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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전쟁확대로 국내 약시장 완전통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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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 이병구 기자
  • 작성일 : 2007-02-12 08:24:52

조선의약품회사 만들어 생산.공급 간섭
원료 구득난.완제약 없어 시장 붕괴위기


1937년에는 주세환이 경성신약사를, 39년에는 차상철이 신흥제약을 설립했다. 주세환은 포도당, 쌀루로 주사약 등 수십종의  주사약을 생산해 이름을 날렸다. 그는 영업 수완이 좋아 도매상을 통해 주사약 시장에서 성공했다.
2년 후 생긴 신흥제약과 함께 주사약 시장을 양분했다. 신흥의 차상철은 포도당 크로칼 사루부로주 식염수로 주사약 전문 메이커로 명성이 자자 했다. 경성신약 보다 후발 주자 였지만 주사약 시장 비중은 더 컸다.
경성약전 출신의 차상철은 일본인의 우에무라제약에서 근무한 경험을 활용했다.(우에무라제약소는 후에 일양약품 정일형 회장이 38년 입사하기도 하는 등 국내 약업인들이 많이 거쳐 갔다) 우에무라제약소는 광희심상소학교 근처 대로변에 자리잡고 있었고 주변에 큰 건물들이 없어 한눈에 띌 정도였다. 500평 규모로 2층 콘크리트 건물이었다. 건물안에는 사무실, 공장 그리고 부대시설이 자리 잡았다.


경성.신흥 주사제 양분


그는 우에무라에서 생산·판매 했던 포도당, 크로칼, 사루부, 증류수 주사약 등을 생산했다. 주사제 외에도 설파민제 삿라림, 강장제 상화민, 지사세 황백엑기스 등이 소비자의 호응을 얻었다. 차상철은 특히 운동을 좋아해 재학시절 테니스 선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신흥제약에 농구팀을 두고 대부분 국가대표 였던 연희전문 출신들을 영업사원으로 고용해 지방 출장 등에 동행 시키는 색다른 마케팅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농구팀 덕분에 신흥제약의 지명도도 높아지고 매출도 늘어나는 계기가 됐다. 
일제의 억압 정치 속에서도 제약사들은 그런 대로 영업이익을 내고 있었다. 신흥뿐만 아니라  신흥이 활동할 당시 자본금 10만원 이상의 한국인이 경영하는 제약업소만 해도 20여개에 달했다.
유일한의 유한양행,전용순의 금강제약,전환섭의 전신양행 황호연의 국제신연, 김종건의 삼성제약, 조인섭의 천일약방 ,이덕휘의 동양제약 , 함승영의 청산제약 ,차상철의 신흥제약,박용균의 후생약품,이동선의 조선매약,이창식의 동화약방 ,김일영의 자선당 ,신호균의 중앙약품 ,강중희의 동아제약,최영함의 일화제약 ,주세환의 경성신약, 윤용구의 삼양공사 ,이경붕의 제생당 등이 약업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이들 제약사들은 일본인 제약사들보다는 못했지만 나름대로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그리고 성장했다. 약의 생산원가에 비해 마진이 좋았고 국민들이 약 소비가 많았던 것도 제약사들이 많이 생길 수 있는 요인이었다.
그러나 일본이 만주사변 등 전쟁을 계속 확대 하면서 물자가 부족해 지자 위축되기 시작했다. 일제는 38년 중일전쟁( 일본의 침략으로 중국 전 국토에 걸쳐 이루어진 전쟁. 일본은 베이징 상하이 난징을 점령한 후 시민 수 십만명을 도륙했다.)으로 물자가 부족해지자 의약품의 생산 공급 가격 통제는 물론 배급제 까지 실시했다.
이때 제약사를 통제하기 위해 일본은 조선의약품주식회사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산하에 있는 28개 통제회사에서 모든 의약품의 수급계획과 배급을 담당해 국내 의약품 시장을 완전히 통제 했다.


