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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유일한선생 유한양행 창립

  • 고유번호 : 863
  • 작성자 : 이병구 기자
  • 작성일 : 2007-02-12 08:22:41

매약중심 약시장에  치료제 본격도입


1926년 국내 약업사에 중요한 획을 긋는 유한양행이 창립 됐다. 유한의 창립은 그동안 과대 광고로 인한 매약 중심의 약업 시장에 본격적인 치료제가 도입됐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설립자 유일한 박사는 1895년 평양에서 유기연과 김기복의 9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유기연은 경북 예천이 고향이나 고향에 정착한 것이 아니라 전국을 떠돌면서 상업활동을 해온 상인 이었다. 그러다 평양에서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평양에 정착한 그는 점포를 얻어 농산물, 건어물상을 시작했으며 나중에 서구에서 들여온 수입품을 모아 잡화상으로 크게 성장했다. 한때는 ‘싱거 미싱’ 등 고급양품의 도매상을 겸하기도 했는데 인천에 자주 드나 들었던 것은 이들 양품의 수입을 위해서였다. 이때 그는 기독교 세례를 받고 교인이 됐다.
개화기에 평양은 기독교가 크게 번성했고 따라서 서양 선교사들의 주 활동무대 였다. 민족 지도자들도 서양의 신문화를 선전하면서 나라잃은 설움에 차 있던 열혈 청년들을 지도했다. 안창호 조만식은 물론 이승만 장승만 박용만 등 ‘3만’으로 불리던 지식인들도 한양에서 많은 계몽 강연을 했다. 평양이 구한말에 일찍 개화되고 기독교 도시로 이름을 날릴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의 역할이 컸다. 
한편 유기연이 당시 일형으로 불리던 맏아들을 미국으로 보내기로 결심한 것은 일본의 조선 강점이 극에 달하던 때였다. 공공연히 내정간섭을 일삼았으며 영토합병의 야욕이 현실로 나타나는 시점이었다. 유기연은 다음 세대인 자식들에게는 강대한 조국을 물려 줘야 한다며 그러기 위해서는 선진문물을 익혀야 한다고 결심했다. 유기연의 이같은 결심으로 유일한은 1904년 9살때 선교사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는 부친의 기골장대와 강인한 정신을  물려 받아 이역만리의 외로움을 극복해 냈다. 운동 특히 미식축구에 관심이 많았으며 고등학교 때는 선수로 까지 활동했다.
16세로 고등학생이 된 유일한은 이때부터 부모의 도움없이 스스로 자립하기로 작정, 당시 많은 고학생들이 그랬던 것처럼 구두닦이 식당보이 신문판매 등으로 학비를 벌었다. 특히 신문판매는 달리기를 좋아했던 그의 성격에도 맞았고 수입도 좋아 선호했다.


