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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령시 탄생으로 약재매매 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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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 이병구 기자
  • 작성일 : 2007-02-12 08:11:00

현대의약태동기(6)..정약용,마진전문의약서 마과회통 저술


마과회통(馬科會通)은 다산 정약용이 정종 22년(1798)에 쓴 마진(痲疹,홍역)의 전문의약서로 마진학에 대한 당시의 중요한 업적으로 크게 평가 받고 있다. 특히 권말(卷末)에 부기한 종공기법(種公奇法)은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우공종법(牛公種法)으로 알려질 만큼 역사적인 가치가 크다.
어린생명 구해


필사본으로 6권 3책으로 구성돼 있으며 장서각에 소장돼 있다. 다산은 자서에서 “근세에 이몽수라는 사람이 있어 명예를 바라지 않고 뜻을 오직 활인에 두어 마진서를 취해 어린 생명을 건진 것이 만 여명에 이르렀고 나도 또한 이몽수에 의해 활의를 얻었다. 이에 그 덕에 보답하고자 이몽수의 마진기방을 비롯해 중국서 수십종을 얻어 그 조례를 소상히 밝힌다”고 기록하고 있다.
인용서에는 한국의 의서로서 이몽수의 마진방 외에도 임서봉의 임신방, 허준의 벽역신방, 조정준의 급유방, 이경화의 광제비급 등도 언급하고 있다. 총론에는 중국 마진서의 서와 제론 등을 발췌했고 제가의 인용서목을 예로 들었다. 원증편 17, 인증편 16, 합제편 20 등 7편이 수록돼 있으며 특히 아속편과 오견편에는 조선에서 유행한 마진의 증세를 관찰해 그 치료법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마진이라고도 불리는 홍역은 발열과 발진을 주 증세로 하며 오늘날과 같이 백신 등이 발달하지 않은 때는 유아 사망에 있어 높은 비율을 차지했다. 마과회통은 이런 딱한 실정을 보고 지은 책이다. 서문이나 발문이 따로 들어 있지 않아 책이 이루어진 정확한 경위를 알 길이 없어 안타까움을 전해주고 있다.
마과회통의 저자 다산 정약용은 다산이라는 호 외에도 사암(俟菴) 태수(苔수) 여유당 자하도인 탁옹 문암일인 철마산초 등 여럿이 있으며 세례명은 요한이다. 본관은 나주이며 조선시대의 대실학자로 유형원, 이익의 실학사상을 계승해 집대성 했으며 동부승지, 병조참의 등의 벼슬을 지내기도 했다.
실학사상 집대성


신유박해와 황사영(조카사위)의 백서사건에 연류돼 전라도 강진으로 귀양갔다 19년만에 유배에서 풀려났다. 이때 이곳에서 500여권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책을 지었는데 여유당전서라는 이름으로 후대에 전해지고 있다. 19년이라는 긴 유배 기간이 이런 명작을 탄생하게 한 배경이 됐다는 점에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참고로 신유박해는 신유사옥이라고도 한다. 당시 중국에서 들어온 천주교는 성리학적 지배원리의 한계성을 깨닫고 새로운 원리를 추구한 일부 진보적 사상가와 부패하고 무기력한 봉건 지배체제에 반발한 민중을 중심으로 퍼져나가 교세가 크게 확장됐다. 이에 불안을 느낀 순조가 1801년 천주교인 500여명을 처형한 사건이다.
기해 병오 병인 박해와 함께 천주교 4대 박해로 꼽히고 있으며 맨 처음 일어난 대규모 순교 사건이다.
1800년 정조가 죽고 순조가 11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정순황후 왕대비 김씨가 순조를 대신해 섭정을 하게 되는데 김대비는 친정 오빠인 벽파의 우두머리 김구조가 당파싸움으로 흑산도로 귀양간 것을 복수하고자 벽파(僻派,영조 때 사도세자를 폐위할 당시 세자를 무고하여 비방한 파로 주로 노론 계통의 인물들이었다. )와 손잡고 반대파인 시파(時派, 사도세자를 옹호하던 파로 주로 남인 계통으로 정조 때 득세했다.)를 몰아 내려고 했다.
천주교 박해


