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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약품과 약유통 반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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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 이병구 기자
  • 작성일 : 2007-02-12 08:45:32

백제약품과 약유통 반세기


46년 백제약방 개점 시장 본격 참여
대형화 전략 적중 전국 최대 도매상으로
‘쥴릭’ 등 다국적社 등장에 “걱정마”


할거시대의 좌충우돌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도매상의 소매행위, 소매상(약국)의 도매행위는 60년대만 해도 성행했다. 또 생산자(제약사)의 소매상(약국)직거래는 도매상과 마찰을 일으키는 주요한 원인이었다.  개국약사들은 이런 문제를 없애고 직접거래로 인한 고마진을 얻기 위해 ‘의약품공동구매조합’을 결성한다. 약사들은 ‘대한의약품판매협회’가 중심이 된 것 처럼 내세웠으나 주최는 그들이었다. 이들은 62년 관철동 약사회관에서 발족식을 갖고 현금사입·현금판매를 정강으로 내세웠다.
초기에는 제약사들이 비상한 관심을 나타냈지만 거래가 깊어지면서 대금결제에 따른 위험 부담 등으로 하나 둘 씩 조합과 관계를 정리했다. 더구나 조합은 엄연히 의약품 도매행위를 하고 있음에도  도매업 허가를 받지 않아 무허가로 영업을 했고 세무문제 등에 부딪치자 힘을 잃었다. 여기에 자금부족, 경영기법 미숙으로 얼마 못가 문을 닫았고 약사회도 본연의 임무로 돌아갔다. 도매상들은 이런 사건을 거치면서 협회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이들은 친목단체인 ‘공영회’를 조직하고 이후 ‘20구락부’로 명칭을 바꾸면서 결속을 다졌다.
그러나 이 기구는 가격경쟁 지양 등의 성과를 얻어 냈으나 약업 장래를 내다보는 유통중심의 역할은 하지 못했다. 이에 제약사들은 도매상을 대신할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중간도매상 제도를 도입한다. 제약사들이 만든 중간도매상이 소매약국과 직거래는 물론 대형약국 병의원 등에도 약을 공급하기 시작하자 유통 경로는 복잡해지고 약 가격도 거래량과 결제조건에 따라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서 가격경쟁에 밀린 도매상들은 부도를 맞고 무너져 내렸다. 서울의 백광약품 흥일약품 천도약품 부산의 한일약품 대전의 삼양약품 등이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58년 서울의 한양 한성 대전 중앙약품 59년 서울의 천보약품 국일약품 도산에 이은 연속도산이었다. 이런 와중에서 도매상들은 마침내 63년 7월.  30여 도매상이 모여 2년여의 진통 끝에 사단법인 허가를 받아 대한의약품도매협회를 발족한다. 도매상들은 협회를 통해 힘을 한데 모으고 내수시장은 물론 수출에도 전력을 기울인다.서울의 백광약품 천양약품 청계약품 태평양약품 종로약품, 지방에서는 대구의 대구약품 경동사약국 부산의 복산약품 대전의 대전약품 삼양약국 목포의 백제약품 전주의 삼화약품 진주의 고려약품 광주 광주약방 대성약방 목포는 백제약방과 구세약방 군산의 태전약품 안동의 장춘당약국 원주의 동인당약국의 활동이 눈에 띄었다. 또 제약사들이 만든 중간도매상과 대형약국들인 서울의 원산약품 대인약품 보령약품도 실력자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제약사 중간도매상맞불


