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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제약 모체 ‘강중희 상점’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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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 이병구 기자
  • 작성일 : 2007-02-12 08:26:23

일제시대 불구 자신이름 상호로 걸어
자전거.손수레로 신속배달 매출급증


일제의 사슬에서 벗어나 해방이 된지도 어느덧 60년이 가까워 온다. 따라서 당시 약업계를 주름잡던 인물들은 대개 사망한 경우가 많다. 이들의 생생한 증언을 듣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 이런 가운데 충남 금산에서 삼남제약을 운영하는 김순기회장은 몇 안되는 생존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현재 그는 82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정정해 해방 전후의 상황을 어느 정도 기억해 내고 있었다. 그는 현재도 일본 내에서 선두 그룹에 속해 있는 조선산쿄(삼공) 출신이다. 비교적 넉넉했던 부친 덕분으로 일본으로 유학을 갔던 그는 1943년 동경약전(현재 동경약대)을 졸업하고  졸업과 동시에 조선에 진출해 있던 조선삼공에 입사했다.


증언자 거의없어


“조선삼공에 입사하자 민관식씨가 연구실험실 차장으로 근무하고 있었어요. 당시 민차장은 28살이었고 나는 그보다 세 살 아래인 23살 이었지요. 수원고농(현 서울대 농대)을 졸업한 민씨는 조선삼공에 농약부가 있어 거기 근무했던 것이지요. 민씨는 당시도 정치적 수완이 대단해 인기가 있었습니다.”  민관식 씨는 후에 서울대 강사를 거쳐 고려시보사장 대한테니스협회장 대한체육회장 문교부장관 국회의원 국회부의장 등 화려한 경력을 쌓고 현재 헌정회 고문으로 있다.
김씨는 조선삼공 본사가 있던 현 중대필동 부속병원 맞은편 극동빌딩 근처에서 근무하지 않고 영등포 양평의 공장으로 배속받았는데 여기는 오배자 원료로 만들어낸 ‘탄닌산’을 ‘농황산’으로 가수분해해 ‘몰식자산’을 만들고 다시 진공증류라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 ‘피로가롤’(Pyrogallol)을 제조하는 현장이었다. 다시말해 제약공장이 아니라 화학공장 이었던 셈이다.


다께다보다 우수


그는 낙담하지 않고 열심히 일해 데르마톨(차몰식자산비스마스)의 제조방법을 연구해 마침내 성공했다. 당시 삼공과 다께다는 일본에서 1,2위를 다투는 라이벌 관계에 있었는데 다께다 제품보다 김씨가 만들어낸 것이 색상이 선명하고 입도상태가 뛰어나 인정을 받았다. 그는 국내서 수산화알루미늄과 수산화마그네슘의 합성에 성공해 본격적으로 제약사업에 뛰어들어 오늘날 까지 제약업을 하고 있다.
김순기씨는 “당시 약사는 약을 파는 상인이라는 의식이 강해 의사에 비해 천대 받았다”고 말했다. 병원조수를 약제사라고 불렀을 당시였다.
한편 만주사변이 발발한 1931년 경 한국 경제는 일본과 만주의 교량 역할을 하면서 아연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한국인 약사들도 많이 배출됐고 일본 제약사들의 진출도 눈에 띄게 늘어났다. 이 시기에 우에무라제약소 아라사와제약소 유기위생연구소가 차례로 들어왔다. 조선산쿄는 가레누스 제제를 비롯해 유산니코틴을 제조해 판매했다.


