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녹십자와 백신사업 35년

  • 고유번호 : 921
  • 작성자 : 이병구 기자
  • 작성일 : 2007-02-12 08:44:53

녹십자와 백신사업 35년


-발기 7인, 67년 동물백신 생산 첫 걸음마-
-인수초기 71년 ‘공중보건’큰뜻 품어-
-평화,희망 뜻 ‘녹십자’ 명명, 선두주자로
화려하게 시작했지만 곧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기업이 있는가 하면 비록 시작은 미미하고 여러차례 위기를 겪는 과정을 거쳤지만 대단한 거인의 모습을 보이는 기업이 있다. 67년 수도미생물약품판매주식회사로 출범한 녹십자의 출발은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허채경 새주주로 참여
하일환 마웅호 박창운 하재원 등 7명의 발기인은 자본금 1,000만원으로 회사를 설립했다. 원래 이 판매회사는 수도미생물연구소라는 동물약품제조사에서 나온 제품을 독점적으로 파는 전문판매회사였다. 당시 연구소는 동물 백신을 주로 생산 판매했으나 경영이 어렵게 되자 생산에만 주력하기로 하고 판매권을 수도미생물에 넘겨 주게 된 것이다. 초대사장에는 하일환씨가 선임됐고 수의학자인 하재원을 상무로 임명했다. 조직을 갖춘 수도미생물은 뉴캐슬백신 돈 콜레라백신 등 동물백신과 동물약품 그리고 일본뇌염백신 백일해백신 등 사람 백신을 판매하면서 사세를 키워 나갔다. 이후 동물백신 제조업에도 뛰어 들었다. 비록 동물백신 제조로 시작했지만 이때 백신제조 경험은 녹십자가 세계적인 백신회사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됐다.
수도미생물의약품판매는 뉴캐슬 백신 등의 판매 호조로 제조원인 연구소와 결별하고 독자적인 동물백신 제조에 매달렸다. 이후 이름을 극동제약주식회사로 변경하고 신갈공장 건설에 사세를 집중시켰다. 그런데 공장 건설은 엄청난 비용이 들었고 투자자들은 ‘닭병 백신’으로는 가망이 없다는 이유로 자본을 회수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회사는 위기에 빠졌다.
이때 한일시멘트를 경영하던 허채경(許采卿)이 새주주로 참여해 위기에서 벗어났다. 69년 1대 사장이 물러나고 2대 사장에 마웅호씨가 선임됐다. 경영진이 바뀌는 복잡한 와중이었지만 공장건설을 계속돼 69년 동물용백신공장(현 녹십자 신갈공장 혈장부 1층일부) 콘세트 건물(현효소 공장 건물 부지) 관리부, 보일러실, 변전실 등이 완공돼 황량한 신갈 들판을 새로운 모습으로 바꿔 놨다. 공장은 가동됐으나 이 곳에서 생산되는 동물백신은 당시 검정기관이었던 안양가축위생연구소으로부터 자주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 막대한 자금을 들여 완공한 공장에서 이득을 보지 못하자 회사는 다시 위기에 빠졌다.
여기서 돌파구를 찾기 위해 동물백신에서 사람백신으로 영역을 확대했다. 그해 12월 15일 인체 의약품 제조업 허가를 얻어 일본뇌염백신과 DPT의 품목 허가를 얻어냈다. 하지만 동물백신을 만들어 내는 생산시설에서 인백신을 바로 만들수는 없었다. 교차감염의 우려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또 당시는 치료중심의 시대에서 예방적 성격의 백신은 ‘공짜로 놔줘야 맞을 수 있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어 백신제조는 큰 재미를 볼 수 없었다. 차라리 외국의 수입완제품을 판매하는 것이 이문이 훨씬 좋았다. 무리한 투자, 사업의 불투명이 계속되자 회사는 혈액분획제제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던 김수명을 3대 사장으로 영입했다.


