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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대 양약확산 도매상 기반구축 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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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 이병구 기자
  • 작성일 : 2007-02-12 08:24:05

日,남한유통 장악 국내도매 북쪽서 활약
삼성제약소, 진통제 생산 만주까지 수출


1930년대 들어 국내 약업 시장은 매약시장에서 새로운 판도변화가 일어났다. 그동안 제생당 화평당 천일약방 조선매약이 주름 잡던 시장은 평화당 신기신성당 도약방 등이 가세해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여기에 양약방과 약종상이 늘어나 양약보급도 급속히 확산됐다. 특히 신약도 선보였으며 주사제 등 치료약 들이 매약시장을 빠른 속도로 파고 들었다. 하지만 30년대는 여전히 매약의 전성시대 였다. 일본인 들은  국내 시장에서 여전히 독점적 지위를 누렸다.
일인들은  본국에서 약을 들여와 판매에 열을 올렸다. 그러다 만주사변(1931년 9월18일 류타오거우사건으로 비롯된 일본군의 만주 침략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우에무라제약소가 생기면서 상황은 돌변했다. 우에무라는 지금의 신당동에 거대한 공장을 짓고 각종 주사약을 생산했다.


치료약 본격도입


주사약은 약효가 빠르고 효과가 좋아 큰 인기를 끌었다. 우에무라는 여기서 생산된 치료약을 국내는 물론 만주 중국까지 팔아 막대한 매출이익을 올렸다. 이후 신사와제약소, 부산의 유기위생연구소, 도쿄다나베 등이 잇따라 국내 시장에 합세했다. 이들의 활약은 매약위주에서 치료약 위주로 약업시장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일본인의 매약제조로 잘 알려진 것은 낙천당제약의 가제피린 아까다마 고잠환 등이었으며 낙천당은 이들 제품으로 한국에서 큰 돈을 벌었다.
한편 의약품 유통은 일본인들이 도매상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인들의 활동은 미미했다. 한국인들은 일본 도매상의 물건을 파는 소규모 도도매 형태가 고작 이었다. 이들은 한국매약에 치중하거나 이라이 기무라 야마기시 등을 통해 일본인 들이 들여온 것을 구입해 약간의 마진을 보고 파는 것에 그쳤다. 일본인들이 영업하기에는 불편한 오지나 산간벽지 아니면 영세소매상을 위주로한 영업형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오지나 산간벽지서 활동


특히 남쪽의 경우는 일본인들이 완전 장악했으므로 발을 붙이기 어려웠다. 반면 북한쪽은 일본 매약을 선호하지 않는 풍토 때문에 한국인 도매상들은 주로 북쪽에서 활동기반을 넓혔다. 하지만 도매상 숫자만 많았지 거래량이 적어 매출량은 극히 미미한 수준에 머물렀다. 반면 일본인들은 숫자는 적었지만 매출량은 컸다. 질적인 면에서 일본인들의 영업을 따라 갈 수 없었던 것이다. 신용면에서도 일본인들은 정확하게 납품기일을 지켰으나 한국인들은 주문날짜를 제대로 지키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해 한국인 도매상들이 부도를 내거나 대금결제를 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판매가격은 품목별로 소매 도매 생산자가격 등으로 구분해 엄격하게 지켰다. 당시 판매는 지금 처럼 10개를 주문하면 15개나 20개를 주는 등의 할증은 없었다. 반면 특매 제도가 대단히 성행했고 도매상들은 이 특매를 적절히 활용해 매출을 극대화 했다.
특매를 한다고 해서 이미 서 있는 가격이 내려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특매로 인한 이득은 고스란히 판매업자의 이득으로 돌아갔다.
특매는 판매가격과 연동(連動)되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당시 도매상들은 특매제도를 선호했다. 당시 마진은 도매가 평균 10% 선, 소매가 30~40% 정도 였는데 이 가격은 큰 변동이 없었다. 가격이 선 것은 의약품 유통이 메이커에서 도매상이나 특약점 혹은 대리점을 통해 소매로 공급되는 루트를 잘 지켰기 때문이다. 한국인 도매상들은 이런 과정을 거쳐 서서히 일본인 도매상 들과 경쟁할 수 있는 힘을 길렀다.
일본인 도매상 아라이 약방이 1903년 인천에 들어온지 6년만에 1909년 서울로 활동무대를 넓혔고 야마기시가 1906년 충무로 1가에 개업해 기반을 닦은지 20여년 만의 일이었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도매상이 서울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20여년의 격차는 당시 아라이나 야마기시 등 일본인 도매상이 약 유통을 완전히 석권했으므로 한국인들이 발 붙이기 어려웠기 때문 이었다. 또 제약사들이 생산해 내는 약이 대량생산 체제를 갖추지 못해 그 양이 적었고 양약과 한약이 교차하는 시기 였다는 점도 한국인 도매상들의 출발이 늦은 요인으로 작용했다.


