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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년 민병호 ‘동화약방’창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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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 이병구 기자
  • 작성일 : 2007-02-12 08:15:04

상술능한 탁월한 기업가


일본의 진출이 본격화된 구한말부터 일본제 상품 복식 습관 등 일본의 문화가 조선에 깊숙이 침투하기 시작했다. 이런 분위기는 일본인들의 활동이 왕성했던 도시 뿐만 아니라 시골까지도 이어졌다.
이에 맞서 조선도 민족기업인에 의한 공장을 설립해 대항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대항이라기 보다는 일방적인 일본의 양적 질적 공세에 밀리는 수준에 불과했다. 공장 역시 일본인의 입김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으며 규모나 시설면에서는 일본식 공장을 모방하는 수준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일본식 공장이나 문화가 모범답안으로 받아 들여 지던 때였다.
이때 궁중의 선전관이었던 노천 민병호는 이를 사직하고 약방을 차리기로 결심했다. 이미 활명수가 만병통치약으로 인식되면서 대중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고 이를 사업에 응용하면 큰 돈을 벌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민병호는 상술에 능했으며 탁월한 기업가 정신을 가진 선구자 였던 셈이다. 그는 일본인들이 한국에 와서 장사하면서 큰 돈을 버는 것을 보고 이를 능가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이를 위해 그는 활명수에 버금가는 좋은 약을 만들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다. 장남인 민강은 충북 청주 출신의 독립운동가로 1909년 안희제 서상일 신성모 박중화 등과 대동청년단을 결성했다. 1919년 3.1운동 후에는 서울에서 동화당약방을 경영하며 국내의 독립운동가와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간의 연락책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는 임시정부에 발송 할 비밀문서를 목판에 새기다 일본경찰에 발각되자 중국으로 망명했다. 후에 상하이에서 일경에 체포된 그는 본국으로 송환돼 감옥에서 옥사했다.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독립장을 수여했다. 노천은 이런 아들과 함께 고금으로 전해 내려오는 경험방이나 유명한 의사의 비법이 있다면 어디든지 가리지 않고 비법을 전수하기 위해 노심초사 했다.


민족합심 의미 담아


활명수에 이어 인소환 백응고 등이 탄생할 수 있었고 이를 배경으로 동화약방을 창립했다. 1897년 9월 25일이다. 이때 노천은 불혹의 나이에 접어 들었고 이제 막 피어나기 시작한 젊은 청춘인 장남을 전면으로 내세우고 자신은 후견인으로 한발 뒤로 물러났다.
주역에서 따온 동화의 동(同)자는 두 사람이 마음을 같이 한다면 예리해 쇠도 자를 수 있다는 뜻을 담고 있다. 화(和)자는  민족이 합심하면 잘 살 수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二人同心 其利斷金, 時和年豊 國泰民安). 약방의 방(房)은 제조하는 것으로 당시에 사용됐던 필방 은방 약방 등이 다 같은 의미였다.
문을 연 곳은 서소문외 차동이었다. 수렛골로도 불렸으며 추모동이라고도 했다. 이같은 이름은 조선조 숙종의 비 였던 인현황후의 생가터에 세워져 있던 추모각비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후 일제시대는 부근에 우물이 있다고 해 화천정으로 불렸고 해방 후에는 순청의 순자와 화천정의 정자를 따서 순화동으로 개명됐다. 현재 중구 순화동이 바로 그곳이다.


