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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벤처는 영원한 벤처의 한미약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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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 이병구 기자
  • 작성일 : 2007-02-12 08:54:42

‘한번 벤처는 영원한 벤처’의 한미약품


‘약사 위한 약만들기’ 도전정신 30년
제약업 최초 ’98년 ‘금탑산업훈장’수상
연구개발 총력, 생명과학기수 다짐


종로구 창신동 임성기 약국은 70년 당시 꽤 유명했다. 대표약사 였던 임성기의 탁월한 조제술 덕분이었다. 지금 같은 의약분업 시기였다면 어려웠던 일들이 당시에는 약의 전문가인 약사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조제가 이루어 졌다.
임성기는 매약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대개의 약국들이 이문이 많은 매약판매에 열을 올렸으나 임성기는 조제로 환자를 치료하는 것에 더 큰 매력을 느꼈다. 그는 특히 성병환자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임질·매독 환자들은 수소문 끝에 임성기 약국을 찾았고 그는 기가막힌 조제로 성병을 깨끗이 완치시켰다. 제법 많은 돈을 번 그는 남이 만든 약으로 조제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직접 더 좋은 약을 만들어야 겠다는 결심을 했다.


임성기가 창업주도


그리고 약사였던 홍병석·정지석 등과 함께 한미약품을 차렸다. 그때가 1973년 6월 이었다. 경기도 성남시에 문을 연 한미는 ‘약사 3인’이 만든 제약회사라는 상큼한 이미지로 소비자들에게 다가갔다.
경영과 공장,영업 등 3박자를 갖춘 이들은 두려울게 없었다. 비록 팔만한 제품은 얼마 안됐지만 좋은 약으로 환자를 구한다는 이들의 신념은 꺾을 수 없었다.
처음에는 ‘설파제’, ‘한미 T-S’ 등 항생제가 강세였다. 물론 지금도 제3세대 항생제 등 차세대 항생제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데 이것은 모두 임성기가 항생제로 성병환자를 치료했던 것과 인연이 있기 때문이다.
3명의 젊은 약사들은 패기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거래처를 누볐다. 유한양행 종근당 동아제약 영진약품 등 당당한 제약사들이 이미 시장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이들 3인방은 전혀 위축되지 않고 한미약품만의 새로운 이미지를 심어나갔다. 새로운 이미지는 다름 아닌 약업 벤처회사. 한미가 지금도 제약사 가운데 벤처 이미지가 가장 강한 것은 이같은 창업주의 마인드를 이어오고 있기 때문이다.
75년 공채사원으로 한미와 인연을 맺은 현 민경윤 사장은 “연구 개발하는 회사, 지금 당장 보다는 미래를 보고 투자하는 회사, 남들이 안하는 것을 굳이 하겠다고 고집하는 회사가 바로 한미약품”이라며 “ 최고는 아니지만 언제나 최고를 추구하면서 현재에 최선을 다하는 회사가 한미” 라고 말했다.


젊은 약사 3인이 공동설립


한미약품이 “뭐 하는 회사냐고 물으면 제약회사다, 젊은 약사 3인이 모여 만들었기 때문에 약사들이 원하는 약이 무슨약인지를 잘 안다. 약사를 위한 약을 만들겠다고 입다짐으로 대답하면서 한미의 위상을 조금씩 조금씩 강화됐다.
이렇게 되자 어느날인가 부터 한미가 무슨회사고 무슨약을 만드느냐고 묻는 약사들이 없어졌다. 영업사원들이 그야말로 발에 땀이 나도록 돌아다닌 결과였다.
민경윤은 항생제, 영양제 ‘헵타비타’, ‘노나브이’, ‘라비롤’, 감기약 ‘노루핀’ 등 달랑 몇개 제품 리스트로 영업을 했지만 굴하지 않는 도전정신을 키워온 것이 오늘날 한미 성장의 밑바탕이 됐다고 회고했다.
파란 감기약 노루핀은 “노루피로 만들었느냐”는 약사들의 짓궂은 농담도 있었지만 해열 진통에 관한한 ‘직빵’ 의 효과를 나타냈다는 것. 영양제 종류는 미제였던 ‘게브랄티’가 인기가 있었고 헵타비타는 ‘한국의 게브랄티’라는 닉네임을 들을 정도로 소비자의 사랑을 받았다.
특히 이들 제품에 적용한 소프트 캅셀 기술은 어느 제약사에서 나온 것 보다도 뛰어났다. 중간의 선을 자체 기술로 없앤 신기술을 선보였고 이같은 노하우는 지금도 한미가 소프트캅셀 분야의 선두주자로 자리매김 할 수 있는 거름이 됐다.
특히 당시는 가격제도에 대한 정부의 통제가 없어 제조사가 정하는 가격이 곧 공급가가 됐고 한미는 이같은 기술을 이유로 가격을 크게 높일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적정 마진만을 붙였다.