혈액분획제제 뛰어들어
여러 난관을 뚫고 극동은 국내서 개발되지 않은 새로운 제품인 혈액분획제제(혈장내의 단백질을 변성 시키지 않고 필요한 성분만 생화학적 방법으로 분리해 낸 다음 이를 정제해 만든 특수의약품으로 약사법에 백신 혈장 및 항독소와 함께 생물학적제제로 규정돼 있다)를 생산하게 됐다. 이를 계기로 이름도 녹십자로 바꿨다. 그때가 71년 10월 이었다. 녹십자로 사명이 바뀐 것은 현 녹십자 회장인 허영섭 관리부장의 제안에 따라 이루어 졌다. 허영섭은 주주인 부친 허채경에게 “회사 이름은 긴 장래를 보고 여러 측면에서 고려해야 한다”고 부친을 설득했다. 허영섭은 국가의 혈액관리사업과 맥을 같이하는 혈액분획제제 사업은 대한적십자사와 공통점을 가져야 하고 혈액을 취급하므로 다른 회사와 다르다는 인식이 있어야 하며 백신사업 역시 공중보건이라는 대의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녹십자가 적격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녹십자는 협력업체인 일본 미도리쥬지(녹십자)라는 이름이 이미 사용 중에 있어 거부감이 없지 않았으나 양해를 구했고 미도리쥬지 역시 유럽 청년봉사단체인 그린크로스(Green Cross)를 본 딴 것이므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로써 번영과 풍요 그리고 평화를 상징하는 녹색, 희생과 봉사 사랑을 담은 십자의 녹십자(綠十字)가 탄생한 것이다. 상호를 변경한 녹십자는 71년 국내 첫 번째, 세계 여섯 번째로 혈액분획제제 생산공장을 준공했다. 시험생산에서 혈장원료가 투입되자 녹십자의 모든 임직원들은 환호성을 올렸다. 이후 알부민(인혈청알부민)과 혈장증량제 플라즈마네이트를 생산했다. 공장의 가동은 수입에서 생산 그리고 수출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고 국내 임상의학계에 커다란 활로를 개척하는데 일등공신임을 자임하는 것이었다.


‘광제군생’ 휘호받아
공장준공은 국가적으로도 매우 큰 관심사였다. 김종필 당시 국무총리가 직접 공장을 방문하기도 했다. 김총리는 방명록에 광제군생(廣濟群生)이라는 즉석 휘호를 남겼다. ‘널리 뭇 생명을 구제하라’는 깊은 뜻이 담겨 있었다.
72년 혈장증량제인 플라즈마네이트가 나왔다. 녹십자의 이름으로 생산된 의약품 제1호 품목이었다. 이 제품이 나오자 일반인은 물론 의약계 종사자들 사이에서도 ‘녹십자가 피에서 뭘 뽑아 만들었다는데 참 희한하다고 한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그 해에 알부민도 나왔다. 알부민 탄생은 플라즈마네이트만큼이나 우여곡절을 겪었다. 주사액을 만들 때 주성분을 녹이는 용해 탱크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제조 공정대로만 된다면 알부민 성분을 용해 탱크에 넣어 녹인 다음 압력으로 밀어 넣으면 탱크 아래쪽에 파이프로 연결된 여과장치를 거쳐 액상의 벌크(BULK)가 말끔하게 나와야 한다. 그런데 벌크에서 ‘파이로젠’이 검출됐다.
파이로젠은 발열물질로 사람이나 동물의 체내에 들어갈 경우 체온을 상승시키는 치명적인 부작용을 일으키는 물질이다. 제조공정 과정에서 원료나 기기 또는 세균에 오염될 경우 발생하며 품질관리 측면에서 가장 중요한 시험항목이다. 따라서 파이로젠이 검출되면 국가검정을 받을 수 없다. 회사는 난관에 봉착했으나 서울사무소는 물건을 빨리 달라고 아우성이었다. 이미 국내의 한 제약사가 외국에서 알부민을 수입해서 막 시장에 풀고 있었다. 고사까지 지냈지만 파이로젠은 다시 검출 됐다.


허영섭, 국산화 큰 보람
나중에 밝혀졌지만 여과기를 장치한 파이프와 탱크 사이에서 연결 통로를 개척하는 노출된 밸브에서 문제가 생겼던 것이다. 당시 새니터리 밸브는 국내에서 구할 수 없어 수입해야 했다. 녹십자 기술진은 밸브 정도야 괜찮겠지 하는 생각과 모든 것을 국산품으로 하자는 의지 때문에 밸브의 문제를 간과했던 것이다. 이같은 경험은 쓴약으로 작용했다. 제조공정의 처음과 끝이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으며 완벽하지 않으면 생산하지 않는다는 녹십자의 철학이 생겨난 원동력이 됐던 것이다.
사장이 된 허영섭은 후에 “기초 원료부터 제조·생산하는데에 높은 가치를 두었고 수입 의약품을 국산화하는데 보람을 느꼈다”고 술회하고 있다.



리스트
답글

[그림의 영문, 숫자를 입력하세요]


[ 300자 이내 / 현재: 0 자 ] ※ 사이트 관리 규정에 어긋나는 의견글은 예고없이 삭제될 수 있습니다. ※ 현재 총 ( 0 ) 건의 독자의견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