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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제1회 약사자격시험 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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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 이병구 기자
  • 작성일 : 2007-02-12 08:19:51

이호벽,신경휴씨 우리나라 약사1호
조선약학강습소, 2년제 약학교 승격


1908년 장진계 회원이 중심이 된 약업총합소가 탄생했고 이 단체는 우리나라 약학교육의 시발점이 됐다.
이들은 1915년 현대 약학 교육을 시행한다는 원대한 뜻을 품고 조선약학강습소를 발족하게 된다. 그 한해 전 약업총합소의 대표자 였던 조선매약 이석모 등은 약품 취급 하기 강습회를 개최했다.


친일파 끌어들여


강의 내용은 약사법규나 매약조제법, 약품 취급법, 약품 시험실습 등 약학에 관한 기본적인 내용들로 이루어 졌다. 이들은 좀더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약학 교육의 필요성에 따라 새로운 모임체 결성을 절실히 필요로 했다.
그러나 문제는 한국인들의 요구를 조선총독부가 들어 주느냐 하는 것이었다. 물론 자금이나 제반시설 등은 장진계에서 맡기로 하는 등 내부의견은 이미 조율을 마친 상태였다.
이석모는 당시 허가권을 쥐고 있던 조선총독부의 마음을 끌기 위해서는 친일파를 끌어 들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당시 친일파의 거두였던 조중응을 이용했다. 조중응은 한말의 문인으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지만 그보다 이완용 내각의 법무대신, 농상공부대신으로 더 잘알려져 있다. 서울출신인 그는 1880년(고종 17)전강유생(殿講儒生)으로 1884년 북방남개론을 주장하다 탄핵을 받고 1885년 전남 보성으로 귀양을 가기도 했다.
1890년 사면된 그는 1894년 일본에 갔다온 뒤 외무아문 참의, 법부형사국장 겸 특별법원 판사 등을 지냈다. 그 뒤 이완용과 한패가 돼 철저한 매국행위로 일관하다 한일합방 때는 조약 체결에 찬성, 매국 7역신으로 악명을 떨쳤다. 일본 정부로부터 자작의 작위를 받는가 하면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이 되기도 한 인물이다.
어쨋든 조중응이 대표를 맡자 조선총독부는 1915년 조선약학강습소를 허가했다. 조선약학강습소의 수업기간은 1년 이었으며 수강생의 편의를 위해 야학제로 운영됐다. 학생 수는 100명이나 됐으며 이들은 물리학 화학 생물학 약용식물학 위생학 약제학 등의 이론과목은 물론 제약 조제 정량·정성분석 및 약물 감정 등의 실습과목 그리고 약품취급법 약사법규 약품시험 일본약국방 등을 배웠다.
1918년에는 강습소는 2년제 조선약학교로 승격됐다. 창설자는 야마기시 이며 교장은 조중응, 이사는 조선매약의 이동선 이었다. 이듬해 3.1운동이 나자 한인 학생은 10여명으로 급감했다. 조중응의 사망후에는 2대 교장으로 아도고리가 취임하면서 약학교는 완전히 일인들이 주도해 나갔다. 1920년 5월 한국인 최초로 10여명이 졸업했고 그해 11월 조선총독부가 주관하는 제1회 약사자격시험이 30여명의 응시자를 모아놓고 실시됐다.