공채출신 민경윤사장 성장 주도


이 또한 약사들과 환자들의 신뢰를 얻는 한 계기가 됐다. 민경윤은 “지금 당장의 이익 보다는 먼 앞날을 내다본 영업활동이었다”며 “이같은 방침은 현재도 유효하다”고 강조했다. 그 자신이 영업사원이었던 민경윤은 영업시절의 에피소드 하나를 들려 줬다. “트리옥살렌 제제인 ‘쏘라렌’이라는 백납치료제가 있었어요. 백납 치료제로 유일하게 한미가 희귀약으로 생산했는데 정해진 용량을 초과할 경우 간독성 등 부작용이 생길 수 있지요. 그런데 어느 날 약사로부터 다급한 호출이 왔어요. 환자에게 정해진 용법·용량을 초과해 알려 줬는데 그 환자를 찾아 제대로 복약지도를 해달라는 요구였습니다. 약국을 지켜야 하는 약사가 환자를 찾아갈 수 없었기 때문이었지요.” 성남 지역을 담당하고 있었던 그는 주소 하나만  들고 하루 종일 환자를 수소문했다. 제대로 주소 정리가 안돼 있어 아침부터 시작한 사람 찾기는 저녁 어스름 할 무렵 끝이났다. 환자를 찾은 기분은 신규로 영업을 튼 때보다도 훨씬 뿌듯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한미와 약사들의 인간관계에 신뢰가 더해졌다.
30년의 역사동안 한미는 3번의 큰 변신을 시도한다. 한 번은 창립년도인 73년부터 83년의 시기로 창신동 시대, 84년부터 93년까지 역삼동 시대, 94년부터 현재까지 방이동 시대로 변모하면서 명실공히 국내 최고의 제약사로 위치를 확고히 하고 있다.
창립 이후 매년 20-30%의 고성장을 구가하고 있으며 어린이 영양제 미니텐텐, 비타민C 쎄쎄250 츄정, 소염효소제 뮤코라제, 소염진통제 아섹, 항생제 크로세프, 위장관기능조절제 셀프라이드, 경구용 항진균제 이트라 정,  고혈압 치료제 유니바스크 등 100여 종의 우수 의약품을 생산하고 있다.
특히 R&D기술이 뛰어나 85년 독일 훽스트사에 이어 두 번째로 세포탁심 합성에 성공 20여개 국에 수출하고 있으며 89년 국내 기업 처음으로 제3세대 항생제 세프트리악손을 원 개발사인 스위스 로슈에 600만 달러에 기술이전 97년 면역억제제 마이크로에멀젼 기술을 스위스 노바티스사에 6,300만 달러에 기술이전 하는 등 국내 제약사에 영원히 남을 굵직굵직한 발자취를 기록하고 있다.
99년에는 세계 최초 형질 전환 흑염소 메디의 젖으로부터 백혈구 증식인자 G-CSF를 생산하는 개가를 올렸으며 그해 9월 항암제 파클리세탁 개발에 성공 2004년 상품화에 들어갈 예정이다.
이같은 공적을 인정받아 정부는 98년 제 31회 과학의 날에 제약업계로는 처음으로 최고의 영예훈장인 ‘금탑산업훈장’을 수여했으며 99년에는 ‘경제정의기업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았다. 민경윤은 “앞으로 매출액의 10% 이상을 연구 개발에 투자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신약 개발로 21세기 생명과학 기수의 역할을 충실히 해나갈 것” 을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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