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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국내 첫 약사법률 제정

  • 고유번호 : 851
  • 작성자 : 이병구 기자
  • 작성일 : 2007-02-12 08:17:29

동화약방, 의약품 100여종 생산 판매
당시 약값 비싸 주로 부유층이 고객


동화가 돌풍을 일으키자 여기 저기서 동화를 모델로 유사업소들이 우후죽순 처럼 생겨나기 시작했다. 박용환의 공애당대약방, 이흥국의 제생당약방, 이응선의 화평당대약방, 이옥인의 신제당약방 등이 줄을 이었다. 1910년 한일합방이 일어나던 시기였다.
그 이전 동화는 융희 2년( 1908)1월에 관제 개정에 따라 위생국에서 정식 허가를 받아 의약품을 생산하기 시작했고 합방 후에는 총독부 위생과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칙령 제 319호에 의해 탄생된 총독부의 초대 총독에는 통감으로 있던 육군 대장 데라우찌가 취임했으며 데라우찌는 의약품의 생산 판매 등 모든 것을 그의 휘하에 있던 경무부에서 관할 하도록 했다.


경찰이 의약품 관할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갔지만 동화는 이에 굴하지 않고 제약 본연의 임무에 충실해  당시 벌써 100여종의 의약품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100여 종의 의약품 중 주요의약품 60여종은 정가를 매겨 판매했다. 동창고 잡목고 신묘산 등이 정가 5전, 인소환 개안수 치통수 치인수 정가 10전, 회충환 복학산 마안산 영응유 호정고 설태고 정가 15전, 소감산 친인산 치리산 토혈산 해혈산 소아지해산 이급환 소적환 천감고 촌충약 등은 정가 20전에 팔렸다.
활명수는 정가 40전 이었으며 보원액 정중고 등은 80전을 호가했다. 난제고 삼백수 익신고 등은 정가 1원이었으며 낙매환은 무려 3원에 달했다. 당시의 물가와 비교했을 때 이 정도 가격은 엄청나게 비쌌다.
따라서 일부 부유층 들이 주 고객 이었고 대다수 서민들은 활명수 한 번 먹어보는 것이 소원일 정도였다. 또 당시에는 약을 잘못 먹고 요절하는 경우도 가끔 있었다. 따라서 이런 것들을 예방하기 위해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던 약효와 부작용이 증명된 한약재를 주로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동화가 이처럼 100여종의 약을 생산하고 정가까지 매겨 약을 팔고 있었지만 전체적인 보건 위생은 엉망이었다.
일제에 의해 나라를 뻬앗겨 온 국민은 울분에 차 있었으며 일제는 체계적인 국민건강을 위한 어떤 가시적인 성과를 보이지 않았다. 또 기근으로 입에 풀칠 하기도 어려웠던 시절에 약은 일종의 호사스런 사치의 일부로 여겨지기도 했다. 콜레라 장티푸스 이질 디프테리아 등 각종 전염병이 창궐했지만 이를 효과적으로 차단할 수 있는 방책은 거의 없었다. 한마디로 죽고 사는 것은 전적으로 하늘의 운명에 맡겨야 하는 비극적인 시대 였던 것이다.
이런 혼란한 틈을 이용해 1883년 경부터 일본관의원에 약을 공급하던 일본 약업자들은 은단 용각산 건위고장환 건뇌환 대학목약 등 당시 일본에서 유행하던 약을 조선에 들여 오면서 상업적 매약 시대를 본격적으로 열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동화약방도 일본약업자 들의 활동에 자극을 받아 생겨난 것이었다. 현재와 비교해 원시적 수준에 머물던 이들 약품과 약업상들의 활약이었지만 이들이 약업의 뿌리였던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조선을 점령한 일제는 이듬해 8월 보건위생 행정을 내무부 소속에서 경무 총감부로 관할을 옮겼다. 경무총감부는 헌병과 경찰을 지휘하던 곳으로 악명을 떨쳤는데 이곳에 위생국을 둔 것은 보건 위생을 철저하게 경찰의 하부조직으로 통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경찰이 보건위생을 총괄하는 웃지못할 촌극이 벌어졌던 것이다. 이후 1912년에 비록 일제에 의해 정해진 것이기는 하지만 처음으로 약사(藥事)에 관한 법률인 약율이 제정됐다.
조선총독부령 제22호로 약품 및 약품영업취체규칙과 세칙 매약이수출입규칙 등을 포함하는 약율이 제정 공포 됐고, 그해 7월 1일부터 시행됐다. 이에따라 약제사 제약자 약종상 매약업자는 경찰의 허가를 받아야 업을 할 수 있게 됐다. 약품영업취체령이 시행되자 그동안 무질서 하게 취급되던 독약 극약의 규제가 실시됐고 이에 따라 요절 등의 사고는 많이 감소했다.
제1조를 보면 “의사는 치료를 위해 환자에게 약품을 판매 투여할 수 있다” 고 했다. 의사의 약 판매 및 조제권이 인정된 것이다. 의약분업이 실시되기 전까지의 오랜 관행은 이미 일제시대부터 있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제 4조를 보면 “약품은 일본 약국방과 외국약국방에 기재된 것에 한해 제조 판매 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는 우리의 제약기술의 수준이 미미 했다는 것의 반증이지만 한편으로는 우리 약업발전을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했다.


