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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년 종근당 FDA공인 쾌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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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 이병구 기자
  • 작성일 : 2007-02-12 08:47:46

외자유치 이합집산 적자생존의 60년대
달러배정 목적 줄서기 각축 속 성장유지
‘종합비타민 만병통치약시대’ 열리기도


1966년 열린 약품공업협회 21회 정기 총회는 350여명에 이르던 회원수가 267명으로 감소되자 이사수도 40명에서 27명으로 줄였다.(제약업체수는 64년 482곳 65년 468곳 66년 349곳으로 감소)
제약업체 수는 이후에도 계속 줄어 들어 67년 305곳 68년 294곳 69년 295곳 70년 286 곳으로 줄어 들었다. 이처럼 업체수가 줄어든 것은 적자생존의 원칙이 적용됐기 때문이다. 또 항생물질협회가 해체될 경우 약공 조직으로 흡수할 수 있도록 관련 정관개정을 이사회에 위임했다. 이와함께 정관 제 13조에 규정한 부서외에 항생약품부를 신설하도록 했는데 항생물질협회 흡수를 전제조건으로 달았다.


항협과 수출입협 갈등
항생물질협회는 지난 57년 ICA자금을 받기 위해 설립됐다. 그러나 대한의약품수출입협회와 달러 배정을 놓고 이견이 끊이지 않았다.
이들은 원료 구입에 더 많은 달러를 배정할 것인가 아니면 완제품 수입에 외자를 많이 배정 하느냐 문제를 놓고 끊임없는 논쟁을 벌였다.
이런 와중에서 제조사들은 약공이라는 단체를 이용할 수 있었으나 수입업자들은 단체가 없어 불리하다고 생각했다.
이에 수입업자의 실력자였던 공익통상의 박순원, 연합약품 김신권, 동양약품 김현철, 백광약품 조성호 등이 당시 약정국장인 정경모, 수급과장 한명수의 후원아래 대한의약품수출입협회를 발족했다.
초대회장인 조성호는 완제수입품에 대한 달러 배정을 늘리는데 주력해 약공과는 상충된 견해를 보였다. 58년에는 박순원이 회장에 올라 70년 물러날 때까지 무리없이 협회를 이끌었다. 그러나 업체간의 갈등을 극복하지 못하고 항생물질협회로 갈라지게 됐다.
항협은 약공 회장단 이거나 역임한 업체들이 중심이 됐다. 항협의 출범은 업계가 사실상 사분오열 된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수출입협회의 창립과는 다른 충격이었다. 항생물질협회의 회원 4사는 당시 제약업을 이끌던 유한양행 동아제약 동양제약 근화약품 등이었다. 이 4개사가 400여 제약업체 앞으로 나오는 AID 자금 1/4을 독차지 했다.


유한 동아가 독식
이에 불만을 품은 약공의 일부 제약사들은 회원사가 약공과 이해관계가 비슷한 단체를 분리시켜 별도로 협회를 조직한 것은 부당하다고 맹렬히 비난하고 나섰다.
항협은 이후 사세를 급속히 불려 종근당 서울약품 한독약품 등이 잇따라 가입, 64년에는 회원사가 무려 59개사로 늘어나 항협 회원사들도 AID자금을 지원 받는 것이 어려워 졌다. 항협은 달러 배정을 놓고 회원간의 말썽이 많았다. 항협은 AID 배정 등 이권을 얻을 수 있다는 이유로 신규가입자에게 100만환씩을 받기도 했다.
또 창립회원이라는 이유로 유한양행 동아제약 동양제약 근화약품 등 4개사는 기득권을 내세우면서 2-3만 달러씩 자금을 분배하고 나머지 회사들에게는 겨우 5,000달러 정도밖에 배정하지 않았다. 이들은 의약품공동판매주식회사를 방계사로 설립해 항생제의 판매가격을 인상 통일 시키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다수 회원사가 반대하자 뜻을 이루지 못하는 등 난항을 거듭했다. 정부의 수출진흥책으로 외화사정이 호전되자 항협은 더 이상 존재가치를 잃었다. 여기에 66년 10여개사가 탈퇴하고 나머지 사들도 회비를 제때 내지 않아 항협은 그해 10월 정기총회에서 조건없는 해체를 선언했다.
이에 약공은 66년 10월 18일 21회 정기총회에서 흡수하기로 결의하고 항생약품부를 신설해 항협의 업무를 이어갔다. 항협 상무이사 경험이 있던 종근당 이종근은 신설된 항생약품부장을 맞아 조직의 원활을 꾀했으며 그해 11월 발족된 한국원료공업협회 부회장도 겸직했다.
업체간의 이해 다툼 속에서도 국내 제약산업은 67년에 들어서면서 대규모 제약사들이 시설을 크게 늘려나갔다. 전체 제조업소의 6.2%에 불과한 19개 제약사가 의약품 생산액의 82%를 차지할 만큼 상위 제약사들의 독점 현상이 두드러 지게 나타났다.