이 가운데 목포의 백제약품은 부산의 복산약품과 함께 동일인 동일상호를 유지한채 50여년의 역사 동안 국내 최고의 도매상으로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백제약품은 올 매출목표를 4,500억원 이상으로 잡을 만큼 자타가 공인하는 최대 도매상. 여기서 백제약품의 역사를 간략하게 살펴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백제약품 설립자 김기운은 16살 어린나이로 약업계에 뛰어 들었다. 목포에서 태어난 김기운은 일본인 상점인 ‘이또오’에  취업한다.
이때가 1936년. 이또오상점은 약품부와 판유리부 전기부 등 세부문으로 나눌 정도로 규모가 큰 도매상으로 모두 20여명의 직원이 있었다. 여기서 그는 개인사업을 꿈꿨다. 약국을 하기 위해 독학으로 약종상 시험에 합격했다. 그러나 나이가 19세라는 이유로 합격이 취소되는 좌절을 맞봤다. 엎친데 겹친격으로 폐결핵으로  고향인 전남 무안군 몽탄면으로 내려 갈수밖에 없었다. 몸을 회복할 무렵 해방이 됐다. 그는 약종상시험에 재응시해 합격했다. 김기운은 ‘많은 사람을 구제한다’는 의미로 백제약방이라는 상호를 내걸었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이었다. 행인의 출입이 빈번한 목포 남교동 사거리에 문을 열자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다른 약방에 비해 약품을 골고루 갖춘것도 한 몫했다.
당시 약은 수요에 비해 공급이 달렸기 때문에 누가 얼마나 신속하게 많이 구비하느냐에 따라 성패가 갈렸다. 그는 외국에서 귀환하는 동포들로부터 약을 사들였다. 목포는 호남지역의 관문일 뿐만 아니라 남해안 도서지방을 연결해 주는 항구였고 부산이나 제주도처럼 많은 귀환동포들이 몰려들었다. 그는 귀환동포의 약을 사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영암 강진 장흥 해남 진도 완도 까지 찾아 다니면서 약을 사들였다. 당시는 ‘오일페니실린’과 설파제 ‘다이아진’이 만병통치약으로 과대 평가 되면서 인기가 높았다.
주사약인 오일페니실린은 지금 돈으로 200만원 정도의 고가로 구입하면 즉시 금고에 넣어 둘 정도였다. 또 다이아진은 걸렸다하면 50%가 사망하는 폐결핵의 특효약이었으므로 다이아진의 값도 엄청났고 수요는 늘 달렸다. 서울에서도 구하기 힘든 이런 약들을 김기운은 수완좋게 준비했고 소문을 들은 서울 도매상들이 목포로 내려오기까지 했다. 항구도시 목포에 문을 연 덕을 톡톡히 본 것이다. 백제약방의 명성은 전남 일대는 물론 서울 경북 제주도까지 뻗어 나갔다. 특히 제주도의 활발한 거래는 백제약방에 새로운 도약의 길을 터줬다. 전란의 와중에서도 백제는 영업을 계속했다. 1.4후퇴로 내려간 부산 국제시장에서 활약도 대단했다.
김기운은 목포에서 쌀을 구입해 팔아 그 돈으로 약품을 구입했는데 국제시장으로  50~100톤 짜리 화물선을 빌려 쌀을 가득싣고 갔다. 쌀 한가마니가 3,000환 정도였지만 스트렙토마이신 한 병에 1,000환 증류수 20cc에 25~30환 정도여서 쌀과 약을 팔아 엄청난 이득을 남겼다. 전란의 위기를 기회로 이용한 것이다. 해방후 ‘백제메리야스’ 공장과 ‘백제화학’으로 힘든 시기를 겪기도 했지만 백제는 60년대 들어 약업에만 진력, 다시 선두자리를 차지했다. 하지만 65년 동아제약이 박카스 직판제도를 실시하면서 제약사들이 직접 약국과 특약점 계약을 체결하자 도매상들은 위축됐다. 교통도 편리해지자 제약사들은 직접 약국에 약을 공급하기 시작했다. 백제약품도 위기를 맞았다. 이에 목포를 거점으로 한 영업은 한계가 있다고 판단, 광주 지점을 개설했다.


복산약품과 50년 애증


이후 창원 지점을 열었다. 광주 창원 지점을 내면서 김기운은 그 지역 토착 도매상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쳤다. 특히 창원지점 개설은 업계의 영원한 라이벌인 부산의 복산약품 엄상주와 견원지간이 되는 계기가 됐다. 엄상주는 당시 경상도 지역의 터줏대감 역할을 했고 백제의 창원지점 반대를 선두에서 외쳤다. 결국 공정거래위원회 까지 가는 진통 끝에 백제의 창원지점 개설이 가능해졌지만 이 사건 이후로 두 사람은 영원한 숙적관계를 유지한다. 
김기운은 “나는 목포 광주 창원은 물론 전국에 거점망을 계획하고 있었다. 결국 도매상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규모가 대형화 돼야 하고 이런 내 예측은 맞아 떨어졌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후 두사람은 올 초 이희구 도협회장의 주선으로 자리를 함께 했다. 40여년만에 화해의 악수를 나눈 것이다. 두사람이 손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다국적유통회사인 쥴릭이 들어오면서 외국회사도 전국을 무대로 영업하는데 국내 거대 도매상이 못할게 없다는 시대적 상황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백제는 최근 인천 지점을 개설하고 올해안에 분당 경남 양산 제주 지점을 잇따라 열어 전국 15개 지점으로 점포수를 늘린다. 반대를 무릅쓰고 전국 유통망을 세운 김기운의 앞을 내다보는 예측이 백제약품을 오늘날 최고 최대의 도매상으로 자리잡게 한 원동력이 됐던 것이다. 그는 “백제 같은 도매상이 전국에 5개 정도 있다면 쥴릭도 하나도 겁낼게 없다. 도매 후진국인 동남아에서나 쥴릭이 힘을 쓰지 유통 선진국인 한국에서는 쥴릭이라도 어렵다”고 진단했다. 올해 83세인 그가 쥴릭에 대처하는 방안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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