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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약유통과 약품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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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 이병구 기자
  • 작성일 : 2007-02-12 08:46:37

60년대 약유통과 약품조합


원료 공동구매 수입업무 조합대행
종로5 남대문 청량리 등 ‘상권화’도
‘난매행위’맞대응 68년 ‘재판제’등장


조합, 64년초 첫걸음
대한약품공업협동조합이 창립된 것은 1964년 1월29일이다. 정부는 62년 중소기업 육성을 위해 ‘중소기업자금 30억원 융자요강’을 발표하고 중소기업협동조합법을 제정·공포했다.
이에 제약업자도 이 법령에 의한 특혜를 얻기 위해 176개 제약사가 1구좌당 1만원씩을 출자해 발족 했다. 조합은 자금을 융자받아 조합원사에 배정하고 원료의약품과 부자재 등 공동구매를 통해 대행하는 일을 하면서 제약사들의 경영난 해소에 주력했다.
당시 제약사들은 외환 억제정책으로 원료의약품 구입에 큰 애로를 겪고 있었다. 원료의 구득난으로까지 이어져 일부 제약사들은 약을 생산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기까지 했다.
이런 때에 조합이 원료를 공동구매하고 수입 업무 대행을 했으니 제약사들은 조합의 역할에 크게 만족해 했다. 64년 9월 처음으로 정부 융자 1,000만원을 받았는데 이 돈은 원료구득난에 빠진 제약사들에게는 단비와 같은 존재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회원사들은 출자금을 계속 늘렸고 출자금 증자 비율에 따라 정부의 융자도 늘어나 조합의 활동은 크게 강화됐다.
특히 KIST를 통한 기술지도, 제약공단 조성 등으로 제약사의 현대화 작업에 큰 도움을 주기도 했다. 당시 조합 사무국에 입사해 40여년간 조합에서 근무하고 있는 한주현(현 조합 전무)은 “원료 공동구매, 제약사 우선집중지원대상 지정, 시설 현대화에 조합이 일조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유한양행 등 큰 회사 한 두곳을 빼고는 모두 회원사 였다” 며 “협회와는 별도로 조합의 운영이 제약사 발달에 기여한 것은 부인할 수 없다”고 당시를 회고 했다.
그는 “당시 어려웠던 제약사들이 금융융자를 받고 활력을 얻는 모습을 보면서 보람을 느꼈다”고 말했다. 덧붙여 조합 이사장 이사 등 임원들이 내일처럼 뛰어다닌 것이 오늘날 조합이 성장할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는 것.


제약사 발달에 일조


64년 초대부터 69년 3대까지 6년간 이사장였던 전규방(신한합동제약) 69년부터 80년까지 이사장인 신호균(환인제약)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초대 이사진은 강중희(동아제약), 고희익(삼일제약), 노종형(안국약품), 박동식(범양약화학), 박용선(삼화제약), 박철영(신광약품), 변속근(동서약품), 이계영(동광약품), 이덕휘(동양제약), 이종근(종근당)정재흥(태영제약) 등이었다. 3대 이사진에는 윤용구(일동제약), 윤화열(동화약품), 이기석(대한중외제약), 황원성(대광화학연구소) 등이 새롭게 편입됐다. 이사진들은 조합의 발전에 막대한 공헌을 했다.
65년에는 상임이사진이 당시 보사부를 방문 물품세법 개정에 따라 일부 의약품에 대한 과세의 시정을 건의했으며 국산으로 수입대체가 가능한 ‘피마자’의 수입을 건의하기도 했다.