밥대신 비타민먹기도
특히 오랜 전쟁의 상흔에 지친 국민들에게 비타민이 만병통치약으로 인식되면서 제약산업의 발달에 큰 역할을 했다. 이미 6.25 이전에 미국의 구호품목 1호 였던 까닭에 국민들에게 익숙해 졌던 비타민은 밥을 먹지 않아도 비타민만 먹으면 된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따라서 비타민의 수요는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국내사들은 외국의 비타민 수입에서 직접 개발로 눈을 돌렸다. 대한비타민 지달삼과 유한양행 이계숙은 ‘당의 제제 기술’을 공동 개발하는데 성공했다. 당의 문제를 해결한 업계는 소비자들의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미네날이 첨가된 종합비타민 생산에 열을 올렸고 그후 지속성 비타민이나 단미제를 개발하기도 했다.
또 미네랄과 강장제를 추가한 자양강장제를 만들기도 했는데 대표적이 것이 동아제약의 ‘박카스 디’였다. 박카스는 날개 돋친듯 팔려 동아를 부도에서 구해내기도 했으나 반면 카페인의 함량이 지나치게 높아 청소년들이 불면증에 시달리는 부작용이 생기기도 했다. 이에 정부는 카페인양을 50㎎에서 30㎎으로 감량토록 허가 변경했다. 한편 68년은 국내 제약 역사상 매우 중요한 한해로 기록되고 있다.


독일은 불합격 한국은 합격
이종근의 종근당이 항생제 원료인 클로람페니콜의 미FDA 승인을 받았기 때문이다. 당시 FDA는 서독의 한 제약회사가 향정신성 의약품 ‘탈리도마이드’를 개발하고 미국에 수출하기 위해 FDA허가를 요청했으나 이를 반려했다. 유럽에서는 약효가 우수하다고 널리 사용된 제품을  FDA는 문제가 있다고 불합격 처리했다. 얼마후 유럽에서는 이 약을 복용한 수많은 임산부들이 기형아를 출산해 일대 혼란이 일어났다. 이 일을 계기로 FDA 권위와 신뢰도는 세계적으로 입증됐다.
이런 FDA의 허가를 국내 제약사가 받았다는 것은 한마디로 쾌거이며 제약산업 발전의 이정표 였다. 66년 일본도 겨우 1건밖에 승인을 받지 못한 상태였다. 당시 서울대병원 김홍기 박사는 “ 참으로 경하할 만한 일이다. 다른 기술적인 점은 접어 두고라도 함량 미달이다 또는 부작용이 생긴다 해 국산 의약품을 사용하면서도 일말의 불안감을 가져왔던 임상 의학계는 마음 든든한 일이다” 고 평가했다.
수출입협회장 박순원은 “ 의약품 수출에 있어 생약제가 90% 이상을 차지 했는데 종근당이 FDA공인을 받게 됐고 이로 인해 국제 시장에 진출해 다른 나라 약 들과 1:1 경쟁을 벌일 수 있게 된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
세계 각국에 수출이 가능해 질 것이고 다른 제약사도 크게 고무될 것이다” 라고 크게 평가했다. 이후 종근당은 클로람페니콜 시설을 이용해 테트라싸이클린 합성에 성공하는 등 원료 합성과 항생제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종근당이 국내 최고의 제약사로 우뚝서면서 지금까지 그 존재의 우수성을 입증하고 있는 것은 이같은 큰 업적이 밑바탕에 깔려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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