서재필이 버들표 ‘정표’ 줘


일형이 일한으로 바뀐 것은 그즈음 이었다. 신문보급소에서 일형을 일한으로 잘못 발음해 그렇게 됐다는 일화도 있지만 그보다는 일한(一韓)이 한국인 이라는 말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 스스로 일한으로 정했다고 한다. 어쨋든 일한으로 이름을 바꾸자 부친은 그의 나머지 형제들의 돌림자도 형(馨)자에서 한(韓)자로 모두 변경했다.
1916년 21살 때 그는 네브라스카주립대학에 입학했다. 그러나 미시간대학으로 옮겨 졸업했다. 원래 20살때 대학에 입학했어야 했지만 북간도에 있던 부친의 사업이 실패해 우선 돈을 버는 것이 급하다고 생각했다. 미시간대학에서 그는 평생의 반려자 였던 부인 호(胡)를 만난다. 중국계 호미리는 의학을 전공하고 있었는데 둘은 우연히 만나 교제를 하다 결혼을 약속했다. 유일한이 미시간대로 학교를 정한 것은 공업지대로 유명했던 디트로이트시가 인근에 있어 아르바이트 자리를 쉽게 얻을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남의 회사에 취직하는 대신 그가 직접 회사를 차렸는데 중국에서 수입한 비단 손수건 카페트 등 동양 특산물을 판매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것으로 짭짤한 재미를 볼 수 있었다. 사업중에도 틈틈히 학문을 익혀 스텐포드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기도 했다. 대학 4학년 때인 1919년  3.1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한인자유대회(韓人自由大會)에 적극 가담,조국의 독립을 앞당기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특히 결의문 작성에 가담한 것은 물론 결의문 선포하는 일까지 맡았다. 학업과 생계 걱정으로 한국인 친구를 많이 사귀지 못했던 그는 필라델피아 대회를 계기로 많은 한국인들과 친교를 맺을 수 있었다. 서재필 박사를 만난것도 이 대회를 통해서 였다. 그 뒤 유일한이 24살 되던해 류한주식회사(Newil Han & Company)를 설립 했을 때 서재필을 사장으로 모시기도 했다. 30년의 연령 차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두 사람의 사상적 교감도 한몫 했던 것으로 보인다. 1926년 고국으로 영구 귀국하기로 결정하자 서재필은 딸에게 특별히 부탁해 ‘버들표’ 목각품을 정표로 선물했다.
지금 유한의 상징이 버들표인 것은 이같은 역사적 이유 때문이다. 졸업 후에는 제너널일렉트릭 사에서 잠시 근무하기도 했으나 1922년 자립해 숙주나물을 취급하는 라초이 식품을 설립, 상인의 자질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대학까지 졸업한 그가 당시에는 하찮은 숙주나물 사업에 뛰어든 것은 이윤 우선주의로 사업의 귀천을 따지지 않는 그의 건전한 정신 때문이었다. 예상대로 숙주나물사업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당시 미국에는 많은 중국음식점 들이 있었고 그곳에서 중국만두를 팔았는데 이 만두에는 반드시 숙주나물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이때 유일한의 나이는 27살이었다.
라초이 사는 날로 번창해 디트로이트는 물론 시카고 펜실베니아 뉴욕에 까지 알려져 주문이 끊이지 않을 정도였다. 소년기와 청년기를 미국에서 보낸 그는 미국식의 철저한 자본주의를 배우고 1925년 31세때 귀국했다. 유일한은 귀국후 부족한 것이 많은 조국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로 크게 고민했다. 연희전문에서 후학들을 가르칠 것인가 아니면 사업을 할 것인가로 노심초사 했던 그는 산업을 일으켜 경제적인 도움을 주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하고 약업계에 뛰어들기로 결심했다. 귀국당시에 일인이 점령한 국내 약업시장은 치료약이 많이 부족했다. 그는 치소포디움 오일캅셀,크레오소드,구아야콜, 캄파윤드,멘소레담을 다량으로 가져왔다. 또 구충제 헤노톨 결핵약 네오톤토닉 피부병 연고제 안도린을 들여왔다. 당시에는 약품영업취체령에 의해 의약품 반입이 엄격하게 통제되고 있어 도매상으로 유한양행을 설립했던 것이다.
유한은 설립직후부터 장안의 화제를 모으면서 매출이 급속히 늘어났다. 세브란스병원 등 친분이 있는 기독교 계통 의료기관에 납품 하는 한편 미국의 유수 제약사로부터 의약품은 물론 위생재료를 수입 판매해 사세를 키웠다.


미국식 자본주의 국내도입


애보트사에서 606호 주사약 네오아스페나민, 고단위 비타민제 하리바유,수면제 냄브탈, 살균소독 및 장티푸스 치료제 메타펜,백일해 백신 후핑코푸왁친,진해거담제 코푸에디신을, 스퀴브사에서는 당뇨병치료제 징크푸로타민과 인슐린 등 각종 혈청 백신을 수입했고 파크데이비스사에서는 성홍열 주사약과 혈청 백신을, 제미슨에서는 네오톤 원료를, 시므레스러버에서는 위생재료를, 존슨앤드 존슨 에서는 화장품과 위생재료를 가져왔다. 유한은 미국의 회사와는 대리점을 계약을 하고 애보트와는 아시아 전역의 대리점 계약을 따내는 저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유한은 사세가 급속히 커지자 종로 2가에서 YMCA로 옮겼고 얼마후 신문로에 사옥을 신축했다. 이처럼 유한이 승승장구 할 수 있었던 것은 기독교 계통 병원과 외국인이 경영하는 병원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이런 병원들이 전국에 40여개에 달했으며 유한의 사원들은 병원을 제집 드나들 듯 할만큼 인기를 얻었다. 당시 시장을 장악하고 있었던 일본인 약방들도 유한의 기세에 밀려 이렇다할 대응을 하지 못할 정도였다. 외국산 의약품이 일본제보다 비쌌지만 대금결제 기일에 여유가 있어 큰 문제는 없었다. 제반여건에서 우세했던 일본인들도 유일한의 영업수완을 따라 갈 수 없어 유한의 독무대는 계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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