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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다이꼬꾸 남해당 제약업 시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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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 이병구 기자
  • 작성일 : 2007-02-12 08:07:54

현대의약 태동기(2)
1885년 첫 서양식 의료기관 광혜원 탄생... 최초 병원 세브란스 한국의학 선구역할


갑신정변 이듬해인 1885년 우리나라 정부가 세운 최초의 서양식 의료기관인 광혜원이 탄생
했다. 정부는 광혜원을 세우면서 “사대문(四大門) 및 종각에 게시한다. 본 아문에서는 시의
원(施醫院) 1개소를 설치한다. 그 정확한 장소는 북부 제동의 아문 북쪽으로 제 두번째 집이
다. 미국의사 알렌을 초빙하고 학도와 의약기구도 갖추었다. 금일 현재부터 시작하는데 매일
미시(오후 1시)에서 신시(오후 5섯시)까지 시의원을 열고 약을 준다.
이 알렌이라는 의사는 학술이 정밀하고 우수한데 외과분야를 더 잘 본다고 한다. 한번 진찰
을 받으면 신통한 효과가 있다....(중략)”광혜원을 알리는 정부의 공문이다. 이 공문에서 등
장하는 흥미로운 점은 알렌이라는 인물에 대해 학술이 정밀하고 우수하다고 칭찬하는 대목
이다. 사실 알렌이 들어오기 전까지의 국내 의술은 전통적인 한방의 한약건재와 침 등 비술
에 의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외상 등 외과분야는 치료가 더디고 신통치 못한 것이
사실이었다. 정부가 외과를 더 잘 본다고 알렌을 평한 것은 국민들에게 서양의술의 우수함
을 직접적이고 빠르게 홍보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표현이었기 때문이다.
알렌의 신통한 의술


알렌의 한국명은 안연(安蓮)이며 미국 선교의사로 1884년 9월 한국에 들어 왔으며 갑신정변
때 칼에 맞아 중상을 입은 민영익을 치료해 서양의학의 우수성을 국내에 전파했다. 이를 계
기로 고종의 총애를 받아 광혜원이라는 병원 설립 허가를 얻어냈다. 광혜원이 세워지자 정
부는 광혜원 규칙을 제정해 국립병원 원장 격에 해당하는 광혜원당랑을 두었고 병원 운영에
필요한 관리 사무 직원은  모두 한국 관리로 조직 구성을 완료했다.
광혜원은 개원 13일 만에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계(啓)에 따라 제중원(濟衆院)으로 바뀌
었다. 제중원의 소문은 급속히 퍼져 나갔고 환자들은 구름처럼 몰려 들었다.
이에따라 제중원 업무는 폭증해 선교사 헤론이 가세하고 86년에는 여의사 엘러즈가 오면서
부인부가 설치되기도 했다. 정부는 제중원이 협소해 환자 진료에 불편을 겪자 홍영식의 집
(지금의 을지로 입구 한국외환은행 본점부근) 으로 옮겼으며 고종은 알렌과 엘러즈의 업무
를 높이 평가해 당상관 품계의 벼슬을 내렸다.
당상관 품계 받기도


1886년에는 의학교육부를 개설해 국내 최초의 현대의학교육을 실시했다. 이후 1897년 운영
권이 선교부로 이관됐고 1900년 미국 클리블랜드의 사업가 L.H 세브란스가 병원신축을 위
해 거액을 기부했으며 1904년 남대문 밖 복숭아골에 한국 최초의 병원을 준공했다. 준공후
제중원은 세브란스병원으로 명칭이 변경됐다. 이후 세브란스는 진료기관 뿐만 아니라 현대
의학의 교육 및 연구기관으로 한국의학계의 선구적 역할을 담당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서양의약술이 국내에 처음 들어온 것은 알렌이 활략하기 10여년 전인 1877년(고종
13년)강화도 조약이 체결되면서 부터이다. 한일수호조약, 병자수호조약이라고도 불리는 강화
도 조약은 조선과 일본사이의 전통적이고 봉건적인 통문관계가 파괴되고 국제법적인 토대
위에 성립된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며 일본의 강압에 의한 불평등조약이었다.
조약 이듬해 일본해군은 부산 원산 인천 등 3개 항구를 개항하고 거류민을 보호한다는 명목
으로 서양의학을 바탕으로 한 병원을 세웠다. 부산에는 개항 이듬해인 1877년 제생의원을
만들어 서구식 의술과 서양의약품을 사용했다. 원산은 1880년 생생병원이 그리고 인천에는
1883년 영사권부속병원(후에 인천공립병원의 개칭)이 설치됐다. 서울은 1883년 일본공사관
옆에 일본관의원을 특설하고 한국인에게도 의료를 실시했으며 그 해 10월 창간된  한성순보
는 6개월간 치료환자수가 1,200명이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몰핀 양약 처음 사용


