계획했던 2016년 4분기에서 2017년으로 연기된다고 공시했다. 임상 연기건은 중요성이 비교적 크지 않아 쉬쉬하며 넘겼던 종전 분위기와는 확실히 대비되는 모습이다.

동아에스티는 지난 11월 24일, 글락소스미스클라인(GSK)과 2010년 체결했던 GSK의 5개 전문의약품 제픽스, 헵세라, 세레타이드에보할러, 아바미스, 아보다트의 국내 공동판매 제휴를 11월 말로 종료한다고 공시했다.

동아에스티 측은 “금번 GSK와의 제휴 종료로 향후 동아에스티의 전문의약품 매출이 소폭 감소할 수 있다”라고 밝혔다. GSK와 공동 판매 중인 전문의약품 5개 품목의 매출은 2016년 3분기까지 158억원 규모로, 동기간 총 매출액 대비 약 3.6%다.

▲유한양행 본사 전경

유한양행은 지난 10월 27일, 엔솔바이오사이언스로부터 2009년 도입한 퇴행성디스크치료제 YH14618의 임상을 중단한다고 공시했다. 임상 2상에서 위약 대비 통계적 유의성을 입증하지 못한 것. 특히 이 신약은 유한양행 R&D 파이프라인 중 기술수출로 인한 기대감이 가장 큰 종목으로 꼽혀왔던 만큼 충격이 컸다.

이어 28일에는 고혈압복합제 YH22189 임상 중단 사실도 공표했다. 유한양행은 "세 가지 성분간 충돌을 이유로 YH22189 임상을 중단하고, 성분 비율을 재조정해 새로운 물질 'YHP1604'의 임상을 시작한다"고 밝혔다. 1건의 임상 중단도 터부시되는 업계 관행을 깨고 연달아 두 신약의 임상 실패를 알렸다는 점은 이례적이라는 평가다.

이 같은 제약업계의 자정 노력에 대해 한 업계 관계자는 “악재는 숨기고 호재만 강조해서 통하는 시대는 끝났다“라며 “제약업계에 낀 거품을 걷어내는 과정에서 당장의 작은 손해가 수반될 수는 있겠지만, 긴 안목으로 변수가 많은 신약개발 과정에 있어 임상 중단이나 연기, 계약 해지 등은 일상다반사임을 투명하게 알릴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류종화 기자의 전체기사 보기
  • 이 기사를 공유해보세요  
  • 카카오톡
  • 네이버
  • 페이스북
  • 트위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