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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약방,윤창식사장 부임 제2창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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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 이병구 기자
  • 작성일 : 2007-02-12 08:25:39

“생명 살리는 좋은약 만들자” 전직원 화합
해열진통.설파제 등 치료약 과감히 도입


해방 전후의 약업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윤창식이다. 동화약방 제5대 사장인 보당 윤창식( 保堂 尹昶植)은 오늘의 동화약품을 있게한 주인공 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비중이 크다. 윤창식을 언급 하기전 동화약방의 역사를 간략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다. 1897년 민족기업으로 창립한 동화약방은 활명수로 큰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초대사장 민강이 비밀 결사조직인 대동단(大同團)사건(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서울에서 조직된 비밀 독립운동 단체. 군자금 모집, 선언문·진정서·포고문 등을 인쇄· 배포 하는 일을 했으며 11개 사회단체 대표자로 구성된 점조직 형태를 띄었다.
3대 강령은 일본제국의 통치에서 이탈하여 독립국을 형성할 것, 세계의 평화를 확보할 것, 사회주의를 철저히 실행할 것 등이다. 조선민족대동단으로 출발했고 줄여서 흔히 대동단이라 부른다)으로 옥고를 치르면서 사세는 급속히 약화됐다.


대동단사건으로 옥고


허가약품 수도 87종에서 24종으로 급감했다. 엎친데 겹친 겪으로 일본경찰은 약품위생위반이나 기준미달 등의 이유를 내세우거나 감시원이 필요한 양의 약품을 무상으로 가져올 수 있다고 한 약품취체령에 따라 약을 수시로 뻬앗아 갔다. 기울어진 사세는 더욱 힘들어 졌다. 이에 동화는 법인체로 발족하기 위해 1930년 8월 식산은행( 1926년 한국을 착취하기 위해 동양척식주식회사와 함께 설립됐다.)에서 자본금 10만원을 조달했다.
1931년 액면가 50원인 보통주 2,000주를 발행하고 경성지방법원에 주식회사 동화약방으로 등록했다. 대표취체역에는 1,000주를 소유한 민강, 취체역에는 민영덕·남기주, 감사역은 이사헌·오영환을 각각 선임했다. 주식회사로 출범한 동화약방은 사세 확장을 위해 진력했으나 민강이 그해 11월 옥사( 민강은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임시정부에 발송할 비밀 문서를 목판에 인쇄하다 일본경찰에 발각되자 중국으로 망명했다 후에 상하이에서 체포돼 조선으로 송환돼 감옥에서 병사했다.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하면서 어려움은 가중됐다.


갑작스런 죽음


민강의 갑작스런 죽음은 후계자가 없던 동화약품을 거친 풍랑의 세계로 내몰았다. 창업자 민병호는 74세 고령으로 오래전에 사업에서 손을 뗐고 장남인 민인복은 17세로 중앙고보 학생이었으므로 사업은 명목상 취체역이었던 재당숙 민영덕이 맡았다.
2대 사장에 취임한 민영덕은 그러나 회사경험이 없어 실질적인 경영은 민강의 미망인인 이효민이 담당했다. 33년에는 이효민이 3대 사장으로 회사를 살려 보려 했으나 역부족 이었고 35년 중앙고보를 졸업한 민인복이 4대 사장에 올랐다. 
이 기간 동안 동화는 매출을 확대하기 보다는 오히려 식산은행에서 8만원의 부채를 지는 등 경영은 급속히 악화됐다. 1936년 총판매액은 경우 4만 3,000원에 불과했고 잘 나가던 활명수는 30만병 판매에 그쳤다. 동화는 결단이 필요했다. 자칫 회사가 파산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보당 윤창식이 등장하게 된다. 보성고보와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한 윤창식은 민족기업인으로 한학에 조예가 깊고 1917년 민족기업 단체인 조선산직장려계를 조직해 주식제도를 도입하는 등 경제적 선구자였다.
또 최남선·김성수 등 민족운동가와 철종의 부마(왕의 사위) 였던 박영효(13때 철종의 딸 영혜옹주와 결혼해 금릉위에 올랐으며 유대치를 중심으로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 등 개화당 요인과 결속해 갑신정변을 일으킨 한말의 정치가)와 함께 보린회(保隣會)를 주도 하기도 했다. 이 정도의 사람이면 민족기업인 동화약품을 경영할 적임자로 손색이 없었다.
민인복은 윤창식을 추천하면서 “회사는 빚투성이로 종착지점에 이르러서야 이러한 회사를 맡아 달라는 것은 미안한 일이다. 문중 어른들과 아버님을 아끼는 인사들이 모두 보당 윤창식 선생이면 꼭 회사를 소생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들 장담했다.
당시 내가 바라는 소망도 오직 하나 민족기업인 동화약방의 소생이었다” 고 술회 할 만큼 윤창식에 대한 믿음은 절대적이었다.
윤창식은 최병하와 동업하기로 하고 37년 제5대 사장으로 취임했다. 동화는 이때를 제2창업 이라고 부르고 있다. 새로 주인을 맞은 동화는 심기일전 했다.


