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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종특상제 실시 약업시장 큰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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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 이병구 기자
  • 작성일 : 2007-02-12 08:18:23

경쟁과열 되자 동화약방 독자규례 제정
이석모, 국내 첫 제약법인 ‘조선매약’설립


동화약방 제생당약방 화평당약방 등은 서울에서 활약했다. 동화약방은 중구 순화동에, 제생당약방은 태평로에, 화평당약방은 종로에 위치했다.
지방에서도 약방들이 생겨났다. 1913년 평안남도 중화군에 자선당약방이, 이듬해 대구 남문의 보혜약방,  평양부 전구리의 춘포약방이 잇따라 설립됐다. 자선당약방은 향인단 등 53종을 보혜약방은 보익환 등 50여 종을 춘포약방은 춘포회생산 등 8종을 허가받아 생산하기 시작했다.


경쟁치열 유사품 범람


평양부 대동문에 있었던 보혜대약방은 보혜보명단 등 30여종을 허가 받았다. 약방이 잇따라 생겨 나면서 약업초창기에 보였던 거래양식의 단순함이 사라지고 의약품의 가짓수도 크게 늘었났다. 약업시장 규모도 엄청나게 커져  경쟁이 치열해 졌다. 각종 유사품도 넘쳐 났다.
이에따라 각 약방 등은 자사 매출을 극대화 하기 위해 갖가지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이들은 지금 약업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각종 판촉 수단의 선구자 였던 것이다. 사입조건이나 수금형태에 따른 각종 할인이 성행했고 연종특상(年終特賞),경품부특배 등이 수시로 이루어 졌다. 또 부속의원도 경영했다.
경쟁이 심해지면 이에대한 규제도 필연적으로 따를 수밖에  없어 영업규례가 제정되기도 했다. 1910년 10월 동화약방은 독자적인 영업 규례를 만들었다. 10원 매상의 규모는 출장소라고 칭했으며 5할 할인이 가능했다. 1,000원 이상 판매는 군지점, 1만원 이상은 도지점이라고 불렀다. 지점을 설치한 지방에는 중복 설치를 피했으며 해당 지역의 출장소는 지점에 약품을 청구하도록 했다. 운송비는 내지철도에 대해 출장소측에 매 10원에 1원씩을 도와주고 지점의 경우 100원에 5원을, 그 외 부족한 부분은 본포가 담당 하도록 했다.
상여품(賞與品)은 매 100원 매상에 할리금(割利金) 10원 어치를 약으로 권장했다. 1,000원 매상의 경우는 150원 정도의 약으로, 1만원 매상은 2,000원 어치의 약으로 특별 시상했다. 단 외상은 허용되지 않았다. 정가를 위반해 약을 팔 경우 벌금을 물도록 했으며 심지어 허가를 취소 하기도 했다. 벌칙으로는 각기 출입금액 물가지수에 따라 위약금을 배상하도록 해 원칙 경영를 꾀했다.


정가위반 허가취소


1911년에는 규례의 일부 조항을 수정했으며 출장소 규모도 세분화 했다. 특히 지방의 소읍까지 출장소를 보유해 전국적인 조직을 완료 했다. 당시 동화의 출장소 규모는 1910년 8월 30일자 매일신보에 실린 광고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平壤西門內宋尙兪氏 爲道支店側 該道內
百八出張及郡支店은 該支店에 求藥


이 광고를 보면 평안남도에만 무려 108개의 출장소 및 군지점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규례에 따른 1911년 연종특상을 받은 군지점은 북간도를 비롯해 전국 69개 지점에 달했다. 북간도에 지점이 설치된 것은 이 지역이 독립운동 기지로 가장 먼저 개척된 곳이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독립군 기지에도 지점 설치