당시 천주교도의 대부분은 시파에 속했으므로 김대비는 이 점을 이용해 천주교인들에게 칼을 휘둘렀다. 이 박해로 초기 교회의 중추역할을 했던 이승훈(베드로) 정약종 최필공(토마스) 홍낙안 (사베리오) 등이 1801년 10월 8일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했다. 또 주문모 신부는 3월에 자수해 4월에 새남터에서 목이 잘린 후 군영의 문에 높이 매다는 군문효수를 당했다.
이로써 한국에서 어렵게 시작됐던 천주교는 지도급 인사들을 대량으로 잃고 남은 신도마저 산간벽지로 유배돼 어려운 시기를 맞게 된다.
다산의 대표작으로는 목민심서 마과회통 흠흠심서 경세유표 등이 있다. 다산이 활동했던 이 시기에는 또 납약(臘藥)이 유행했다.
매년 12월 내의원에서 그 다음해에 유행할 구급약인 상비약의 목록을 만들기도 했는데 여기에 우황청심원 가미청심원 등과 함께 납약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또 언제 간행했는지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납약의 복용방법, 효능, 금기에 대해 적고 이에 대해 언해한 언해납약증치방이 내의원에서 간행되기도 했다.
종두전문서 나와


서양의술의 하나인 우두종법은 1788년 (정조 12년) 영국의 의사 에드워드 제너에 의해 처음 발견됐다. 그후 1805년 중국 광동에 주재하던 영국의 외과의사 알렉산더 피어슨이 저술한 우두종법론을 토마스 스텐손이 한역해 종두기법으로 중국에 소개한 것이 첫번째였다. 그 이후 1817년 곽희가 인두법(引痘法)이라는 종두전문의서를 저술했는데 이것이 중국 최초의 종두서이다.
국내에 이 우두법이 언제 들어 왔는지 정확한 연도를 알 수는 없다. 다만 정다산이 저술한 마과회통의 말미에 종두기법이라는 표현이 있어 당시에 전해져 왔을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종두기법은 청나라의 초간본이 아니고 1828년 청나라 북경에서 중간한 신증종두기법에서 인용 소개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사용시기는 이규경의 오주행문장천산고 권 12의 종두변증설에 종두 방법의 실행순서가 정확한 것으로 미루어 현종 때 이미 일부 지방에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당약수입 재정부담


약령시도 비슷한 시기에 시작됐다. 약령시는 각종 약재를 매매 또는 교환하는 곳으로 줄여서 영시라고도 했다. 약령시가 약재를 매매하는 곳으로 이름이 전해진 것은 관의 명령에 따라 개시(開市) 했기 때문이라는 주장과 향약재를 채취하는 기준을 월령(月令)이라고 하는데 월령 즉, 계절에 따라 열리는 시장이기 때문이라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어쨌든 약령시의 탄생은 중국에서 당약을 많이 수입해와 재정적으로 많은 부담이 됐던 것을 줄여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정부에서 장려했다. 따라서 향약의 사용과 채취,재배가 각지에서 활발하게 전개됐다. 그러나 매매된 약재는 초기에는 그렇게 많지 않고 대부분 진상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민간에서의 향약 사용은 적을 수밖에 없었다.
또 약재의 진상에는 많은 부정이 저질러졌다. 공납하는 사람들은 권력자의 행패로 관리에게 시달림을 받았으며 약재의 부패 등도 문제가 됐다.
따라서 정부는 일반공납에 대한 폐단을 없애기 위해 대동법을 만드는 등 거래질서를 위해 약령시의 활성화를 강조했다. 대동법은 토산물로 바치던 공납을 농토의 면적에 따라 쌀이나 베 또는 돈으로 내게 하는 제도. 왜난 직후 이원익 등의 주장에 따라 경기도에 시험적으로 실시되다 18세기 초 평안도 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에서 실시됐다. 이를 위해 선혜청을 설치하기도 했다. 영의정 이원익은 광해군 즉위년에 각 고을의 진상과 공물이 각 관청의 방납인에게 막혀 한 물건의 값이 3~4배 또는 수십 수백배로 징수돼 그 폐해가 이미 고질화 됐는데 특히 경기도가 심하다고 상소하고 있다.
그러나 선혜청으로도 계속되는 공물의 현물 징수와 관리들의 부정을 막지 못해 얼마 지나지 않아 농민들의 부담은 이전과 별 차이가 없거나 오히려 악화되는 폐단을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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