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금강산특매등 경품마케팅 등장

  • 고유번호 : 859
  • 작성자 : 이병구 기자
  • 작성일 : 2007-02-12 08:20:53

천일약방, 당시 약업시장 최고 매출 자랑


조선약우회, 조선약학강습소에 이어 1928년 5월 고려약제사회가 결성됐다. 이 단체는 우리나라 최초의 약사회였다. 고려약제사회는 약학에 관한 연구 개선을 도모하고 약사 직능의 신장을 위해 활동했다.
약사들의 윤리확립에도 기여 했는데 이러한 규정은 모두 약사법에 규정됐다. 고려약제사회는 이후 45년 조선약제사회, 49년 대한약사회로 개칭됐으며 53년 12월 현재의 대한약사회가 창립됐다. 대한약사회는 전국 15개 시도에 지부를 두고 지부내에는 221개의 분회를 두고 있으며 국민복지 향상에 노력하고 있다. 최근에는 정부를 상대로 강력한 싸움도 전개할 수 있을 만큼 엄청난 압력 단체로 성장했다. 특히 의약분업의 와중에서 압력단체가 어떤 것인지를 확실히 보여주고 있다.
한편 이 당시 국내 약업시장에서 가장 많은 매출을 올린 업소는 조근창의 천일약방이었다. 효경다리 근처에 있었던 천일약방은 됴고약으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이를 바탕으로 무역업에도 손을 댔다. 천일약방은 조근창의 아들인 조인섭이 2대 사장에 취임하면서 사세를 급속히 키워나갔다. 단순 약 판매 뿐만 아니라 유통에도 관심이 컸던 조인섭은 한약재 무역에도 손을 뻗쳤다.
당시 한약재 무역은 중국인들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조인섭은 중국인을 고용하는 놀라운 상술을 발휘했다.
특히 천일약방은 ‘천일약보’라는 기관지를 매월 정기적으로 발행하면서 전국의 약업자들에게 배포했다. 이 약보는 약업자들에게 정보제공과 천일약방의 힘을 동시에 보여주는 중요한 매개체였다. 한약시세표는 물론 대담한 스페이스 광고도 내보냈다.
천일약방의 마케팅 능력은 대단했다. 이들은 당시에는 구경하는 것이 큰 화제 거리가 될 정도로 귀했던 포드 자동차를 광고에 활용하기도 했다.


숙박등 체류비일체 부담


천일약방과 됴고약 천일영신환 등의 깃발을 꽂고 전국의 약업시장을 도는 포드 자동차 마케팅은 그 자체가 구경거리였으며 영업에 막대한 이득을 안겨줬다. 천일약방은 또 3원 짜리 약을 한 병 구입하면 극장 초대권을 주기도 했다.
이밖에도 달력 특매라는 것도 이용했다. 달력을 주는 것은 지금도 제약사들이 이용하고 있을 정도로 역사가 깊다. 윷놀이 특매 화투놀이 특매 같은 것도 실시했는데 이들은 이를 핑계로 고급 음식점이나 기생집인 식도원이나 명월관 등으로 약업자를 초청해 환대 했다. 이 자리에서는 1등 금반지, 2등 은수저 등 푸짐하고 다양한 상품을 제공했다. 금강산 특매라는 것도 있었다. 금강산 특매는 비교적 규모가 컸으며 제품을 많이 팔아주는 약업자 중에서 선발했는데 1년에 서너 차례가 열리기도 했다.
비행기타기 특매도 있었다. 당시 비행기를 타는 것은 하늘의 별을 따는 것 만큼이나 힘든 것이었다. 비행기 유혹은 약업자들에게 좋은 리베이트 였다. 천일약방의 이런 기발하고 엄청난 특매제도는 일대 성황을 이뤄 천일은 엄청난 돈을 벌어 들였다. 비행기를 타기 위해 전국의 약업자 80여명이 서울로 모여 들었고 이들의 숙박비 등 체류비 일체는 당연히 천일약방이 부담했다. 비행기는 5분간 서울시내를 돌고 내려오는 것이었지만 비행기 구경도 어려운 판에 비행기를 탄다는 특매조건은 파격적인 것이었다. 이때 ‘얼렁뚱땅 비행기 태운다’는 유행어가 생겨나기도 했다.
한마디로 천일약방의 영업력은 대단했다. 서울시내서 택시를 보는 것도 힘든 당시에 60여대의 자동차를 동원해 한꺼번에 회사 깃발을 달고 서울시내를 질주하기도 했다. 천일이 이같은 기발한 아이디어를 낼 수 있었던 것은 당시 팔리는 약들은 모두가 ‘불사약’이나 ‘불로초‘라고 선전을 하던 때라 차별화 되지 않으면 경쟁에서 승리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경품 가운데는 요강도 끼어 있었다. 요강이 효도선물로 인기가 있었는데 요강을 사서 어머니께 드리면 장수한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그래서 요강이 ‘명다리’ 라고 불리기도 했다. 선물용 명다리 속에는 붉은 부적이 들어 있었는데 그 부적에는 이 약을 먹으면 장수한다는 글이 한문으로 쓰여 있었다. 요강 경품은 인단이나 영신환 판매에도 광범위 하게 이용됐다. 요강말고도 고무신이나 담배 쌀 삼층자개장 칠첩반상기 황소 등 다양한 경품이 제공됐다. 현재도 종류는 다르지만 경품들이 의 약사에게 제공 되고 있다.
3.1운동이 일어났던 해인 1919년 우리나라에는 악질이 많이 유행했다. 악질은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유행했는데 제 1차 세계 대전 후에는 스페인감기 일명 서반아감기가 전세계를 휩쓸었다. 이 유행감기(왜감기라고도 했다)가 우리나라에서 극성을 부린 것은 1918년 이었고 그 이듬해 까지 유행했다. 악질 뿐만 아니라 콜레라 적리(赤痢) 같은 급성전염병도 위세를 떨쳤다. 또 학질도 번졌다. 


