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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년 국산약수출 '함박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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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 이병구 기자
  • 작성일 : 2007-02-12 08:51:46

’현대의약발전기-<56>


제약업, 70~71년 불황늪서 허우적
72년 ‘8?사채동결조치’로 기사회생
유가파동 겪고 고도 성장 발판 마련


70년대 우리의 제약계는 시련과 성장을 동시에 맞본다. 시련은 외적인 요인에 의한 내적인 정책에서 비롯됐다. 정부는 국내 경제의 지속적인 안정 성장을 위해 국제수지의 개선과 물가안정에 주안점을 두는 정책을 폈다.
이에따라 재정 금융 외자유치 등 경제 전반에 걸쳐 긴축정책을 실시, 실물 경제에서는 어느 정도 안정을 찾기도 했다. 하지만 자금의 경색, 투자겭暈位갠오?위축은 피할 수 없었고 제약계도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거래질서확립에 대한 일부 거래선의 반발로 판매는 급속히 위축됐다. 대망의 70년대를 시작하는 70년도의 제약산업은 매우 저조했고 이같은 여파는 연말에 더욱 심했다.


현상유지면 성공
중간도매상의 도산 속출, 재고자산의 증가, 자금회전의 악화 등 악재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듬해인 71년에는 불황의 골이 더욱 깊어만 갔다. 이해에 미국은 자국의 경제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달러의 대폭적인 ‘절상’을 단행했다. 이어 일본이 엔화의 절상을 시행해 전세계에 걸친 경제 불안은 증폭됐다.
이같은 국제기류는  수입원자재의 원가고, 생산과 고용저하, 구매력 상실로 이어져 제약사의 부도와 도산의 원인이 됐다. 이와같은 상황에서 업계가 취한 선택은 고도성장이 아니라 현상유지선에서 안정기조를 다지는 것이었다.
이듬해인 72년에도 혹독한 시련은 계속됐다. 전년도에 이어 계속된 도매상들의 부도여파와 정부가 행한 강력한 약가통제 그리고 수입원료 의약품의 규제(원료의약품의 수입한도액을 전년도 수입실적인 2,200만 달러선으로 한정했다) 가 뒤따랐다.
하반기에 들어 원료약의 수입한도 완화가 이어지고 8.3조치로 제약업계가 다소 활력을 되찾을 수 있었다.
한일약품 등은 이 조치로 기사회생했다. 72년 8.3일 정부는 ‘경제안정과 성장에 관한 대통령 긴급명령’을 공포했다. 일명 ‘사채 동결 조치’라고도 하며 ‘8.3경제 비상조치’라고도 한다.
그 내용은 ‘8.3일 0시를 기해 채무를 진 기업의 사채 변제를 3년 거치 5년 상환한다. 사채이자는 월 1.35%를 넘지 않는다. 각 채무 기업체는 8.9일까지 신고하고 사채권자는 조정사태증권을 발부받는다. 공금리도 인하하고 외국화 환율은 달러당 400원을 유지한다. 공공요금의 인상을 억제하며 물가 상승률을  연 3% 상한선으로 정한다.
기업활동의 정상화와 합리화를 이룩해 경제 성장을 도모하고 민생 수준을 높이고 국력을 배양한다’고 돼 있다. 민주사회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박정희 독재정권하에서나 가능한 기상천외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는 정부가 탄생한 이래 전무후무한 조치였다.
폭압적인 이 조치는 그러나 기업가들에게는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은 존재였다. 많은 기업들이 부도의 공포에서 벗어났다. 단기채무가 장기채무로 전환되고 금리가 인하돼 기업의 지급능력이 개선됐다. 사채이자와 공금리의 인하, 금융비용 감소로 기업 수익과 재무 구조는 크게 개선됐다. 당시 부도 후유증으로 회사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았던 한일약품은 이 조치의 가장 큰 수혜자였다. 한일약품 창업자 우대규는 “ 참으로 아슬아슬한 시기였다.채권자들의 의혹에 찬 눈총, 잠자리에 들어서도 몇번씩 벌떡 잠이 깨어 일어났다.하루 빨리 채무를 갚아 나를 밀어 준 분들에게 추호의 손실도 주지 않게 되기를 기원했다.” 고 당시의 긴박한 상태를 회고했다. 이후 한일약품은 위기를 극복하고 제약업계의 한 축을 당당히 담당했다.  