일인보다 20년 늦어


그러다 30년대 들어 유한양행, 금강제약 등이 약 생산을 본격적으로 하면서 도매상 들도 크게 늘어났다. 매약의 종류도 1,500가지나 됐다. 이 시기에 가장 매출을 많이 올린 곳은 천일약방과 조선매약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제약 소사 17,01년 8,6일자 참조) 이후 유한양행 금강제약을 선두로 자선당제약 삼성제약 경성신약 신흥제약 등이 앞다투어 시장에 파고들었다. 유한양행은 항생제 설파제를 도입했고 금강제약은 살바르산 머큐로크롬 설파마이 등 합성 제품을 선보이면서 일본 약업자 들은 추격했다.
그런데 당시에도 현재와 마찬가지로 유사품 경쟁이 치열했다. 어느 한 품목이 히트를 치면 그와 이름과 효능이 비슷하다고 선전하는 제품들이 잇따라 생겨났다.
천일약방의 조고약을 모방한 공애당약방의 청고약, 양약 감기약으로 유명했던 낙천당의 가제피린을 모방한 천일약방의 가제산, 제생당대약방의 영아보병산을 모방해 윤용구( 전 일동제약 회장, 건재약상인 건선상회 담당약사)는 영신환 영화환 보명단 등을 만들었다. 전국의 도매상으로 이름을 날렸던 곳은 천일약방 양약부, 세브란스 병원 의료품부, 강중희의 궁부약방 등이었다. 지방의 경우 평양의 일신당 영평당 동화약방 함흥의 함남약업 성진의 수영당 나남의 영춘당 마산의 오행당 군산의 옥산당과 심약방 등이 있었다.


김종건 약업사 업적 커


한편 1929년에는 김일영이 자선당제약을 세운 이듬해 김종건은 삼성제약을 창립했다. 김종건은 1926년 조선약학교를 졸업하고 종로에 삼성당약국을 개설했다. 이 약국은 당시 이덕휘의 박애당약국과 함께 한국인 약사가 운영하는 대표적인 것이었다. 김종건은 당시 금강제약의 네오페지날이 선풍적인 매출을 보이자 뒤따라 삼성제약소를 설립해 진통제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 진통제는 너무나 유명해 국내는 물론 만주까지 수출하는 성과를 올렸다. 만주와 봉천 천진 등에는 지점이 설치되기도 했다. 김종건은 처음에는 진통제 한가지 만을 생산하다 나중에는 일반 주사제도 만들기 시작해 영역을 넓혔다. 그후 파리약(에프킬라를 생산하는 원동력이 됐다)을 생산하고 강장제인 토닉도 선보였다. 사세가 커짐에 따라 공장도 마포에서 답십리로 이전 확장했다. 김종건은 53년부터 이듬해까지 제약협회 제 5대 회장으로 활약하는 등 국내 약업발전을 위해 큰 공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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