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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 당유학 현대의약 초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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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 이병구 기자
  • 작성일 : 2007-02-12 08:08:45

현대의약 태동기(3)
고려 향약구급방 발간 향약 응용 집대성... 조선시대 동의보감 日·청나라서도 유명


일본이 전쟁이나 합방을 통해 서양의약을 전파했다면 서구세계는 선교전파를 목적으로 시작
했다. 국내에 들어온 첫 양의사인 알렌이 선교사였던 것은 이를 잘 말해 준다. 당시 조선은
기독교나 천주교 등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의 활동은 조심스럽고 신중할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의약활동을 통해 인심을 얻은 뒤 자연스럽게 종교를 전파할 수 있는 구실을 만들었
던 것이다. 미국 신교파 교회를 선두로 북미장로회선교부, 미남장로회선교부 미북 및 남감리
회선교부, 영국의 성공회선교부, 호주장로회선교부, 캐나다 선교부 등으로 국내에 들어왔으
며 이들은 서양의약을 주변으로 서서히 전파됐다.
고조선부터 이미 해독


그러나 한국의 현대의약은 고조선시대, 삼국시대, 통일신라, 고려, 조선을 거치면서 태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백제의 관제 중 내관직에 약부(藥部)가 존재 했으며 통
일신라 시대에는 신라인들의 당나라 유학이 많아 의약교육과 의료제도의 발전에 밑거름 역
할을 했다.
또 불교의 융성으로 인도와도 접촉이 잦아짐에 따라 인도의 의술인 승의약학(僧醫藥學)도
받아 들였다. 이 시기에 의방서인 신라법사방, 신라법사유관비밀요약술, 신라법사비밀방 등
의 저서도 편찬했으나 불행히도 이들 의서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고려초기에는 신라의 의
약을 그대로 전승하거나 수나라, 송나라의 영향을 받아 중국의술이 들어왔다. 현종 9년(1018
년) 부터 고종말(1259)까지 약 200년 간의 고려중기 시대에는 송나라의 태평성혜방, 신의보
급방 등 수많은 의서가 이미 들어왔으며 인삼 향유 송자(松子) 등을 송나라에 보내기도 했
다.
인도의술도 고려인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고려의 역대왕 중 정종 문종 예종 인종은 질
병이 있을  때 먼저 불법을 신성시 해 불교예절을 따르기도 했다. 중기 후반부에는 어느 정
도 자주적인 의학발전을 꾀했으며 김영석은 의종 원년(1147)에 신라 송나라 의약서를 참고
로 제중입효방을 편술했고 고종 13년(1225)에 최종준은 신어의최요방을 편찬하기도 했다.
1236년에는 우리나라에서 나오는 향약으로 구급시 쉽게 응용할 수 있는 경험약방을 한데 모
은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 상,중,하 3권1책을 발간하기도 했다.
고려시대 인도의술 접목


원종 원년(1260)부터 공양왕 4년(1392)까지 132년간의 고려말기에는 정도전이 저술한 맥진
도경(脈診圖經)이 나와 의학수준을 한 단계 진전시켰는데 맥진도경은 질병을 진단하고 그
맥법을 그림으로 알기 쉽게 해설한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고려의 의약을 계승 발전시켰으며 전 85권의 향약집성방, 국내에 전해져 내려
오는 한의약서를 다시 각 치료부분으로 분류 정리해 편집한 266권의 의방유취(醫方類聚)를
간행하는 등 큰 업적을 남겼다. 특히 광해군 5년 1613년 간행된 고금 한의약서의 진수만을
모아 만든 25권 25책의 방대한 분량의 동의보감(東醫寶鑑)을 허준이 발간해 조선시대 의학
을 각국에 과시하기도 했다. 동의보감은 일본, 청나라 등에서 여러 차례 간행됐다.
한편 선조 25년 1592년 일어난 왜군의 2차례에 걸친 임진왜란으로 당시 일본에 전파됐던 서
양의학이 일부 전래되기도 했으나 실용에는 크게 미치지 못했다. 그 후 중국에서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교리한역서에 쓰여진 의약학의 지식과 우공종법(牛公種法) 등이 일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태조원년(1392) 부터 선조 40년(1607)까지의 조선 전기 시대에는 내약방 혜민국 동서대비원
제생원 의학원 등이 생겨 환자치료가 비교적 체계적으로 이루어 졌다. 내약방은 왕과 왕실
의 질병치료를 전담하는 관청이었으며 세종 때 내의원으로 명칭이 변경됐다. 전의감은 의료
행정을 총괄하는 관청으로 의학교육은 물론 의학의 과거시험과 취재도 겸했다. 동서대비원
은 도성안의 환자와 의탁할 곳이 없는 사람과 전염병 환자를 수용해 치료했다. 이곳에는 의
원 외에도 무당을 따로 두었는데 이는 질병이 잡신의 횡포 때문이라는 미신사상이 넓게 퍼
져 있었기 때분이다.
신토불이 중요성 깨달아


