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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약령시, 국제 한약물류 거점 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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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 이병구 기자
  • 작성일 : 2007-02-12 08:11:39

방약합편, 현재도 한의사 상비의서로 명성


본격적인 약령시(藥令市)는 효종 때 부터 시작됐다. 약령시는 한약재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장으로 여기에서 전국의 한약재가 매매, 교환 됐다. 일명 영시(令市)라고도 했다.
약령시는 약재의 중요한 산지였던 경상도 강원도 전라도를 중심으로 크게 발전했다. 경상도의 경우는 대구가 강원도는 원주, 전라도는 전주가 유명해 3대 약령시로 불렸다. 이밖에도 청주 대전 공주 충주 제천 개성 등에서 활발했으며 약재의 채취 및 출하기인 봄 가을에 두차례 씩 열렸다.
대구(효종 9년 1658년 개장)의 경우는 음력 2월과 10월에 열렸는데 이때는 전국에서 약초 재배자와 채취자,상인 및 약재 수요자가 구름처럼 몰려 들어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그후 수백년간 국내는 물론 일본과 중국 러시아  유럽에 까지 한약재를 공급해 명실공히 국제적인 한약 물류유통의 거점으로 이름을 날렸다.


지금도 약령시 축제 열려


약령시가 열렸던 대구 중구 남성로의 약전골목은 지금도 한약방과 한약상 한의원 인삼사 등 350 여개의 한방관련 업소가 밀집해 있어 그때의 명성을 오늘날 까지 이어오고 있다. 약령시 전시관은 물론 약재 도매상 까지 있다. 약령시 축제도 열린다. 이 축제는 1978년 시작됐는데 제례,경연,전시행사 등으로 이루어 진다.
대구 지역의 명소로 자리잡은 약전골목을 무대로 약령시의 맥을 잇고 약령시의 명성을 되살리기 위해 약령시 보존위원회 주최로 매년 10월 첫째주 금요일에 10일간 열린다.
이 기간동안 약령제는 물론 약령시개장 한약재 썰기 경연대회, 초등학교 농악 경연대회, 한의사 무료진료 및 투약,팔공산 한약초 사진전,우리약초 채취대회,야생초 전시회,한약재 상설 전시관운영,경상감사 도임순력 행차, 약차 무료시음회,한방 요리전시,한약술 판매 등 다양하게 꾸며지고 있다.


약상들, 약령장정 제정


한편 약령시는 약상들이 약재 거래에서 지켜야 하는 준수사항이 있었는데 이를 약령장정(藥令章程)이라 했다. 약령장정이 정해진 것은 약령시가 생긴 후 처음에는 잘 지켜 지던 약상들의 기강이 흐트러지고 약령시 개시 일 등이 제때 지켜지지 않아 이를 바로 잡기 위해서 였다.
갑오개혁이후에는 관의 관여도 사라 졌으므로 약상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규율을 만들었을 것으로 판단되고 있다.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도약장(都藥掌), 부도약장, 사무원의 이름,태의원(太醫院,한말 황실의 의무를 주관하던 관청으로 1902년 광무 6년 설치됐다. 관원으로 도제도 1명 경 1명 소결 1명 전의 4명 전의보 4명 주사 3명을 두었다)과 본부에 내는 상납금액, 대구 충주 전주의 개시일자, 도약장 부도약장 사무원의 유고시 대처방법,액상 끼리의 도매 및 시비금지, 약제의 진위를 신중히 구분해 구매할 것, 약상의 규모에 따른 납부금액,약속 불이행자의 벌금 및 벌금의 용도, 태의원에 상납기일을 어겼을 경우 가하는 벌칙규정,영수증의 도장,날인사항 등이다.
조선 후기로 접어 들면서 서양의술은 명나라 말기, 청나라 초기 중국을 왕래하던 사람들에 의해 한역교리서를 통해 본격적으로 전해졌다. 서양의학과 접촉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숙종 영조 때 유학의 거두 였던 이익의 성호사설에 보면 서국의(西國醫) 라는 제목으로 서양의학에 관한 내용이 실려있다.
서양의학의 생리설, 혈액, 호흡 및 뇌척수신경에 관한 이론이 소개되고 있는데 이 생리설은 그리스의학의 전통인 유럽 중세의 의학사상을 그대로 서술한 것이다.


