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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으로 서양의술 첫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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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 이병구 기자
  • 작성일 : 2007-02-12 07:59:37

현대의약 태동기(1)
노천 민병호 동화약방 설립 선두주자... 양·한방혼합 국내양약1호 활명수탄생


국내 제약시장은 현재 5조원 대에 육박하고 있다. 이는 세계 시장의 10분의 1 수준이다. 지
난 1897년 동화약방이 제약회사의 첫발을 내디딘 이래 꼭 104년 만의 일이다.
시장의 성장 뿐만 아니라 질적인 면에서도 국내 제약사들은 괄목할 만한 업적을 일궈냈다.
국내 첫 신약이 탄생했는가 하면 수많은 신약들이 임상을 거쳐 출시를 목전에 두고 있다.
하지만 약효와 자금력을 앞세운 다국적제약사들의 파상공세로 국내 제약업계는 100년 역사
이래 최대 위기를 맞고 휘청거리고 있다. 여기에 의약분업 등으로 약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
식에도 많은 변화가 예상되고 있다.
이에 본지에서는 국내 제약 100년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현재를 조망하는 기획시리즈
를 마련했다.
따라서 이 연재물은 국내 제약 100년을 경험 삼아 앞으로 넘어야 할 험난한 파고에 대한 지
침서 역할은 물론 대안제시에 초점이 맞춰질 것이다.
지난 100년과 현재를 조망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당시의 인물들이 세상을 떠났
거나 생존해 있어도 제대로 증언할 만한 증언 능력을 상실한 경우가 대부분이고 남아있는
자료들이 매우 빈약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생존 인물들을 만나 그들의 생생한 인터뷰
를 통해 영원히 잊혀질 역사에 대한 새로운 기록물을 발굴하는데 큰 의의를 두고자 한다.
<편집자 주>


제약계의 선두주자는 노천(老川) 민병호(閔竝浩) 였다. 민병호는 지금의 중구 순화동에서
1897년 동화약방을 창립해 국내제약업에 첫발을 내디뎠다. 민병호가 동화약방을 시작할 당
시는 우리나라에서 개화사상이 막 싹트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세계 열강의 각축이 치열했다.
이 와중에서 우리나라는 여전히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에 머물러 있어 제국의 총칼 앞에 무
력한 모습을 연출할 수 밖에 없었다. 참으로 생각하기 싫은 치욕의 역사였다.
동화약방이 창립된지 8년만에 우리나라는 일본에 나라를 뻬앗기는 국민적 수모를 당했다.
일제는 무력으로 우리나라를 병합하고 을사조약을 통해 외교권을 박탈해 식민지로 만들었
다. 지금 한창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 문제로 국내외로 시끄럽지만 일본의 침략은 한편으
로는 서양문물이 들어오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


한약이 지배하던 시절
실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동화는 이런 역사의 격변기 속에서 제약기업의 본연
의 임무인 약의 개발에 심혈을 기울였다. 당시는 모든 것이 한약이었다. 그러나 우연한 계기
를 통해 양약과 양의사에 대한 인식이 하루 아침에 반전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1884년(고종
21년)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개화파는 과거를 타파하고 새로운 문물 즉, 서양학을 받아 들
여야 한다며 정변을 일으키니 그것이 바로 갑신정변 이었다.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재필
등 급진개화파는 일본 세력을 이용해 당시 조선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청나라의 간섭을
뿌리치고 근대적인 혁신정부를 세우려고 했다.
이들은 청곀  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하자 일본과 모의해 고종을 궁으로 데려오고 내각을 조
직했다. 문벌타파, 사민평등, 재정일원화 지조법 등의 개정, 경찰제 실시, 행정기구 개편 등
14개의 개혁안을 선포했다. 그러나 개혁은 청나라의 간섭으로 3일 천하로 끝나고 정변의 주
역들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


민역익사건 양의학 전파계기
정변당시 개화당에서는 최초의 근대식 우편국인 우정국(정변 실패로 폐지됐다. 그후 1895년
우체사가 설립될 때까지 10년 동안은 다시 옛날 제도인 역참이 여러 항구를 오가던 서신과
국내의 우편 사무를 맡아보는 임무를 담당했다.)이 만들어지고 낙성식을 핑계로 우정국 총
판 홍영식은 각국의 공사나 고관을 초대해 잔치를 벌였다. 잔치중 화재가 발생하고 금위대
장 민영익은 화재진압을 위해 달려 나가던 중 괴한의 피습을 받고 깊은 상처를 입게 된다.
이때 국내에 들어와 있던 서양의사인 알렌의 치료 덕분에 3개월 만에 목숨을 건지게 된다.
국민들은 비로서 양의술의 신비함에 놀라게 되고 양의학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국내 최초의 양약인 활명수가 탄생하게 된다.
활명수(活命水)는 미국 선교사인 알렌이 경이적인 서양의학을 선보인지 10여년 후에 나왔다.
한약을 위주로 한 궁중의 전래비방과 양약의 장점을 취해 만든 우리나라의 약 1호였다. 활
명수를 만든 민병호는 선전관(宣傳官)으로 궁중에서 사용되던 여러 가지 비방을 익히 알고
있었으며 한약에 조예가 깊었다. 그는 이러한 궁중비방과 양약을 혼합처방 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활병수를 만든 민병호는 1858년(철종 9년)10월 충북 청주에서 부친 민영석과 한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20대 약관의 나이에 무과에 합격해 선전관이 됐으며 선전관은 근
시(近侍)의 직임으로 서반승지라고도 불렸다. 그는 무시로 대궐을 출입할 수 있었고 여러사
람과 관계를 돈독히 하면서 서양의학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특히 갑신정변으로 거의 죽음 직전에 갔던 금위대장 민영익이 알렌의 서양의술로 빠른 시간
내에 완치되는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이를 계기로 궁중 전의가 된 알렌의 서양의학을
어깨 너머로 배우는 기회를 잡게 됐다. 알렌은 서양의술 뿐만 아니라 국내의 전래 약전이나
치료법에 긍정적이고 호의적인 생각을 품었다. 그는 인삼에 대한 폭넓은 식견이 있었으며
민간요법으로 전해 내려오던 침이나 뜸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위장병 환자에 특효
노천이 기독교 신자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는 한국 최초의 장로교파 교회인 정
동교회를 다닐 만큼 일찍부터 선교에 눈을 떴다. 노천은 서양의학이 근대문명의 핵심이며
그 기본에 기독교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노천은 활명수를 교인 들에게 나누어 주어 복용케 했다. 이는 기독교의 정신인 이웃의 복리
증진을 실천한 결과였다. 활명수를 처음 만든 것도 한국인에게 가장 흔한 질환이 위장장애
를 동반한 소화불량을 고친다는 일념 때문이었다. 당시 한국에 와 있던 선교자 중 에비슨은
한국인은 많은 양의 식사를 매우 빨리 먹기 때문에 위장병이 흔하다고 판단했고 세계적 여
행가인 비숍여사는 한국인은 못먹는 것이 없을 정도로 잡식가라고 기록할 정도로 한국인 들
의 식습관은 이방인들에게 이상하게 보였다.
어쨌든 활명수는 위장장애에 시달리던 한국인 들에게 신속한 약효를 나타내는 명약으로 이
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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