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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카스 기적과 강씨 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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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 이병구 기자
  • 작성일 : 2007-02-12 08:44:14

박카스 기적과 강씨 부자


아버지 중희 이끌고 아들 신호 뒷받침
이해와 화합으로 부도딛고 기사회생


동아제약 매출의 절반을 ‘박카스’가 올린다. 단일품목으로 2,000여억원을 돌파한 약은 박카스가 유일하다. 국내 제약 60년대를 정리하면서 박카스 얘기를 안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박카스 개발 주역으로는 동아제약 설립자인 강중희와 현 회장인 강신호를 꼽는데 이견이 없다.
서독 유학을 마친 신호는 아버지 강중희가 사장으로 있는 동아제약 상무로 입사한다. 이때가 1959년.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기 전이었지만 신호는 어려운 상황에서 학업을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힘써준 부친을 위해 연구대신 동아제약 근무를 택했다. 그는 부도 위기에 처한 회사를 구하기 위해 신제품 개발에 열을 올렸다. 신호는 30여개 신제품의 제조허가를 냈다. 주변에서는 “따로 제약사를 차릴 셈이냐”고 혀를 찼지만 그는 신제품만이 쓰러져 가는 동아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판단, 주변의 시선에 아랑곳 없이 제품 개발에 진력을 기울였다.


신호, 동아 상무로 입사
1차로 나온 것이 지금도 유명한 ‘판피린’을 비롯 ‘푸로몬’ ‘테라신’연고 그리고 비타민 미네랄 강장제를 혼합한 복합 영양제 ‘박카스’였다. 박카스는 신호가 서독 유학중 함부르크 지하홀 입구에 서 있던 술과 추수의 신 박카스에서 영감을 얻어 이름 붙였다. 당시 약 이름에 박카스는 파격적인 것이었지만 당국의 제조허가를 받는데는 무리가 없었다. 당시 제조허가 관계 실무를 맡았던 김재철 사무관도 구론산 류가 흔한 시장에서 박카스는 매우 독특한 이름이라고 아이디어를 높이 샀다.
하지만 박카스가 나온 것은 허가 1년뒤인 1961년 9월 이었다. 허가 즉시 발매할 계획이었으나 자금난과 기술을 익히는데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음주 전후에 술을 먹으면 간이 손상되지 않는다’는 셀링 포인트는 적중했다. 100정 포장단위로 월 1만정 까지 매상이 늘어났다. 그런데 몇 개월 후 당의정이 녹아내리는 부작용이 나타나 반품 사태가 이어졌다. 동아제약의 부도는 피할 수 없었다. 강중희 사장은 착잡했다. 그러나 그는 “사람이란 실수가 있는 법이고 또 처음부터 꼭 잘 되라는 보장이 없는 것이니까 연구해서 다시 해보라고 오히려 실무진들을 다독였다” 직원들은 차라리 큰 소리로 화를 내지 않는 강사장이 야속했지만 그의 용인술에는 변명을 할 수 없었다. 직원들은 죽기 살기로 박카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 했다. 당의정의 기술문제는 곧 풀렸다. 그러나 한 번 실추된 이미지를 회복하는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당시는 또 ‘천도제약’의 단발구론산과 ‘동인화학’의 동인구론산이 나와 승승장구 하던 때였다. 중희와 신호는 정제의 시대는 가고 액제의 시대가 왔음을 실감했다. 62년 8월 박카스 내복액이 발매됐다. 박카스 액제의 출발은 순조로왔다. 속효성을 원하는 소비자 구미에 맞았고 맛이 괜찮았다. 그러나 앰플로 된 액제 역시 문제가 발생했다. 깨지기 쉽고 따는데 불편이 따랐으며 일부 소비자들은 주사제로 오인해 실제로 주사했다는 사람도 나왔다.
부도의 고통을 극심하게 받던 62년 말 박카스 디가 첫선을 보였다. 중희는 “내 평생의 사업운을 여기에 걸어 보자. 사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는 재기가 어려운 것. 나는 이제 막바지에 이르지 않았는가” 중희는 박카스를 자신의 최후 작품으로 생각했다.
신호는 부친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제품에 대한 자신감으로 대량광고에 의한 대량판매작전을 지시했다. 그러나 문제는 역시 자금. 당시 경쟁품들은 ‘드링크 제는 광고’ 라는 인식으로 엄청난 광고 물량을 쏟아 내고 있었으므로 광고로 맞대응해야 했으나 자금을 당해낼 수 없었다. 재정부서는 더 이상의 광고는 불가능하다는 보고를 계속 올렸다. 그렇다고 광고를 안할 수도 없었다. 광고만 하면 팔릴 것이라는 확신이 이미 섰기 때문이었다. 신호는 인삼드링크를 수출하기 위해 홍콩 주재 영업소소장으로 파견됐다 귀국한 판촉과 광고 업무를 맞고 있던 손정삼 판촉부장에게 어떻게든 좋은 광고를 해보라고 지시했다. 손 부장은 즉시 유충식 광고과장(현 동아제약 사장)과 도안 및 광고제작을 하던 이효일을 불러 회사의 뜻을 전했다.