그러나 제생의원 등은 국내에 들어와 있던 일본인을 위한 것이어서 우리 국민들은 별로 혜
택을 받지 못했으며 천주교나 기독교의 선교자체가 인정되지 않았으므로 치료행위도 숨어서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임상에 관한 기록이나 어떤 약을 처음 사용했는지를 알길이 없었다.
양약 사용의 첫 기록은 알렌이 민영익에게 투여했던 알코올, 지혈제 역청,진통제나 몰핀 주
사였다. 민영익은 전신에 자상을 입고 동맥이 끊기고 머리와 몸에 일곱 군데나 칼을 맞아
생명이 위독했다. 궁중어의가 치료했으나 화농으로 치료효과를 기대할 수 없었다. 이때 알렌
이 혈관을 경색시켜 잡아메고 스물 일곱 군데를 꽤메는 등 지극 정성으로 3개월만에 완치시
켰다.
알렌은 민영익 뿐만 아니라 갑신정변으로 청일 양국의 중상자는 물론 조선인 들을 치료했
다. 고종의 왕비인 명성황후는 민영익의 치료를 간곡히 부탁하는 편지를 알렌에게 보낼 정
도로 알렌의 의술은 이미 경이로운 것으로 소문을 타고 있었다. 문을 연지 1년여 만에 왕진
환자수가 무려 1만여명에 달할 정도로 알렌을 찾는 환자수는 급증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약종상인 일본인 기무라는 1879년 개항지를 중심으로 약품 보다는 치약 비
누 화장품 엽서 등 잡화를 위주로 영업을 시작했으며 점차 매약으로 영역을 넓혔다. 본격적
인 약 도매상은 1898년 부산의 다이고꾸남해당이었으며 서울에서는 1903년 아라이약방 1906
년 야마기시천우당 등이 잇따라 개설됐고 1910년 경에는 약국을 포함해 모두 15개 정도로
늘어났다.
기무라 국내 최초 약종상


평양에서는 1906년 기꾸나천수당 모리타나라지초약당이, 대구에서는 1904년 마찌다회춘당
사에끼인생당, 군산에서는 1903년 가미바야시약점 ,목포에서는 1907년 스가약국 기노시다약
국 ,원산에는 이께다회천당 이시다제생당, 인천에는, 기따지마입정당 하세약방등이 이름을
날렸다.
일본의 약업은 당시 개설됐던 철로역을 중심으로 번져 나갔으며 이들의 활동상은 일본약제
사회 기관지인 한국수출입약국에 비교적 자세히 수록돼 있다.
기관지는 한국에서 판매되는 일본약으로 위장환 헤부린환 안티피린환 타우린 하복환 중장탕
천금단 청심단 위산 실모산 등이 있다고 소개했다. 그러나 이같은 품목은 조선에 들어어와
있던 일본 거류민들에게 주로 사용됐고 대다수 한인들은 아무약이나 주어도 기묘한 효과를
나타낸다고 적고 있다.
매약의 형태에서 제약업으로 사업을 처음 시작한 곳은 부산이었다. 1911년 다이꼬꾸남해당
은 각종 시럽과 팅크제를 제조하면서 국내 제약업계는 걸음마를 시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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