의사가 조제권 가져


약품의 감시와 관련 해서는 감시원이 필요한 양의 약품을 무상으로 가져올 수 있다고 정해 검사나 실험 혹은 다른 이유로 약을 마음대로 뺏을 수 있도록 했다. 경찰서는 약품위생 위반이나 기준 미달이라는 이유로 제조업의 중지, 폐쇄를 임의로 결정했다.
약제사는 의과대학 약학과나 약학전문학교 또는 약학교를 졸업한 자 또는 일본 내무성 및 조선에서 시행하는 약사시험에 합격한 자로 제한했다. 약종상은 약품에 관한 지식과 경험이 있는 사람 가운데 반드시 허가증을 얻어야 했고 약품을 판매하는 것만 허가를 받았다. 이들이 취급하는 약품은 의료용품과 공업 및 화학 용품도 포함돼 있었다. 그러나 한국인 약종상은 한약에 한해 판매하는 제한된 조건을 가진 허가가 대부분 이었다. 일제가 조선인에 대해 업의 제한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제약자는 약품을 제조 판매 하는 자로 반드시 경찰의 허가를 받아야 했으며 약종상과 마찬가지로 주로 한약에 대한 제조 판매로 그 업을 규제했다. 매약으로 제조된 제품을 판매하는 자인 매약업자는 조제에 있어 매우 까다로운 조건을 충족해야 했다. 매약업자가 조제를 할 경우에는 매약의 처방명 조제원료 분량 제조방법 용법 복용량 효능 등을 자세히 기록해 경찰의 허가를 받아 조제해야 했다.
한마디로 의약지식이 전혀 없는 경찰이 전문 지식인을 상대로 면허시험이나 허가 감독 사후관리를 담당했던 것이다. 매약이수출입규칙(賣藥移輸出入規則)이라는 것도 있었는데 이는 약품의 수출과 수입 등 무역에서도 우리 약업계 활동을 억압하기 위해 만들어 진 것이었다. 특히 조선의 특산물이었던 인삼 복령 황련 대회향 오배자 등 약효가 높아 가격이 비쌌던 한약재의 수출은 엄격히 통제됐다.
대신 총독부 경무국장의 승인을 받는데 유리한 위치에 있었던 일본 약업상들의 독점영업에 따른 폭리가 다반사로 이루어 졌다.


구멍가게서 약 팔아


여기에 인단을 비롯한 일본의 매약이 조선에 많이 들어 왔으며 이들 약들은 잡화상이나 구멍가게 등에서도 팔렸다. 또 일본인 행상이 거리에서 팔기도 했는데 인기 품목으로는 건위고장환 해전위산 중장탕 건뇌환 대학목약 로도안약 등이 있었다.
이때 동화약방 외에 제생당약방 화평당약방도 조선인이 운영하는 약방으로 위세를 떨치기 시작했다. 일본 매약중 잘 팔렸던 인단을 모방한 청심보명환을 주로 생산했던 제생당약방은 서울 태평로에 위치했다. 종로에 있었던 화평당약방은 팔보단 자양환 태양로경환 회생수 소생단 하리산 급체쾌통산 등 40여종의 가정상비약을 만들어 판매 했다.
조근창씨는 천일약방을 세워 가정 상비약인 조고약을 만들어 한 시대를 풍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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