유충식 광고과장 맹활약
서울대 상대 출신의 유충식 과장은 공채 2기로 61년 입사한 광고 홍보 분야의 팔방미인이었다. 당시 광고시장은 신문 잡지에서 벗어나 문화방송이 상업방송을 시작하면서 새로운 감각의 효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다. 따라서 반복되는 멘트로 소비자의 잠재의식 속에 파고드는 캐치프레이즈가 광고의 생명이나 다름 없었다. 손부장 유과장 등이 중심이 된 광고팀은 ‘活力을 마시자’라는 유명한 광고 카피를 탄생시켰다. 효과는 거짖말 처럼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월 100만병 생산목표가 63년 해를 넘기기도 전에 200만병을 돌파했다. 공장은 시설을 늘리고 사원들은 매일같이 야근을 해야했다.
그러나 회사의 자금사정은 썩 좋아지지 않았다. 당시 재정책임은 이형식 전무가 책임을 지고 있었는데 이 전무는 다혈질이라 손 부장을 불러 놓고 결재판으로 책상을 치고 주산(珠算)을 집어 던지면서 호통을 치기 예사였다. “회사 사정에 따라 광고를 해야지 광고만 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의기소침한 손부장이 물러 날 즈음 중희는 그를 불러 ‘괜찮아’ 걱정말고 광고를 계속하라고 격려했다.
초창기 방송광고는 의약품 이라고해서 내용에 있어 특별한 규제를 받지 않았고 그 내용도 길어서 소비자들에게 크게 어필했다. CM의 시간이 무려 1분 30초나 됐기 때문에 이 시간이면 멘트와 CM송 그리고 배경음악이나 효과를 충분히 살리고도 남았다. 광고상품의 이름을 내건 쇼 프로그램이 골든 아워 시간을 점령하고 쇼의 사회자가 광고주의 상품명을 말해도 괜찮은 그런 분위기 였다. 따라서 ‘광고주가 방송 프로를 이끌어 간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후에 외화 중 가장 시청률이 높았던 ‘전투’(戰鬪)라는 영화의 앞뒤 광고를 동아제약이 독점한 것은 동아 광고팀의 위력을 말해 주는 것이다.
박카스 디는 발매 1년만에 드링크제 시장의 절반이상을 석권했다. 동아제약이 부도를 딛고 일어서는 순간이었다. 업계는 물론 경제계도 작은 제약사의 극적인 소생을 경이적인 눈으로 지켜봤다. 어제까지 등을 돌리던 사람들이 오늘은 반가운 얼굴로 찾아왔다. 중희와 신호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매출의 극대화를 위해서는 판매조직의 일대 정비가 필요하다고 판단해 동아제약판매주식회사를 설립했다.


회사에서 ‘아들’로 대하지 않아
그리고 소매 직거래가 핵심인 DSC(Dong-A Sales Circle)특판점을 운영했다. 당시 유통은 도매상이 꽉잡고 있어 이 제도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도매상에 돌아가는 리베이트를 줄이고 배송 시간의 절약을 위해 꼭 필요했다. 이 제도는 적중했다. 박카스 디의 매출 신기록은 연일 갱신됐다. 강신호 상무는 전무로 승진됐다. 사장의 아들이라서 승진한 것이 아니고 그가 서독에서 배우고 익힌 견문을 경영실무에 도입해 위기에 처한 회사를 구한 일등공신으로서의 예우였다.
중희는 회사에서 만큼은 신호를 아들로 생각하지 않았다. 회사동료인 아들의 의견을 존중했다. 강중희 자신도 어느 누구 못지 않은 고집불통이었지만 의사 면허증을 가진 아들로 대하지 않고 철저한 경영인, 예리한 통찰력을 지닌 동아제약의 전무로 대했다. 부자간의 이러한 융화가 오늘날 동아제약을 일군 원동력이며 박카스 신화를 탄생시킨 발판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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