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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애당약국, 일인과 대등한 경쟁 벌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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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 이병구 기자
  • 작성일 : 2007-02-12 08:21:55

통제경제 접어들자 매약 약방 사라져
자선당제약 ‘삼용토닉’ 일본수출 기염


한국인이 운영한 최초의 약국은 1910년 유세환의 인수당 약국이었다. 두 번째 약국은 조선약학교 1회 졸업생인 이정재가 22년 낙원동에 세운 삼우당약국이다. 삼우당 약국은 국내 약학교 출신이 세운 첫 약국으로 기록됐다.
1930년 대 들어 약국수는 크게 늘기 시작했다. 이덕휘의 박애당약국을 비롯해 김종건의 삼성당약국 김기곤의 부민약국 강중희의 궁부약방 김수만의 수성당약국 김상근의 천풍당약국 장삼현의 삼현약국 서정환의 백송약국 박승원의 만리약국 김진해의 고수당약국 한윤수의 경성약국 정영섭의 청률약국 유영규의 동소문약국 정동하의 정향당약국 조성호의 천제당약방 정연창의 모범약국 등이 잇따라 생겨났다.


약국 잇따라 개업


이들은 여러 불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일인의 약국 들과 경쟁을 벌이는 저력을 과시했다. 이 가운데 이덕휘의 박애당약국은 발군의 실력을 보였다. 대한약사회 2대 회장을 지낸 심석 이덕휘(지난 97년 1월 사망)는 1926년 조선약학교를 졸업하고 종로 3가에 있던 박애당약국의 관리약사로 취직했다 이를 인수했다.
박애당약국은 이덕휘가 인수한 이후 나날히 번창해 일인들이 주름잡던 약국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박애당약국이 얼마나 유명했는지 당시 당안 제일로 손꼽히던 일본인이 운영하던 야마기시 약방과 견줄 정도였다. 야마기시약방은 남쪽에 있어 ‘남촌의 야마기시, 북촌의 박애당’으로 불릴 만큼 박애당의 위세는 대단했다.
당시 약국은 약방과는 달리 조제를 할 수 있어 ‘처방조제’라는 간판을 내걸 수 있는 특권이 있었다. 약국에는 약사가 한 두명에 불과했고 약국 숫자도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으며 약방에 비해 규모도 작았다. 그러나 정부 면허를 가진 약국의 자존심과 기세는 약방에 비할바가 못됐다. 약사의 월급은 엄청나 이들이 얼마나 큰 대접을 받았는지 알 수 있다.
당시 쌀 한가마니 값이 7~8원에 불과했는데 약사의 월급은 무려 50~60원에 달했다. 따라서 규모가 큰 약방이라 하더라도 관리약사를 고용하는 것은 힘에 벅찼다. 약국들은 대부분 항생제 설파제를 비롯해 유산균제제 요오드링크 인단 용각산 오따위산 등 수입약을 팔았다. 또 기사회생의 명약으로 선전했던 우황청심원은 오동나무 상자에 넣어 팔았는데 마진이 50%에 달해 우황청심원 하나만 팔아도 하루 매출을 올릴 수 있을 정도였다. 일일 매상이 겨우 3~4원에 머물렀던 영세한 매약상들에게 3원하는 청심원은 매력적인 약이었던 것이다. 약효와는 상관없이 엄청난 이윤을 챙긴 것이다. 지금도 약값의 허세가 심한 것을 보면 약값거품의 전통은 그 뿌리가 깊음을 알 수 있다.
1929년 5월에는 김일영이 자선당제약을 창립했다. 자선당제약은 ‘삼용토닉’이라는 제품을 일본에 수출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삼용토닉은 강장제 였으나 방부제로 알코올 5%가 포함돼 있었다. 당시는 주류판매를 엄격히 통제 했던 시절이었으므로 알코올이 포함된 강장제의 인기는 대단할 수밖에 없었다.