한일약품 기사회생
그 무렵 유한양행 등 큰 업체들은 예년과 다름없이 항생제 소화제 자양강장제를 생산했다. 그해 업계 성장율은 전년에 비해 겨우 18.7%에 그쳤다. 73년에는 불황의 여파가 더욱 극심했다.
세계적으로 불어닥친 ‘유가파동’의 직격탄을 피해 갈 수 없었다. 미국은 즉시 달러의 평가절하와 주요생산품의 수출금지를 단행해 세계적인 자원파동과 만성적인 국제적 인플레가 초래됐다.
이에따라 국내 제약업계도 주요원자재 수입대상국인 일본에서 제약원료와 일반 화공약품의 제조업체가 공해업체로 지정돼 이스트 머큐롬 산토닌 염산카페인 사카린 아크리놀 글루타민산소다 글리코겐 등이 일시에 품귀현상을 빚기도 했다.
그해 10월에는 이들 품귀품목의 가격이 20-50%나 치솟았다. 이에따라 원부자재를 미처 비축하지 못했던 군소제약사들은 생산에 막대한 지장을 받은 것은 물론 대규모 제약업체도 장기화한 수입원자재난 및 원자재 품귀로 타격을 입었다.
당시 국내 제약업체들은 70% 이상의 원료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으며 그 대부분은 일본에서 들여오고 있었던 만큼 어려움은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중동전쟁을 계기로 산유국들은 유가 감산조치를 취했고 이에따른 여파도 컸다.
유가파동은 전 업종에 걸쳐 검은 그림자를 드리웠고 제약업체들은 40% 정도의 유가부족을 호소했지만 결국 해결점을 찾지 못해 조업단축을 해야하는 상황에까지 오게됐다. 73년은 시련을 겪은 업체들이 기사회생해 고도성장의 발판을 마련한 해로 기록되고 있다.
원자재난 유가파동 가격인하의 아픔을 겪은 제약사들은 정부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이루어진 대외수출경기의 호조와 안정된 환율 특관세의 폐지 등에 힘입어 긴축과 침체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어둡고 지루한 긴 터널을 막 빠져나오게 된 것이다. 제약사들은 경쟁적으로 원료개발에 나섰다.
73년도 말까지 나온 원료의약품개발인허가 수는 50여 품목에 이르렀고 그 가운데 앰피실린 리팜피신 옥시테트라사이클린 헤타실린 에리스로마이신 클로람페니콜 가나마이신 등 원료 합성이 까다로운 품목까지 개발대상에 올랐을 만큼 제약사들이 자신감을 갖기 시작했다.
유한양행 동아제약 영진약품 삼성제약 일동제약 등은 원료합성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원료개발 붐이 일기 시작한 것이다. 업체들은 시설을 확충했다. 8.3조치로 재무 구조가 개선된 이유도 있지만 현대적 시설이 있어야 좋은 의약품을 만들 수 있다는 경영진들의 확고한 신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치료약 양산시대로
경기가 좋아짐에 따라 중견급 제약업체들은 다양한 신제품 개발을 위해 대규모 제약사들은 원료합성을 위해 현대식 시설이 필요했다. 유한양행은 리팜피신 합성공장을 설치하기도 했다. 이처럼 제약업계의 활발한 시설투자 결과 73년 말 신규허가품은 876개 품목으로 전년의 676개에 비해 200품목이나 더 늘어났다. 주목할 만한 것은 품목수의 증가뿐만이 아니다. 늘어난 대부분의 품목이 치료제였다는 점이다. 일반약은 겨우 36종에 불과했다.
치료약에 업계가 치중한 것은 정부의 강력한 원료의약품제한액 책정에 의한 수입제한 그리고 비타민 등 불요불급품에 대한 억제책 때문이었다. 또 국내 경제의 성장으로 조성된 의약품 수요의 변화가 요구한 결과였다.
수출도 비약적으로 늘었다. 70년 500만 달러 71년 600만 달러 72년 800만달러 73년 1,500만달러(한약재 900만달러 인삼제제 60만달러 의약품 500만달러)로 급성장 했다.
73년의 수출액은 목표액의 50%를 초과달성한 것이다. 이는 국내 제약사의 본격적인 해외수출이 열리기 시작한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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