자본금 10만원 20개소 활약


1941년 태평양전쟁(중일전쟁으로 일본은 기선을 제압했으나 중국군의 거센 저항으로 전쟁이 장기화 되자 국면 타개를 위해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41년 12월 8일부터 45년 8월 15일까지 일본과 연합국간의 전쟁으로 일본은 대동아전쟁이라고 부른다.
독일 이탈리아와 함께 3국 동맹을 맺은 일본은 소련과 중립조약을 맺고 남진 정책을 실시하면서 41년 화와이 진주만을 기습하면서 전쟁이 발발했다.
전쟁초기 일본군은 우세했으나 이후 미국의 적극적인 공세로 45년 4월 오카니와에 미군이 상륙하고 8월에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돼 일본은 잿더미가 됐다.
8월 15일 한국은 해방됐고 타이완은 중국으로, 사할린 남부와 쿠릴열도는 소련으로 환원됐다)이후에는 제약회사간 강제 통합 또는 폐업 조치도 성행했으며 원료의약품을 구할 수 없었던 제약사들은 거의 개점 휴업 상태에 빠져 들었다. 원료 구득난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힘에 겨웠다. 당연히 완제약을 구경하는 것도 쉬운일이 아니었다.


일본인 경영 30개사 넘어


일제는 한국제약을 병참기지화 하고 모든 경제를 군수산업으로 변모시켰다. 기업정비령을 내려 기존의 제약사를 정리하면서 일본 약업자를 대거 투입하기도 했다. 한국인의 제약업은 겨우 명맥만 유지할 정도로 쇠약 해졌다. 순조로운 성장을 거듭했던 제약시장은 전쟁으로 붕괴위기 직전에 몰리게 된 것이다.
한편 해방전 까지 한국에서 활동한 자본금 10만원 이상의 일본인 제약사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23년 설립된 목촌제약유한회사,26년 유기위생화학시험소,27년 보국제약주식회사,28년 백수제약연구소, 30년 조선삼공회사( 충남 금산에 있는 삼남제약 김순기 회장이 조선삼공회사 출신으로 그는 51년 삼남제약을 설립했다.
조선삼공회사에서 익힌 기술을 바탕으로 복지부로부터 위장병 치료제인 건조수산화알루미늄 겔 수산화 마그네슘을 개발해 원료의약품허가 1호를 기록했다.),33년 광양당제약,35년 신정약품공업,36년 조선무전약품공업,37년 판본약품부 일본 옥도 38년 등야위생공업 40년 식촌제약 41년 동방제약 동아유지 조선소림약학실험소 조선위생재료 42년 하합제약소 43년 조선와까모도제약 조선삼천당( 현재의 삼천당제약은 조선삼천당 제약에서 70년 9월 24일 삼천당제약으로 상호변경 했다.) 조선위생실험소 조선장기제약 조선장품제약 북도화성 조선고제제약 44년 조선등택약품 중외제약경성지점 만유제약경성지점 경영제약 등 30여사가 넘었다.
이들 일본인 제약사들은 철저한 일본인 우선정책에 따라 한국에서 제약 도매 소매 부분에 있어 독점적 지위를 완벽하게 누렸다. 일본인 제약사들은 처음에는 주로 일본약국방 제제들을 국내에 완제 공급해 왔으나 만주사변이 일어난 31년을 전후해 국내 생산을 시작했다.


만주 사변후 국내 생산


중일전쟁의 확대 후에는 국내에 대규모 제약공장을 건설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등택약품인천공장, 중외제약 서울공장, 전변제약부산공장 등이었다. 태평양전쟁 기간중 도매상은 전국에 60여곳이 넘었다.
대표적인 곳으로 서울의 세브란스병원 의료품부 궁부약방 천일약방양약품부 인천 영생약방, 수원 동아약방, 부산 광제호약방 박애당 약국 활명당약국, 마산 오행당약국, 대구 구세당약방, 군산 심약방옥산당약방, 개성 고려약방 순안당약방 활명당약국, 평양 일신당약방 영평당약방 동화약방 삼정약방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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