영업사원으로 시작


도쿄 다나베는 용산에서 지미쯔신을 제조했으며 하야시는 간유를 만들었다. 시오노기제약은 일질(日本室素)과 제휴해 니찌쯔시오노기제약을 설립해 세푸톤액 및 비누를 만들었다. 32년에는 우리나라 제약사에 큰 획을 긋는 강중희 상점(현 동아제약의 모체)이 등장하게 된다. 그해 12월 1일(동아제약의 창립기념일) 당시 25세의 청년 강중희는 위행재료 도매업인 강중희 상점을 열었다. 종로구 중학동 16번지(현 한국일보 자리)에 자본금 500원으로 10평규모의 상점을 연것이다. 
이곳은 강중희가 일본인 동업자 미야베데이찌와 궁부약방(宮部藥房)을 운영했던 곳이다. 그러나 미야베가 전직하자 궁부약방은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이에 강중희는 단독으로 이를 인수해 강중희 상점을 개업했다.
당시는 일제의 막바지 침략이 기승을 부리던 시절이라 웬만한 거상이 아니면 자신의 이름을 상호로 내걸 수 없었다. 그런데 강중희는 비록 나라를 잃었지만 젊은이의 기개만은 지키고 싶다며 과감하게 자신의 이름을 상호로 정했다. 강중희는 처음에는 붕대 탈지면 거즈 등 간단한 위생재료를 취급했다. 취급품목을 늘릴 만한 자본도 없었으며 당시 도매상권을 일본인들이 완전 장악 했기 때문에 품목의 확대 등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라이 야마기시 모리가와 기무라 기다시마 등이 이름을 날리던 시기였다. 이 가운데 아라이와 야마기시는 매약과 양약으로  약업계에서 양웅으로 불릴 만큼 위세가 대단했다. 1935년 야마기시는 연간 매출액이 100만원이고 기무라의 종업원은 150명일 정도 였으니 일본인 도매상의 규모가 어느정도 인지 짐작하고도 남았다.


다시 궁부약방으로


한국인 도매상은 강중희 상점 이전에는 천광당약방(김영원)과 천조당약방(하준영) 등이 있었을 정도 였으니 일본인 도매상 들과 경쟁은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을 강중희는 이미 오래전에 간파하고 있었다. 궁부약방을 하기전에 일본인 동양제약에서 영업을 했던 강중희는 일본인들과 품목이 겹치지 않았던 위생재료를 먼저 선택했던 것이다. 
초기 강중희 상점은 가족형태로 운영돼 강중희는 판매를 전담했고 소분은 부인 김을순여사와 조카 강신오가 담당했다. 판매는 순조로웠으나 곧 일본인들의 저항을 받게 됐다. 상호도 조선인 이름이고 주인도 조선인이라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강중희는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옛이름인 궁부약방 상호를 다시 사용하게 된다. 강중희 상점이 불과 두 달만에 궁부약방이 된 것이다.
동호 강중희(東湖 姜重熙)는 1907년 경북 상주에서 강진성씨의 3남 5녀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8세에 동경으로 건너가 고학했으나 곧 귀향한 후 다시 서울로 상경, 일본인이 경영하던 동양제약에 입사했다. 그는 동양제약에서 주문과 배달 수금을 전담하는 영업사원을 했다. 이곳에서 동업자 미야베데이찌를 만났는데 둘의 나이차는 12살이나 됐으나 성격이 비슷해 무척 가깝게 지냈다. 이후 동양제약은 갑자기영업정지 처분을 받아 해산됐고 미야베와 강중희는 의약품 도매상을 차리게 됐다. 궁부약방은 승승장구 했다.


취급품목 넓혀


배달과 주문의 신속을 위해 자전거와 손수레를 구입했으며 판매도 강중희 혼자서 하던 일을 강신오와 둘이서 했다. 서울을 동서로 나눠 강중희는 동쪽을 강신오는 서쪽을 분담해 일정한 순회 코스에 따라 약방과 약국을 방문했다.
이때부터 취급품목도 붕대위주에서 점차 다양해 졌다. 약방들이 위생재료 주문시 약을 주문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인 도매상 들은 제약회사의 대리점이나 특약점 형태로 운영돼 유통을 장악했지만 궁부약방 처럼 자건거를 타고 다니며 매일 영업하는 기민성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궁부약방의 매출이 늘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는 평소 부지런하고 근검 절약하는 강중희의 생활습관도 큰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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