태종 6년(1406)에 등장한 의녀는 남자의원에게 진찰 받기를 꺼려하는 부녀자들을 상대로 동
녀 중에서 선발됐는데 이 제도는 당시 외국에도 없는 매우 바람직한 제도였다.
한편 세종대왕은 우리 땅에서 자란 약재를 매우 중히 여겼는데 이는 명나라 때 많은 약재를
수입하면서 상당한 국부가 유출됐기 때문이다. 이에 세종은 우리나라 풍토에 맞는 자국산
약재가 더 좋다는 의토성(宜土性)을 강조하는 신토불이 정신으로 의약제민의 자주적 정책을
세웠다. 향약이 좋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중국에서 수입한 당약이나 당재의 약성을 비교
검토해 약성이 비슷하면 향약으로 대체했던 것이다.
반면 당약과 약성이 같지 않은 것은 사용을 금지하게 했다. 향약의 분포 실태조사에도 착수
해 세종 6년(1424) 각도의 관찰사를 통해 각도 각읍의 연혁, 산천의 형태, 풍속, 토산물 등을
조사해 지리지(地理地) 및 월령(月令)을 편찬했다.
이 지리지에는 각도에서 산출되는 약재를 토산공품, 생산약재, 종양약재 등으로 나눠 분포
실태를 기록했다. 이는 향약 사용을 권장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향약의 권장은 우리 의약학
의 자주적인 발전과 약재의 원할한 공급을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제생원은 약재를 정한 양
만큼 만 진상했으며 적기채취를 위해 각도에 관리를 파견하기도 했다.
생약포에서 약재판매


또 채취한 사람의 관명 이름 및 월일을 기록해 채취자의 책임을 명백히 하는 등 신토불이
향약의 권장을 중앙으로 부터 왕명이나 법규로 시달할 정도 였다. 세종 11년(1429년)에는 당
약과 향약을 비교 연구하는 생약포(生藥鋪)를 설치 했는데 생약포는 이외에도 관영의 약재
판매소 역할을 하기도 했다. 실록에 따르면 이 생약포에서 판매하는 당약은 전의감 혜민국
제생원의 예에 따라 본포의 관인을 명나라에 보내 직접 당약을 매입하게 했다고 쓰고 있다.
그러나 이 생약포는 세조 4년(1459)에 폐지됐다. 실록은 폐지 이유에 대해 “이조가 예조에
계하기를 생약포의 약재를 전매하는 것은 원금과 그 이익으로 명나라에 가는 의원이 모든
약재를 민용에 편리하게 했는데 근래에 관리들이 마음을 쓰지 않으니 생약포를 전의감에 옮
기고 별좌를 전의감의 부정(副正)으로 바꾸어 병좌를 겸임하게 하고저 하오니 이 청에 따랐
다”고 쓰고 있다. 생약포외에도 전의감, 혜민국, 제생원에서 일반인에 의약품을 팔았다는
기록이 나와 있다.
현대의약은 이처럼 일본이나 서양의학에서만 전파된 것이 아니고 이미 신라 고려 조선시대
때 부터 착실하게 준비돼 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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