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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5가보령,새 강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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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 이병구 기자
  • 작성일 : 2007-02-12 08:50:02

백광-천도 부도파장 엄청나자
도매협회 전국 지부 결성 역점
업소수 급속증가 ‘춘추전국’ 도래


60년대 초반 까지만 해도 업계를 호령했던 백광약품 흥일 청계 천도약품 부산의 한일약품 등 대규모 도매상이 잇달아 몰락했다.
특히 막강한 조직력과 판매력을 갖고 있었던  백광의 부도는 도매는 물론 약계의 ‘사건 중의 사건’이었다. 68년 백광은 재무구조상 흑자도산을 피할 수 없었다. 제철이나 염소공장에 투자된 자산규모가 모업인 도매업보다 앞서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재고, 외상 미수금만으로도 부채상환이 가능했기에 안타까움을 컸다.
그러나 발행된 어음 결제에 대해 일부 제약업소들이 연기불가를 밀어 붙이자 결국 청산 과정을 밟게 됐다. 이에 따라 관계당국은 약계에 미칠 영향에 대해 크게 우려하면서 주변 인사들로부터 의견을 청취하는 등 수습책 마련에 비상한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백광의 정리는 약계에 많은 아쉬움과 여운을 남겼다.


제약사, 어음 연기 불가


천도약품의 부도는 백광과는 또다른 의미의 파장을 남겼다. 천도약품 조원준은 연희전문 상과를 나온 당시 도매상으로는 드물게 전문경영인 출신으로 20여년의 도매경험과 경영이론을 겸비한 전문 경영인이었으나 결국 부도의 악몽을 극복해 내지 못했다.
조원준은 65년부터 도매협회 회장을 지낸 인물이었지만 회사부도로 회장직도 중도 하차 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도매협회는 침체된 업계에 활력을 불어 넣기 위해 지역단위의 지부결성을 역점사업으로 삼고 중앙의 각 임원진이 각 지역을 돌면서 직접 독려에 나섰다.
그 결과 66년 충남지부(지부장 홍도점) 67년 경북지부(지부장 장영택) 부산경남지부 (지부장 남동식) 서울지부(지부장 허우) 등 4개 지부를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68년에는 경기지부(지부장 김영창) 전남지부 (지부장 김요환)의 구성을 마치면서 전국규모의 세를 규합하는데 성공했다. 이를 바탕으로 도매협회는 제약사들이 일방적으로 제시하는 거래 조건에 대한 제동을 걸었다.
협회는 메어커의 과잉 생산품에 대한 수용문제, 메이커의 직거래 견제책, 적정마진, 메이커의 지방출장소 설치 등 4개 현안을 당면해결 과제로 걸고 회세를 집중했다.
이와함께 67년 5월에는 견문을 넓히고 선진 도매를 견학하기 위해 협회 임원들을 중심으로 20여명의 회원들이 10일간에 걸쳐 일본 의약품유통업계를 돌아보기도 했다. 하지만 이즈음 제약사들은 도매를 통한 유통일원화 보다는 자사 직판체제를 더욱 강화해 나가 도매의 기능은 위축됐다. 제약사가 직판에 눈을 돌린 것은 과다한 판매 간접비를 쓰더라도 이윤이 많이 나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전국을 일일 생활권으로 묶는 수송장비와 교통망의 발달이 제약사 직거래를 더욱 부추겼다. 이에 따라 도매는 교통이 좋고 거래 외형이 큰 거래처는 제약사들에게 다 내주고 외형이 적고 교통이 불편한 변두리 오지 낙도를 찾아 다니는 신세로 전락했다.
이에 뜻있는 도매상들을 중심으로 도매의 주기능은 ‘많이 팔거나 아니면 전혀 팔지 않는 것’인데 이같은 양날의 칼을 효율적으로 활용하지 못한 것에 대한 자성론이 크게 일었다. 이에 메이커의 직거래 즉각 중단 요구보다는 설득으로 유도, 동아제약 직판회사의 견제 실패는 자체역량의 결집력 부족 임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이에 대한 대응책을 논의하는 등 유통업 살리기에 진력했다. 이런 와중에서도 도매상의 수는 급속히 늘어났다. 대형도매상의 부도나 자진정리는 필연적으로 3-4개 도매상의 잉태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제약 직거래로 ‘도매고사’