처방조제 자부심 대단


몸도 튼튼히 하고 술도 취할 수 있는 약은 선전을 하지 않아도 구전으로 급속히 사람들에게 인식됐던 것이다. 30년 대의 특이한 상황 가운데 하나는 종래의 매약이 급속히 쇠퇴 하고 양약방이 생겨나기 시작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때 생긴 약방 가운데는 평화당 신기신성당 도약방 동일약업사 등이 있다. 이근택의 평화당은 백보환을 다른 약들과 마찬가지로 만병통치약으로 선전했다.
때마침 손기정 선수가 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2시간 29분 19초의 경이적인 기록으로 우승하자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다름아닌 “ 손기정이 백보환을 먹고 우승했다” 고 선전한 것이다. 말도 안되는 선전이었지만 이 광고는 일반 대중에게는 크게 어필했다. 그래서 병자들이나 좀더 건강해지고자 했던 사람들은 백보환 먹는 것을 굉장한 자랑거리로 여겼다.
한편 백보환의 인기가 크게 일어날 무렵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던 백백교 사건이 터졌다. 백백교는 동학계통의 백도교에서 파생된 유사종교 였으나 사이비로 변질됐다. 동학은 조선 후기 철종 때 최제우가 유 불 선 삼도의 교리를 종합하고 절충해 동학을 창시 했는데 이 동학에서 많은 유사종교가 파생됐고 백도교도 그 중의 하나였다.


백보환, 백백교 광고로 이용


백도교는 나중에 다시 분파해 인천교와 백백교로 나뉘었는데 1923년 차병간이 경기도 가평( 더 자세히는 숲이 좋고 공기가 맑아 옛날에 새 한 마리가 춤을 추다가 떨어졌다고 해서 붙여진 조무락골 혹은 조무동이라 불리던 곳)에 퇴폐한 민심을 교화해 광명세계를 실현 한다며 포교를 시작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확실한 교리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깊은 철학이나 사상적 근거가 없어 타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차병간에 이어 전해룡(全海龍)이 교주가 되면서 백백교는 하나의 범죄단체로 변질 됐는데 전해룡은 스스로 ‘대원님’을 자칭하면서 우매한 민중을 꾀어 재물을 뻬앗고 여신도를 속여 간음을 일삼았다. 심지어 많은 여신도 들이 보는 앞에서 간음하는 변태적 행동과 가학을 일삼았다. 그는 이같은 간음 행위를 신의 행사로 정당화 했다. 이같은 범죄행위가 세상에 알려질 것을 두려워 한 전해룡는 비밀을 누설할 염려가 있는 신도들을 깊은 산속으로 유인해 가차없이 죽였으며 죽이는 일을 담당한 자를 벽력사(霹靂使)라고 불렀다.
하지만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어 백백교의 행태가 경찰에 의해 세상에 드러났다. 조사결과 전해룡은 신도의 딸까지도 간음했으며 살해된 사람만도 314명에 달했다. 그러나 실종된 사람이 많아 실제로 살해된 숫자는 이보다 훨씬 더 많았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전해룡은 첩의 오빠인 유곤료의 고발로 경찰이 포위망을 좁히자 양평 도일봉에서 자살했다. 그의 시체는 일본 경찰에 의해 표본돼 현재 국립과학연구소에 범죄형 두개골의 전형으로 유리병 속에 담겨있다. 이경득·문봉조 등 교 간부들은 사형선고를 받았다. 백백교를 장황하게 설명한 것은 ‘백보환은 백백교’라는 유행어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전면광고 놀라워


이 말에는 전해룡의 정력에 버금가는 것이 백보환이라는 의미가 내포된 것이다. 아마 이런 소문도 평화당에서 퍼트린 것은 아닌가 하는 짐작을 해 볼 수는 있지만 정확한 근거는 없다. 김해진의 신기신성당의 광고도 기발했다. 경성일보의 광고부원이었던 김해진은 대담한 광고전술을 전개 했는데 당시에는 상상하기 힘들었던 전면광고를 실시했다. 지금은 전면광고가 일반화 돼 있지만 당시에는 획기적인 것이었는데 매일신보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에 전면광고를 계속해서 실었다. 예를 들어 임질약에 대한 전면 광고는 일반인은 물론 신문사 관계자들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을 정도였다. 또 한자위주 시대에 순 한글만으로 광고를 하는 파격을 선보이기도 했다.
김근배의 동일약업사는 사향배치환으로 인기를 모았는데 그는 각 동네의 이장을 통해 약을 팔고 대금은 추수때 곡식으로 받는 독특한 방식을 취했다. 이것을 ‘배치약’이라고 했다. 동일약업사는 이런 판매방식으로 개성 일대는 물론 경기지역 까지 그 판로를 넓혀 나갔다. 또 도거창남(都居昌南)의 도약방은 임질 매독약으로 매약업계에 선풍을 일으켰다. 이들 약방들은 매약업으로 큰 돈을 벌었으나 통제경제시대로 접어 들면서 하나 둘씩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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