한국인이 1, 2위 차지


한국인 응시자 10여명 가운데 합격자는 단 두명이었는데 이호벽 이(당시 20) 수석으로 합격하는 영광을 차지 했다. 이호벽은 우리나라 제1호 약사였던 것이다. 2위 합격자는 신경휴였다. 이씨와 신씨는 일인과의 경쟁에서 당당하게 1,2위를 차지해 잠시나마 한국인들의 자존심을 세워주기도 했다.
이후 조선약학교는 1927년 3년제로 승격됐다. 1930년에는 경성약학전문학교로 1945년에는 사립서울대학교 약학대학으로 1950년에는 국립서울대학교에 편입돼 서울대 약학대학이 됐다. 오늘날 한국약학교육은 이런 역사적 변천을 겪으면서 탄생한 것이다.(참고로 1928년 5월 고려약제사회라는 약사회가 처음으로 결성됐다.)
한편 1913년 우리나라 최초의 제약법인체인 조선매약이 창설됐고 초대사장으로 이석모가 취임한 것은 앞서 살펴봤다. 조선매약은 승승장구 했으나 선전술의 부족 판매술과 자금의 원할한 운영을 하지 못해 사세는 급속히 기울기 시작했다.
이에 조선매약은 이응선의 평화당약방과 손을 잡지 않을 수 없었다. 이응선은 조선매약의 재건에 힘을 기울였으며 그의 동생 이동선을 전무취체역에 앉혀 매출극대화를 노렸다. 사위 조종국도 끌어 들였다.
또 국내 최초의 의약전문지인 중외의약신보도 조선매약으로 가져와 선전지로 이용했다. 이응선을 만난 조선매약은 이렇게 해서 기사회생했다.
특히 이동선은 약업인으로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조선약학교의 유일한 한국인 이사였으며 약업조합의 이사장으로 한국 약업계를 선도한 인물이었다. 장훈학교를 설립하는 등 공익사업에도 힘썼으며 경성부의회 의원에 당선돼 사회사업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또 일본인의 경제단체 였던 조선상공회의소와 맞선 한국인의 경제단체인 상공협회(지금의 대한상공회의소의 전신) 부회장을 역임했다.


공진회로 약업경기 활성


당시에는 공진회(共進會)로 인한 약업경기가 크게 활성화된 시기였다. 공진회는 1915년 9월부터 10월 사이에 경복궁에서 열린 일본 총독 통치 5주년 기념 박람회의 명칭이다.(참고로 안국선은 동일한 제목의 신소설집인 ‘공진회’를 쓰기도 했다.)
일제는 조선조 정궁에서 조선물산공진회를 열어 조선의 체면을 의도적으로 추락시켰다.
이들은 궁내 건물을 철거해 진열관을 신축하기도 했으며 경내에 불교유물을 수집 전시하기도 해 숭유억불정책의 사상적인 근거를 훼손했다.
뿐만 아니라 공진회 개막식에는 일인 총독 데라우찌가 근정전의 어좌에 올라 개회사를 읽는 등 오만한 행동을 했다. 일인이 공진회를 연 것은 한국을 침략한 후 한국의 발전상을 선전하기 위한 것이었다.
어쨋든 이 공진회로 약업경기는 번성했다. 동화약방은 물론 창립된지 얼마안된 제생당약방 화평당약방 조선매약 천일약방 등이 호경기로 기반을 확실히 다질 수 있었다.
제생당약방은 이경봉이 1900년 (고종 37)에 설립 했으며 대표품목은 청심보명단 이었다. 청심보명단은 당시 일본인들이 행상으로 판매망을 넓히면서 사업을 키웠던 인단, 건위고장환, 태전위산,중장탕,대학목약,로드안약 등에서 힌트를 얻었다.


선전술이 매출증대 가져와


청심보명단은 빠르게 입소문을 타고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당연히 수요도 넘쳐 났는데 당시에는 공장에서 약을 생산할 수 없었으므로 일일이 집에서 수작업을 할 수밖에 없었다. 밤을 세워가며 상 위에서 빚고 칼로 썰고 비벼서 약봉지에 담아 그 다음날 시내로 가지고 나가 팔았다. 말 잘하고 멋쟁이 였던 그는 부인까지 양장을 입혀 거리로 나섰는데 참으로 볼 만한 구경거리였다. 매사에 적극적이었던 그는 약업을 더욱 번창시켰는데 아깝게도 33세의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그의 아들 이일동이 업을 이어받았다.
1907년 또 한사람 약업선구자였던 인천의 이응선은 화평당약방으로 큰 돈을 벌었다. 그는 자경환 태양조경환으로 사세를 키웠는데 태양조경환은 자궁의 냉증, 월경불순에 사용했는데 아이없는 부녀자가 이 약을 먹으면 임신할 수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화평당의 급성장은 이같은 광고효과 때문이었고 이는 이응선의 영업수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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