유일한 적임자


“오직 생명을 살리는 좋은 약을 만들자. 이 땅에서 핍박받는 동포들을 돕고 일제에 쫓겨나 해외에서 유랑하는 동포들에게도 동화의 양약이 전해지게 하자. 일제의 어떤 박해가 와도 오직 원리원칙에 입각한 정도경영으로 극복하자. 무엇보다도 동화식구들이 땀흘려 일하고 노후에 보람을 찾을 수 있는 회사를 만들자.” 직원들은 보당의 이런 결심에 한마음으로 화답했다.
정미업 사업, 제염업으로 경제적 감각이 있었던 보당은 제약업을 일으킬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특판사업의 지지부진, 믿었던 활명수마저 매출이 한계에 부딪치자 보당은 정면돌파를 택했다. 그는 대중약 보다는 치료약을 과감히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자해로, 인소환 등 한방 대중약에서 탈피해 해열진통제, 설파제 등을 선보였다.
한편으로는 정도와 원리원칙을 강조했다. 취임후 보당은 바로 자본과 경영을 철저히 분리해 지배인 중심의 경영방침을 택했다. 지배인은 사원의 신분 이었지만 회사의 모든 업무를 관장하고 경영에 책임을 지는 것으로 오늘날 전문 경영인과 비슷한 제도이다.
보당은 이에 그치지 않고 젊어서 정당하게 땀흘려 일하고 노후에 잘 살자는 구호를 내세웠다. 그는 이런 주장을 실천에 옮겼다. 사장용 차가 있었지만 공무이외에는 이용하는 적이 없었고 10리 길 정도는 걸어 다녔다. 정미소를 크게 했지만 쌀밥을 먹지않고 싸래기를 먹는 등 솔선수범했다.


근검절약실천


어느정도 틀이 잡히자 보당은 좀더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회사를 운영하기 위해 사규를 제정했다. 중역에는 사장 전무취체역 취체역 감사역을 두었다. 사원은 지배인 부장 공장장 사원 사원견습 직공 직공견습 급사로 세분화 했고 조직은 서무부 판매부 제약부 선전부로 나누었다. 제약부는 신약계와 매약계로 분류했다. 특히 신약계는 신약의 연구 제조를 담당하는 등 제약사의 완전한 틀을 갖추었다. 근무시간은 통상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30분 까지 였다.
사원들에게는 관용을 베푸는 덕치개혁을 단행했다. 비록 실수로 잘못했을 경우 이를 시인하면 용서해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는 등 사원을 내식구로 여겼다. 보당의 이런 정신은 후에 7대 사장인 윤광렬씨에 의해 동화정신으로 채택돼 오늘날 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솔선수범과 절약정신 그리고 나 자신보다는 국가와 사원을 먼저 생각하는 보당의 이런 정신이 동화를 기적적으로 회생시키는 원동력이 됐다.
주력품 활명수는 1일판매 1만병, 1년에 500 만병 판매라는 약업사에 실로 놀라운 기록을 달성하면서 승승장구의 기틀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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