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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석영, 마마퇴치 천연두 공포 벗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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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 이병구 기자
  • 작성일 : 2007-02-12 08:12:56

고종 13년 일본 종두법 처음으로 들여와


이제마의 동의수세보원에 앞서 이규준(李圭晙 1855-1923)은 ‘의감중마’(醫鑑重磨)를 내놓는다. 이규준의 호는 석곡(石谷)이며 자는 숙현(叔玄)으로 경북 영일에서 태어났다. 젊었을 적에는 유학자로 경사자집에 능해 육경주 26책을 간행하기도 했다.
그는 가사가 극빈해 노동으로 학습을 연마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으며 성장함에 따라 자립해 독학으로 성리학을 연구, 그 경지가 심오한 지경에 이르렀다. 경사로부터 제자백가까지 무불통달했고 주역과 의학을 연구해 근세에 보기 드문 대유로 자타가 공인해 그 문하생이 수천에 이르렀다.


양 돕는 온열재 애용


이러한 학문적 경험을 바탕으로 경수 전례 논어 효경 당송고시 등을 다듬고 정리했으며 구장요결 신교술세문 등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규준의 학문과 사상은 그의 비문 “나의 마음은 황제와 노자에 유(遊)하고 행(行)은 공자를 수(守)하고자 한다”에 나타나는 것처럼 공자로 돌아갈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의감중마는 그의 말년에 저술된 것으로 목판본 전 6권 3책으로 구성돼 있다. 금나라 유하간(劉河間), 원나라 의학자 주진형(朱辰亨)이 주장한 자음강화(滋陰降火)의 법을 배척하고 양(陽)을 도와야 한다는 부양론(扶陽論)을 제창해 양을 돕는 온열재에 속하는 인삼, 부자 등을 애용했다.
그는 이 책에서 부양론 뿐만 아니라 기혈론(氣血論)에 상통 하는 부분을 동의보감 중에서 발췌했다. 이는 자음강화의 법을 반대하기 위해 편집한 것이다. 부양론은 소문대요제지(素問大要題誌)에 “대저 황제의 서(書)는 본래 역(易)과 더불어 표리하다” 했고 소문대요부설 부양론에 “ 양(陽)은 생육(生育)을 주 하므로 춘(春)이며 서(書)이고, 음(陰)은 숙살(肅殺)을 주(主)하므로 추(秋)이며 야(夜)이다. 그러므로 천(天)의 운(運)은 일광(日光)을 당하게 밝다. 양이 승(勝)하면 열(熱)하고 음이 승하면 한(寒)하니 양이 태과(太過)하면 능히 병이 없지는 않지만 음이 태과하면 병이 이에 크게 돼 따뜻하게 해도 낫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잘 치(治)할 수 있는 경우는 맥에 있을 때 치하는 경우이고 그 다음은 육부(六府), 그 다음은 오장(五藏)을 치료하는 경우인데 오장을 치하는 경우 반은 죽이고 반은 살린다고 했다. 대저 황제 기백은 신성인으로 이치를 논할 때 반드시 양으로 주를 삼았다. 허실을 논함에 있어 사기가 성한 것을 실이라 하고 그 반대를 허라 한다. 사기는 한풍이고 정기는 양기이니 성인이 양을 도우고 음을 억누르는 뜻을 여기서 알 수 있다. 이를 보면 부양론은 음양을 전체로 파악해  어느 한 쪽에 치우칠 바가 아니나 동을 위주로 하는 양이 음에 행하면 살고 양이 음에 반하면 사하게 되는 관점에서 이를 부양이라 한 것이다.