1905년 을사조약 체결로 망국의 한을 품은 이상설 이동녕 등 민족 운동가들은 그 이듬해부터 북간도의 중심지인 연길현 용정촌을 독립군 기지로 삼았다. 만주지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운동가들은 이곳에 독립운동의 상징인 일송정 비석을 세우기도 했다. 독립운동가 였던 동화약방 사장인 민강이 이곳에서 수익을 얻어 독립군자금으로 지원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어쨋든 연종특상 상금은 현금 400원 이상을 받은 곳은 평양군 지점 1개처, 현금 200원은 대구군지점 2개소, 현금 100원은 사리원지점 1개처, 현금 50원은 함흥군 지점 흥해군지점 밀양군 지점 창성군지점 등 4개처 였다.
현금대신 약품으로 주는 특상도 있었는데 인소환 200포 시상은 은율군지점 선천군지점 정주군지점 등 3개처,100포 시상은 밀양군지점 북간도지점 등 27개 처 인소환 50포 시상은 부안군지점 울산군지점 등 31개처에 달했다.
이처럼 동화약방의 지점은 북으로 북간도 초산군, 남으로 순천군 김해군 등 전국 모든 지역에서 고루  분포돼 있었고 영업실적이 우수한 지역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같은 연종특상은 당시 약업시장에서 매우 의미 있는 일이었다.


유세환, 한인 약제관 유일


특상의 공개는 자칫 경쟁을 부추켜 유통혼란이 우려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동화와 경쟁위치에 있던 화평당약방은 대상자의 명단 공개를 꺼렸다. 지점별 명단 공개는 동화가 처음이었다. 1911년 연종특상 명단은 이듬해 1월 1일자 매일신보 공하신년 광고로 발표됐다.
한편 1909년에는 우리나라 약사 전반에 걸쳐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일본인 고지마가 중심이 된 한국약제사회가 탄생했다. 대한의원 약제관이었던 고지마는 조선총독부 경무국 위생과 약무주임을 역임했으며 이때부터 우리나라 약무행정을 도맡아온 인물이었다. 당시 일본인 약제사는 서울에만 30명 등 전국에 50명이 있었다. 이들이 중심이돼 창립된 한국약제사회의 한국인 정회원은 유세환씨 단 1명 이었다.
한말의 약제관이었던 유세환은 1893년(고종 30년)관립 일본어학교에 입학해 일본어를 공부하고 1897년 일본으로 건너가 1900년 일본 도쿄약학교를 마쳤다. 같은해 일본 도쿄의대 선과에 입학, 1902년 졸업한 뒤 귀국해 내부 광제원위원 의학교주임교관 유행병예방위원 육군 약제관 등을 역임했다. 1907년에는 대한의원 교관이 됐고 이듬해 대한의원 교수로 활동하면서 많은 후학들을 길러냈다.
정회원외에도 약학자나 약업자를 찬조회원으로 두고 서로 정보를 교환하기도 했다. 찬조회원은 모두 34명이었고 이중 일본인은 5명이었다. 한국인 가운데는 구리개의 약업자들이 대거 찬조회원으로 참여 했으며 이들은 나중에 약학강습소를 태동시키는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구리개는 일제때 황금정이라 불렸던 곳으로 지금의 명동 관문인 을지로 입구 일대를 말한다. 지금은 평지지만 조선시대만 해도 남산에서 시작돼 청계천으로 흘러드는 10여개의 개천이 지나는 구릉지대였다.


구리개 약업자 활약 대단


한국약제사회는 한일합방으로 조선약제사회로 명칭이 변경 됐으며 초대 회두 고지마에 이어 부회두를 맡고 있던 데다라가 새로운 회두로 선출됐다. 유세환씨는 평회원의 신분을 유지했다. 1913년에는 한약국을 경영하던 이석모 등이 우리나라 처음으로 제약업 법인체를 설립했다. 이 법인체는 조선매약주식회사 였는데 초대 사장에 이석모씨가 취임했다. 이석모는 조선총합소 2대 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조선매약은 오래전부터 이용해 안전성과 효과가 입증된 고방약(古方藥)을 주로 생산했다. 고방약 말고도 영신환 우황청심환 포룡환 칠제향부환 조경종옥환 등이 조선매약의 주요 생산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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