성호사설에 ‘서국의’실려


이익(李翼)의 본관은 여주이고 자는 자신(子新)이다. 호는 성호 (星湖) 1705년 숙종31년 증광문과에 응시했으나 낙방했다. 이듬해 형 잠이 장희빈을 옹호하다 당쟁의 제물로 장살되자 벼슬할 뜻을 버리고 낙향해 학문에만 몰두 했다. 처음에는 성리학에만 신경 썼으나 나중에는 이이, 유형원의 학문세계에 심취하기도 했다.  
특히 유형원의 학풍을 계승해 천문 지리 율산 의학에 이르기 까지 능통했으며 서학에도 관심을 가졌다. 투철한 주제의식과 비판정신을 토대로 저술한 그의 대표작 성호사설은 당시의 사회제도를 실증적으로 분석, 비판해 정책적 대안을 제시 했다는 점에서 큰 업적으로 남고 있다.
1727년 영조 3년 학행으로 천거돼 선공감가감역에 임명됐으나 사퇴했고 1763년 83세의 고령에 이르자 정부에서는 우로예전(優老例典)에 따라 중추부첨지사로 승자(陞資)의 은전을 베풀기도 했으나 그 해에 사망했다. 사후 나라에서는 이조판서로 추증했다.


한역서양의학 소개


성호사설 이외에도 박지원의 열하일기 등에도 서양의학에 관한 내용들이 소개되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한역서양의학 소개가 당시의 국내 의약학에 얼마만큼의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정확한 평가를 내리기는 어렵다. 하지만 서학에 관심이 많은 실학파를 통해 일반인 들도 서양의학에 대한 관심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조선말기의 의약학은 서양의학이 본격적으로 들어온 시기로 볼 수 있다. 고종 원년 1864년 부터 한일 합방시 까지 (융희 4년,1910) 의 기간 즉, 조선말기에는 종래의 한의약을 그대로 이어온 측면이 강하다. 여기에 1876년 부터 일본은 물론 구미 각국과 수교를 맺으면서 서양의학이 직 간접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조말 초기에는 동의보감의 전통을 이어받은 황도연과 그의 아들 황필수의 업적이 뛰어나다. 황도연의 본관은 창원이며 철종 때 부터 서울 무교동에서 개업해 명의로 이름을 떨친 인물이다. 호는 혜암. 여러가지 의서를 저술해 의학의 대중화에 공을 세웠다. 저서로 본초부방편람,의종손익,의방활투, 방약합편 등이 있다.
부방편람(附方便覽)은 28권 14책으로 구성돼 있는데 의술에 종사한 경험을 살려 후세 의가들을 위해 치료방의 안내서 역할을 했다. 철종 6년(1855)에 동의보감을 보완해 편찬했다. 그는 자서에서 동의보감을 기본으로 해 각 병증에 따라 적절한 치료법을 수집하고 그 치료법에 필요한 본초에 대한 지식은 청나라 채견재의 본초침선에 의거해 편찬한 것이라고 적고 있다.
또 동의보감의 미비한 점을 보완했을 뿐만 아니라 실제 의사들로 하여금 치료방에 대한 약물학적 지식을 쉽게 이해 할 수 있게 한 점에서 의서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고 있다.


실용 적합한 의서로 평가


방약합편(方藥合編)은 의방활투와 의종손익을 합본, 새로운 체제로 엮은 것을 아들인 필수가 증보해 1884년 고종 21년에 편찬했다. 활자본 1권 1책으로 구성돼 있으며 의방활투, 의종손익 외에도 증맥요결, 용약강령, 석은보방, 곽란자신시이후집험방 등 10여 항을 더한 것이다. 종래에 처방돼 오던 것들을 상 중 하 3단으로 나누어 의방과 약물의 지식을 일목요연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 실용에 적합한 의서로 평가받고 있다.
1887년 책의 내용을 보충해 중정방약합편이 다시 출판됐으며 후세에 와서도 내용을 약간씩 달리 하면서 개정 및 증보판이 여러 차례 나왔다. 한의사들이 상비하는 의서 중의 하나로 오늘날 까지 명성을 이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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