박카스 등장으로 유통변화


66년에는 물품세가 면제되는 실수요 원료에 대한 통관절차 간소화를 재무부에 건의했고 제약기계에 대한 면세규정이 제외돼 원료생산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 이의 철회를 요구하기도 했다.
또 수입원료인 테트라싸이클린의 국내도매가격 재조정을 재무부 국세청에 진정해 시정토록 했다. 67년에는 의약품 중 자양강장제에 대한 물품세 과세의 불합리성을 지적하고 수입통관 업무를 원활하게 하는 등 제약사들의 이익을 위해 동분서주 했다.
한편 60년대를 전후해 종로 4,5가에는 중간도매상과 대형약국이 자리를 잡으면서 전국적인 약국가로 명성을 날리기 시작했다.도매상의 경우 보령약품 새성 신아 동일 경동 등이 소매업을 겸하면서 성황을 이뤘으나 64년을 전후한 시기에 보령약품만 남고 모두 자취를 감췄다.
65년 동아제약이 박카스 디를 발매하면서 국내 유통시장이 도매상에서 직거래 형태로 변했으나 변화에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보령약품이 살아 남을 수 있었던 것은 도·소매를 겸하면서 소매를 강화한 전략 덕분이다.
보령은 약국을 확장하면서 ‘박리다매’로 약국기업화에 성공했다. 이에 자극을 받은 인근의 광장약국 종오약국이 같은 경영방법을 동원했으며 한일사약국 김해약국 독일약국 동원약국 등 20여개 대형약국이 등장하면서 종로5가 약국가의 명성이 이어지게 됐다.
서울은 종로5가 외에도 남대문 시장을 중심으로 구세약업사 모리스약국 신남포약국 등이 유명했는데 이들 약국 들은 도매유통을 강화해 유통의 중심역할을 했다. 얼마나 역량이 있었는지 지방의역류의약품 중 10% 이상이 종로 4,5가와 남대문에서 처리될 정도였다. 그러나 대형약국이라고 해서 모두 ‘떼돈’을 벌었던 것은 아니었다. 69년부터 경기가 하강국면으로 접어 들었으나 과세는 더욱 강화됐다. 이에 이들 약국들은 유명제품은 싸게 팔고 비유명 품목은 ‘바가지’를 씌우면서 소비자를 끌어 들였다.
소형약국 들로부터 ‘난매의 원흉’이라는 비난을 무릅쓰면서도 ‘유명약 싸게, 비유명약 바가지 씌우기’로 대형약국은 명맥을 이어갔다. 이들 대형약국은 종로 남대문 외에도 영등포, 청량리 등으로 상권을 확장하면서 대형약국 하면 약을 싸게 파는 곳이라는 인식을 심어 줬다.


약사수 증가와 경쟁비례


특히 약사수가 급증하면서 약국도 늘어나 이들 약국간의 경쟁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가격경쟁은 약국 뿐만 아니라 제약사 도매 중간도매 등 업종을 가리지 않고 할증 할인 경품부 특매 등으로 이어졌다. 이로인해 개국약사들은 ‘건강의 파수꾼’이라는 의미보다는 ‘장사꾼’이라는 오명을 쓰기도 했다.
그러자 약사회나 의약품판매협회 등은 대형약국의 난매행위를 자제해 줄 것을 요구하고 당국에 시정을 건의하기도 했다. 또 한편으로는 판매협회내에 공동 구매조합을 둬 대형약국이나 도매상의 소매행위에 맞서기도 했으나 판매협회는 자중지난을 겪으면서 해체됐다.


난매로 ‘떼돈’벌어


난매행위는 이후에도 계속돼 약품공업협회 항생물질협회 의약품수출입협회 의약품도매협회 등이 대책위원회를 구성하는 등 분주히 움직였다.
위원회는 불법 도소매 규제, 특혜거래 중지, 할증 할인 지양, 정찰제 실시 필요성 등에 의견 접근을 봤다. 보사부도 이같은 약계 단체의 의견에 적극 동조해 약사법 시행규칙을 개정, 의약품제조업자 및 수출입업자는 판매업자에게 공급하는 의약품마다 생산자판매가격, 수입자판매가격, 도매가격 및 소매가격을 포장지 겉면에  명시하도록 했다.
이에따라 판매업자들은 반드시 해당 가격대로 판매해야 했다. 하지만  이같은 가격준수를 명시한 조항은 그후 불합리 하다는 여론에 따라 법조문에서 삭제되고  포장이나 광고에 소매가격을 삽입하는 것으로 대체됐다.
그러나 이런 조치에도 불구하고 의약품 난매 행위는 여전히 수그러 들지 않아 68년 보사부는 업계 실정을 종합 분석해 난매방지를 위해 재판매가격 유지제도 일명 ‘재판제’를 일부 품목에 적용했다. 면세품이었던 항결핵제 구충제 피임제에 대한 적용방안을 마련해 공포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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