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으로도 산부인과 의사 못 구해"… 분만 인프라 붕괴 '경고등'

대한산부인과학회 "분만기관 10년 새 40% 감소… 필수의료 체계 이미 한계, 대책 필요"
"의료사고 국가책임제·고위험 산모 수가 대폭 인상… HPV 검진·9가 백신 전환도 시급해"

"과거에는 지방 병원이 높은 연봉을 제시하면 의사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돈으로도 산부인과 의사를 구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골든타임을 놓쳤는지도 모릅니다."

산부인과의사들이 무너지고 있는 분만 인프라와 여성 필수의료 체계의 위기를 강하게 경고하며 국가 차원의 근본적인 정책 전환을 촉구했다. 

분만 가능한 의료기관이 급감하고 산부인과 전문의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가운데 현장의 의료진 이탈을 막기 위해서는 의료사고 국가 책임제와 수가 체계 개선 등 구조적인 대책이 시급하다는 목소리다. 

이재관 이사장

대한산부인과학회(이사장 이재관)는 지난 9일 기자간담회를 열고 '산부인과 필수의료 체계 강화를 위한 종합 정책 제안'을 발표했다. 이날 학회는 분만 인프라 강화, 진료수가 및 포괄수가제(DRG) 개선, 부인암 정책수가 신설, 자궁경부암 검진 체계 개편 등 4대 정책 패키지를 제시했다.

이재관 이사장은 "지금 산부인과 필수의료는 단순히 의사가 부족한 문제가 아니라 버티기 어려운 구조 때문에 무너지고 있다"며 "분만과 부인암 진료 체계는 한번 붕괴되면 10~20년 동안 회복하기 어려운 만큼 지금이 사실상 마지막 골든타임"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이번 정책 제안은 의료계의 이해를 넘어 저출산 대응과 여성 건강 보호라는 국가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최소한의 출발점"이라며 "정부와 국회가 실질적인 제도 개선과 예산 투입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분만기관 10년 새 40% 감소… "아이 낳을 병원 사라진다"

학회에 따르면 지난 10여 년간 국내 분만 가능 의료기관은 약 700곳에서 400곳 수준으로 줄어들어 약 40% 감소했다. 전국 250개 시·군·구 가운데 분만기관이 한 곳도 없는 지역은 이미 30%를 넘었고 분만기관이 1곳만 남은 지역까지 포함하면 절반 이상이 사실상 '분만 취약지역'으로 분류된다.

이상훈 대한산부인과학회 사무총장은 "저출산으로 전체 분만 건수는 감소했지만 산모 평균 연령 상승과 만성질환 증가로 고위험 임신과 분만은 오히려 늘고 있다"며 "분만은 줄어드는데 한 건 한 건의 위험도는 높아지는 구조적 역설이 나타나고 있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분만 인프라 유지 비용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24시간 당직 체계와 인건비, 의료사고 보험료 등 고정비 부담이 커지면서 분만을 중단하거나 분만실을 폐쇄하는 의료기관이 늘고 있다는 것이다.

이상훈 사무총장

"의료사고 소송 공포가 산과 기피 원인"

산부인과 전공의 지원 감소와 전문의 이탈의 가장 큰 원인으로는 '사법 리스크'가 지목됐다.

이 사무총장은 "불가항력적인 분만 사고임에도 수억 원에서 많게는 20억원에 달하는 민사 배상 판결이 나오고, 형사 고소까지 이어질 수 있는 현실이 산부인과 기피의 핵심 원인"이라며 "산과 기피 이유의 약 80%가 의료사고 소송 위험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에 학회는 분만 등 필수의료 영역에서 발생하는 무과실 의료사고에 대해 국가가 책임지는 '100% 국가 책임제' 도입과 형사 면책 제도 마련을 요구했다.

또 고위험 산모 진료에 대한 보상을 현실화하기 위해 수가를 최대 500%까지 인상하는 방안을 정부와 협의 중이라고 밝혔다.

분만 인프라 유지 위한 '직접 지원' 필요

학회는 분만 인프라를 유지하기 위해 의료기관 운영 지원을 넘어 의료진 인건비를 직접 지원하는 방식의 제도 도입도 제안했다.

분만을 수행하는 산부인과 전문의와 분만취약지 간호사·조산사의 고용 비용 일부를 국가가 보전하고, 고위험 산모·신생아 통합치료센터 운영비를 집중 지원해 지역의 '마지막 분만 거점'을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또 고위험 임신·분만 관리 강화를 위해 야간·휴일·응급 분만 가산 수가를 도입하고, 고위험 산모·신생아 진료를 담당하는 산과·소아청소년과 전문의에게 별도 인센티브를 제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재관 이사장은 "전남에서 조산아가 발생해도 지역 병원의 신생아 중환자실이 부족해 수도권 병원까지 이송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며 "산부인과 문제는 산과와 소아과가 함께 해결해야 할 모자 의료체계의 문제"라고 말했다.

DRG 개편·부인암 정책수가 신설도 제안

이와함께 현재 산과 포괄수가제(DRG)가 분만 위험도와 응급 상황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예정 제왕절개와 응급 제왕절개, 태반조기박리·전치태반 등 고위험 상황이 사실상 동일한 수가 체계로 묶여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위험도·응급도 기준 DRG 세분화 ▲고령 산모·다태임신·만성질환 등 고위험 요인 가산 ▲야간·휴일·응급 분만 가산 수가 도입 등을 제안했다.

또 난소암 종양감축술, 광범위 자궁절제술 등 고난도 부인암 수술에 대해서는 별도의 '부인암 공공정책수가'를 신설해 다학제 진료와 응급 수술 체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주웅 이대서울병원장

"자궁경부암 예방 정책도 전면 개편 필요"

특히 이날 간담회에서는 자궁경부암 근절을 위한 국가 정책의 대전환도 핵심 의제로 다뤄졌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인유두종바이러스(HPV) 감염으로 발생하는 자궁경부암을 '근절 가능한 감염병'으로 규정하고 ▲백신 접종 90% ▲검진 70% ▲치료 90%를 목표로 하는 '90-70-90 전략'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국내 자궁경부암 국가 검진은 여전히 세포검사(Pap smear) 중심 체계에 머물러 있다는 지적이다.

주웅 이대서울병원장은 "현재 국가암검진에 쓰이는 자궁경부 세포 검사(팝스미어)는 5천원짜리 구형 방식으로 암 발견 민감도가 60~70%에 불과하다"며 "WHO 권고대로 훨씬 정확도가 높은 'HPV 바이러스 검사'를 국가 건강검진의 1차 선별 검사로 즉각 도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백신 접종 지원(NIP) 정책에 대해서도 쓴소리가 이어졌다.

현재 국가는 4가 백신만을 무료로 지원하고 있으나, 학회는 최신 백신인 '9가 백신'으로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주 병원장은 "한국 여성에게 흔한 52번, 58번 바이러스는 4가 백신으로 막을 수 없고 9가 백신에만 포함돼 있다"며 "OECD 국가 중 4가 백신으로 남녀 동시 접종을 하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국민 건강을 위해 구형 백신 재고 처리가 아닌 최신 백신 지원이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학회는 4가에서 9가로의 백신 전환과 HPV 검진 도입이 예산 문제로 계속 후순위로 밀리는 현실을 비판하며, 오는 4월 국회 포럼을 통해 2027년도 예산 편성을 강력히 촉구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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