한자리서 100년 맥이어


동화약품이 있는 자리다. 100년 넘게 한자리에서 동일상호 동일제품으로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그 역사적 가치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것이다. 어쨋든 회사를 출범한 동화약방은 상징물로 부채를 사용했다. 부채를 사용한 것에도 깊은 뜻이 담겨 있다. 부채표는 시전(時傳)에서 비롯된 것으로 지죽상합 생기청풍(紙竹相合 生氣淸風) 이라는 말에서 따왔다. 이 말은 민족이 합심하면 잘 살 수 있다는 뜻이다. 당시 일본 병합을 눈앞에 두고 풍전등화와 같던 위기 상황에서 기업의 상호와 상징물에 이런 의미를 내포한다는 것은 위험한 것이었지만 독립운동을 했던 노천의 뜻과 민강의 마음이 일치돼 이런 일이 가능했다.
당시 부채는 두 종류가 있었는데 하나는 부녀자들이 집안에서 사용하던 자루가 달린 둥근 부채인 방구부채와 남자들이 외출시에 가지고 나갔던 펴지고 접히는 부채인 접선이 그것이다. 접선은 들고 다닐 수 있어 쥘부채라고 했으며 당시 힘깨나 쓰는 양반들은 의관을 갖추고 외출할 때는 늘 부채를 들고 다닐 만큼 장신구로 인기가 높았다.
더운 날 시원한 바람을 일으키기도 하고 장신구로 사용했던 부채는 당시에 구급약통 구실도 했다. 단오날 3품 이상의 벼슬아치에 하사하는 부채에는 내의원에서 만든 옥추단에 구멍을 뚫어 다는데 이를 가지고 다니다 복통이나 곽란 등 급병이 생길 경우 이 선초의 옥추단을 긁어 물에 타 마셔 응급 처치 했다는 것이다.
부채는 원래 더위를 쫓는 데 사용했으나 점차 의례용 또는 장식용으로도 쓰였으며 전통 혼례 때 신랑 신부의 차면용(遮面用)으로 인기가 높았다. 화가나 서가 문인 들은 부채에 그림이나 시 구절을 새겨 집에 장식용으로 보관하기도 했다.
한국고전무용에서는 부채춤으로 명성을 잇고 무당들은 굿을 할 때 부채로 신통력을 얻기도 한다. 최근에는 에어컨 등에 밀려나고 있지만 관광객을 위한 특산품으로 여전히 일반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동양에서 사용돼 서양으로 건너간 부채는 진주나 비단 처럼 귀중한 물건으로 취급되기도 했다.
부채살로 대나무가 적격이었으나 금이나 은이 사용되기도 했으며 서양에서는 18세기 여성의 일상생활에서 부채를 빼놓을 수 없을 정도로 장식품으로 애용됐다. 부채의 시초는 일본이며 일본은 이미 7세기 경부터 부채를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뒤늦게 들여왔고 주로 대오리로 살을 만들어 종이 또는 헝겁을 발라 만들었으며 전북 전주, 전남 남평, 나주 등지에서 생산된 부채를 상품으로 쳤다.


98종의 다양한 약 생산


이처럼 동화의 상징인 부채는 우리민족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고  많은 뜻이 내포돼 있었던 것이다. 창업 후 바로 동화는 약을 만들기 시작했다. 당시의 약은 부작용이 없고 오랫동안 사용해 효과가 입증된 한약재를 주로 이용했다. 이후 서양문물이 들어오면서 활명수는 물론 인소환 백응고 지해로 등의 일반약과 소아약  보약 등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순화동 공장에는 돗자리 60장을 깔만한 네모 반듯한 작업장을 만들고 창고와 방앗간을 지어 본격적인 공장의 형태를 갖추었다. 물론 가내 수공업에 그친 것이지만 당시에는 필적할 상대가 없는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직공도 뽑았는데 대개는 15~20세 사이였으며 뽑힌 여직공은 충전 등의 일을, 남직공은 방앗간과 발송일을 담당했다. 특히 활명수의 경우 일부 배합은 공개적으로 했으나 약효를 내는데 중요한 마지막 배합시는 책임자가 다른 사람은 볼 수 없도록 뒤돌아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비법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 당시에도 있었음을 반증하고 있다.
경쟁자 없이 승승장구 하던 동화는 1908년에는 무려 98종에 이르는 방대한 양의 다양한 약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때 내부 관제 개정이 있었고 이에 따라 위생국의 정식허가를 받아서 의약품을 만들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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