거목이 하나 쓰러지면 숱한 잔가지들이 생겨나는 것과 마찬가지 였다. 백광 천도 천일 등 그곳에서 수십년간 장기근속한 간부 영업직 임원들은 퇴직금으로 현금대신 재고품을 어느 선의 가액으로 지급받는 경우도 있었으므로 이를 바탕으로 도매상을 차렸다. 66년 전국 도매상 수는 153개 였던 것이 67년 180개 68년 240개 69년 270개 70년대 들어서는 300여 업소로 늘어났다. 도매업소의 증가는 자연히 판매 경쟁으로 이어지고 소매의 중간도매행위, 무허가 브로커의 횡행, 생산업체의 직판 등으로 도매는 사면초가의 위기에 몰리기도 했다. 하지만 도매업소는 더욱 늘어났는데 도매업 허가절차가 너무나 간소했기 때문이다.
즉, 근린생활 시설에서 창고 15평 영업장(사무실포함)10평 도합 25평의 면적만 확보하면 자본금에 관계없이 허가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약 유통의 춘추전국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 시대 도매상 역할을 담당했던 종로 5가에 있는 보령약국은 우리 약업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로 다가온다. 보령약국은 현 보령제약 회장인 김승호가 세웠으나 68년 최건식 현 사장이 등장하면서 크게 성장했다. 최건식은 24살의 나이에 평사원으로 보령약국에 입사한 이래 보령약국 사장, 도매상 보령약품 대표이사의 자리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최건식은 입사 후 재고, 회계 처리 등 엉망인 관리 부분의 체계를 세웠다. 그는 “ 당시 보령약국은 어느 정도 위치에 올라 있었으나 재고나 회계 그리고 판매 등에 있어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제일 먼저 한 것은 이런 허점들을 정리하는 것이었다” 고 당시를 회상했다. 당시 보령약국에는 약사가 2-3명이었고 나머지는 카운터라고 불리는 비약사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이들은 판매는 기본이고 간혹 조제에도 한눈을 팔았으나 그는 비약사의 약조제를 엄격히 금했다. 커운터의 반발이 심했지만 장기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보령약국의 성장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대신 약의 구색을 철저히 맞추고 좋은 약을 대량 사입하는데 치중했다.
보령약국에 가면 없는 약이 없다는 소문이 돌면서 제주도에서 까지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사람들이 두세 줄 씩 길게 늘어서 있을 정도였다. 근처에 종오약국, 건민약국 등이 있었지만 보령의 위세에는 견줄 수 없었다.
그는 “줄 서 있는 사람들이 어떤 약을 사는지 아니면 얼마만큼 살지를 대충은 알 수 있을 정도까지 오자 손님들이 원하는 것을 미리미리 준비할 수 있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사람들이 많다보니 줄 가운데에는 ‘소매치기’들도 있었다. 약을 사는 척 하면서 줄 뒤에서 돈을 훔치는 소매치기를 여러명 적발하기도 한 일화도 있을 만큼 보령약국에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소매치기’를 잡기도


당시는 종근당의 헤모구론 A,동화약품 가스활명수, 동아제약 박카스, 결핵약, 마이신으로 통칭됐던 항생제 등이 잘 팔렸다. “공급보다는 수요가 많았던 시기 였으니 약에 대한 소비자들의 의욕은 대단했어요. 제약사들은 약을 만들기만 하면 파는 것은 문제가 안됐고 지금 생각하면 약국이나 제약사들은 그때가 전성기 였던 것 같아요.”  많이 팔았지만 세무신고는 50% 정도도 하지 않을 때였다고 한다. 그러나 보령은 100% 세무신고를 하면서 신뢰를 쌓았다.
보령이 기반을 잡아 가는 와중에 제약사들은 직판영업을 강화했고 여기에 적응하지 못한 도매상은 연속 부도를 맞았던 것이다. 앞서 말한 백광 천도 청계 약품 등이 그런 회사들인데 보령은 도매에서 소매를 겸하는 전략으로 위기를 극복했다.
최건식의 주도로 위기를 넘긴 보령은 판매전표를 만들고 창구수불카드를 만드는 등 앞선 경영을 선보였다. 최건식은 판매부장 등을 거쳐 현재 매출 200억원의 보령약품 사장과 연 150억원의 매출을 올리는 보령약국의 사장을 할 만큼 보령약국의 성장을 주도한 인물로 기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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