양약판매 1호 활명당


하지만 이들 질병 치료제로 인기가 높은 양약은 모두 일본인만이 팔 수 있었다. 한국인 양약판매 허가증을 얻은 약종상 1호는 활명당약국 이었다. 활명당약국은 알코올이나 염산 같은 시약은 물론 말라리아(학질)의 특효약으로 유명했던 키니네를 수입해 금계랍(염산 키니네)으로 판매할 수 있었다. 활명당약방은 금계랍으로 단기간에 사업이 크게 번창했다.
금계랍은 학질 치료제 였으나 후에 진통제나 해열제로 불렸으며 나중에는 음독제로도 사용됐다. 진통제로 쓰일 때는 주로 오한에 걸린 사람이 사용했고 자살용 독극물을 쓸 때는 양잿물이나 금계랍이 이용됐다. 금계랍은 1896년 독립신문에 광고를 해 최초의 의약품 광고라는 기록도 갖고 있다. 금계랍은 한약을 신봉했던 사람들도 신통한 약효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양약의 진가를 여지없이 발휘했다.
당시 금계랍 광고에 이어 다른 약들도 광고에 열을 올렸다. 약광고에 열을 올린 것은 화평당약방이 영업비의 절반정도를 판촉광고에 활용하면서 매출이 급성장하자 이를 본뜬 것이다. 동화약방의 활명수 제생당약방 청심보명단 화평당약방의 팔보단 천일약방의 됴고약 조선매약의 영신환 등 광고가 일간지 한쪽면에서 쉽게 눈에 띄었다.


선발제품 꺾기 광고치열


특히 이들 제품들은 효과나 적응증 등이 엇비슷해 광고는 치열했다. 먼저 나온 제품을 꺾기 위해 자극적이고 직설적인 표현들도 넘쳐났다. 천일의 됴고약에 공애당의 청고약과 백응고가 도전장을 던졌고 동화의 활명수에 견주기 위해 조선매약의 약수 낙천당의 낙천약수 등이 광고에 열을 올렸다. 내용은 소시민의 우매함을 이용하거나 환자심리를 교묘하게 파고드는 심리를 이용하는 것으로 채워졌다.
이같은 광고는 선발주자나 후발주자 모두 같았다. 한 예를 들면 “인생의 욕망은 의식주가 족한 이상 일생일대의 쾌약함이 제일이라, 불국의학박사 아니량씨가 연구 제조한...” , 혹은 “칠십노옹이 무슨 약을 먹었는지 밤마다 괴롭히는 지라 노부인이 하루는 남편없는 틈에 몰래 그 약을 마당에 버렸는데 수탉이 와서 먹고 종일 암탉을 괴롭혀 드디어 암탉의 머리가 대머리가 되었도다” 하는 식의 정력제 광고도 있었다. 또 불사약 불로초 불로장생이 아닌 약이 없을 정도로 약의 과대광고는 극에 달했다.


 



리스트
답글

[그림의 영문, 숫자를 입력하세요]


[ 300자 이내 / 현재: 0 자 ] ※ 사이트 관리 규정에 어긋나는 의견글은 예고없이 삭제될 수 있습니다. ※ 현재 총 ( 0 ) 건의 독자의견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