제너 종두법 큰 관심


부양론의 대전제는 음평양비(陰平陽秘)로 육신이 상해도 병이요 생명기운이 약해져도 죽는 다는 것이다. 아울러 동지에 일양이 생하고 하지에 일음이 생하 듯이 열이 뜨면 아래가 차가와지고 아래가 차면 열이 뜨게 되는 것을 맥으로 확인해 상중하를 동시에 치료해야지 열 그 자체만 보고 양증이라 단정해 함부로 청숙(淸熟) 시키는 것은 생명활동력의 손실을 초래하므로 신중을 기하라고 했다. 다시 말해 열이란 생명력인 화(火)가 제 갈길로 가지 못해 애쓰는 모습이니 화의 소통이 우선돼야 하며 치료에 있어서는 언제나 청상(淸上) 통중(通中) 온하(溫下)의 원칙을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후 여러 의학서적들이 출간돼 현대의학이 본격적으로 태동할 수 있는 밑걸음이 됐다.
일본과의 병자수호조약 이후 현대식 병원인 제생의원, 일본관의원 등이 문을 잇따라  열었다. 이 당시 주목할 만한 것은 공포의 전염병으로 사망비율이 높았던 공창으로 불리던 천연두가 크게 유행한 것을 들 수 있다.
따라서 국내도 천연두의 예방법인 종두가 절실히 필요했고 이에 고종 13년(1876년) 일본에 사신으로 갔던 박영선(朴永善),수신사 김기수가 도쿄 쥰텐도 병원 의사 오다키 도미조에게 종두법을 배웠다.
이들이 우공종법(牛公種法)을 배우고 돌아와 종두전문서인 종공귀감(種公龜鑑)과 종두법을 지석영(池錫永 1855-1935)에게 전해 주면서 본격적인 종두가 실시됐다.
지석영의 호는 송촌. 서울 낙원동에서 의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일찍부터 서양의 학문을 동경해 20세 무렵 중국에서 번역된 서양의학책을 탐독 했으며 그중 영국인 제너가 쓴 종두법에 큰 관심을 가졌다.
소에서 뽑아낸 고름(면역물질)인 우두를 사람의 몸에 접종해 천연두를 미리 막을 수 있다는 내용에 큰 흥미를 느꼈다.
1880년에는 개화파인 김홍집을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위생국 우두종계소장 기구치에게 종두에 필요한 병원균을 만드는 법과 송아지에서 채취해 병원균을 보관하는 법 등 두묘 제조법을 배우고 귀국해 우두국을 설치, 종두를 실시하고 이를 전파했다. 일본으로 건너간 그해 1월 지석영은 가족에게 먼저 시술해 부작용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자신을 갖고 친척과 이웃을 설득해 40여명에게 종두를 실시했다.
제일 처음 접종한 사람은 충주에 있는 2살된 처남으로 알려지고 있다. 우두에 대한 지식이 없었던 장인은 어린 아이에게 우두를 한다고 하자 이를 극력 반대 했으나 결국 사위의 지극정성에 감복해 이를 허락했다.


소 고름에서 추출


훗날 지석영은 우두를 시술한 후 3일 동안 잠을 자지 못하고 노심초사 하다 우두가 나타나자 “ 내 평생을 통해 과거를 했을 때와 귀양살이에서 풀려났을 때가 크나큰 기쁨이었는데 이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고 할 만큼 당시의 충격은 컸다.
이를 계기로 종두가 급속히 퍼져나가 종두법이 국내에서 뿌리를 내릴 수 있었으며 사람들은 천연두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두창 마마 손님으로 불리며 얼굴을 곰보로 만드는 천연두에서 해방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지석영의 공이었다.
지금도 30대 이상의 사람에서 어깨 부분에 도톰하게 나온 우두자국을 볼 수 있을 만큼 천연두 예방접종은 근래까지 실시됐다.
참고로 제너가 우두법을 만들어 낸 과정을 살펴보면 흥미롭다.
1798년 의사 에드워드 제너는 소의 젖을 짜는 처녀들은 천연두에 잘 걸리지 않는다는 민간의 이야기를 듣고 고안해 냈다고 한다. 우두법 전에는 천연두의 발원지인 인도에서 중국을 거쳐 들어논 인두법이 있었다.


2살 처남 처음 접종


인두법은 천연두에 걸린 환자에서 채취한 고름으로 예방접종을 하는 것이었다. 원래는 고름을 짜내 솜에 적셔 콧구명에 넣는 장묘법, 고름이 생긴 아이의 속옷을 벗겨 건강한 아이에게 입히는 의묘법, 딱지 분말을 은관이나 거위 깃털로 만든 관에 채워 넣고 이것을 코로 들이 마시는 한묘법, 딱지 분말을 물에 녹인 다음 솜에 적셔 콧구멍에 넣은 방법인 수묘법 등 네가지 방법이 사용되기도 했다.
이 가운데 우리나라는 네 번째 방법인 수묘비강접종법이 행해졌다. 인두법은 1790년 박제가가 중국 연경을 다녀오면서 처음 소개 한 것으로 다산 정약용이 쓴 ‘여유당전집’에 자세히 나와 있다. 그러나 이 방법은 완전하지 않고 때로는 병독을 확산시킬 우려가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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