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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으로 약업계도 풍비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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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 이병구 기자
  • 작성일 : 2007-02-12 08:35:13

대부분 제약사들 부산으로 피난...국제시장서 의약품 노점상 활기


정부 수립 2년 후 전쟁이 터졌다. 약사법 제정에 바빴던 약정국이나 제약업 육성을 위해 노심초사 했던 약업계 인사들은 혼란에 빠졌다. 해방 후 군수구호약품으로 시장을 뺏기고 겨우 ICA 자금과 민간자본으로 원료 수입이 근근히 이어지고 있던 때였다.
하지만 의약품의 첫 해외교역으로 한약재만 8,000 달러 어치가 선적 되고 의약품 생산고가 처음으로 집계돼 18억 3,000만원 어치를 기록하기도 하는 등 약업계에 작은 희망의 빛이 보이기도 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강신호, 김준문 먼저 피난
전쟁은 세상을 한 순간에 바꿔놨다. 제약공장은 문을 닫고 약업인들은 숨어 지내거나 피난 가기에 바빴다.
일동제약을 세운 송파 윤용구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 하고 있다. “전쟁은 제약업계의 모든 기능을 마비 시켰다. 이런 와중에 좌·우익의 극심한 대립 속에 좌익계 인사들에 의해 자선당제약의 김일영 사장이 흑석동 자택에서 살해 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보건연맹본부가 작성한 명단에 든 약계 인사들은 A B C D로 등급이 나뉘어 성분을 구분했다.”
동아제약의 설립자 동호 강중희는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사무실에서 밀린 집무를 보다 전쟁 소식을 들었다. 이틀간 서울에 있던 그는 전쟁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당시 서울의대 재학중이던 장남 신호(현 동아제약 회장)와 큰 사위 김준문을 피난시켰다. 회사 걱정으로 남아 있던 그는 서울이 함락되기 전날인 27일 저녁에도 집에 온 처남과 과음을 할 정도로 크게 염려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강대교가 폭파되고 28일 새벽 중앙청에 붉은 깃발이 펄럭이자 중희는 숙취 상태임에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신호와 사위가 무사히 한강을 건넜는지 자신과 나머지 가족 그리고 회사 걱정에 앞이 깜깜했다.
더구나 집이 있는 중학동은 좌익의 거두 박헌영의 본거지가 있는 곳으로 좌익들의 주 활동무대 였다. 우익진영에서 ‘향보단’, ‘민보단’ 단장 까지 지냈던 중희는 암담한 현실에 직면했다.
중희는 당시를 “세상이 뒤바뀐다더니 바로 이런 때를 말하는 구나. 이렇게 될 바에야 재산과 부귀영화가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고 회고하고 있다.


이종근 제약호조 물거품
종근당의 이종근은 외상수금을 위해 6월 27일 호남선 열차표를 예약해 두었으나 표는 휴지조각이 됐다.
당시 이종근은 황원성이 가지고 있던 제약허가증으로 종근당약방 2층에 있던 세탁소가 나가자 그 자리에 제약시설을 갖추고 대광화학연구소를 차려 제약업을 시작했다. 자기자본은 겨우 50만원에 불과 했으므로 부속품대 연고용 튜브대 포장용 지함대 일부 원료값 등으로 250만원을 빌려야 했다. 나머지 돈으로 미국제 연고를 모방해 만든 실질적인 종근당제약 1호 약인 다이아졸 연고의 히트, 2호 제품인 살충제 강신(强新)빈대약이 호조를 보여 이종근은 사업을 크게 늘렸다. 판매망은 서울은 물론 경기 강원 부산 변두리 지역까지 확대됐다.
강중희의 한때 처남이었던 궁부약방에 근무 했던 이규영(李揆英)이 호남 판매책으로 가세하면서 영·호남 지방에 2,000원의 거금이 외상으로 깔렸다. 외상값을 받기 위해 지방나들이를 계획 했던 것이다. 300만원의 자금으로 2,000만원의 외상잔금을 깔아 놓고 1,000여 만원의 시설과 원료를 비축할 정도로 대광화학은 급성장 했지만 전란의 강풍앞에는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동화약품의 보당 윤광렬은 국회가 서울사수 결의 대회로 시민을 속이고 그날밤 몰래 한강 인도교를 폭파했음에도 도강에 성공했다.
성북경찰서 보안과장으로 있던 보당의 보성전문 법과 동창생을 서소문 앞에서 우연히 만나 경찰의 나룻배를 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비가 억수같이 쏟아 지는 가운데서 강을 건너고 이어 오산 평택을 거쳐 부산으로 가는 열차에 몸을 싣었다. 그는 부산에서 9,28 서울 수복 까지 3개월을 피난생활로 보냈다.


보당 경찰 친구도움 ‘도강’
유한양행은 좌익인사들이 회사를 접수하려고 하자 경기도 소사 공장과 본사를 지키기 위해 동분서주 했다.
소사공장에는 백대현 취체역이 종업원 및 약사들과 함께 있었고 본사는 황병규 지배인이 피난을 가지 않은 몇몇 사원들과 함께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본사를 접수하려고 온 사람은 세브란스 제약회사에 있던 사람으로 그는 술을 좋아했다. 그래서 우선 술로 그를 달랬는데 당시 술은 네오톤에 알코올을 타서 주는 정도 였다. 황병규 지배인은 매일같이 찾아오는 그의 호감을 사기 위해 네오톤으로 술을 제조 했다.
그후 그가 이유없이 사망하고 서울이 수복되자 유한은 아무런 재산상의 손해를 보지 않았는데 이는 ‘네오톤’을 탄 술 때문이었다고 ‘유한 50년사’는 밝히고 있다.
전쟁이 혼전을 거듭하면서 서울에 있던 제약사들은 대구 마산 등지에 자리를 잡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부산으로 몰려 들었다.
몇몇 제약사들은 간단한 제약기구로 생산시설을 갖추기도 했지만 낯선 피난지에서 자금난 원료난 기술 부족 등으로 공장을 가동할 엄두를 못냈다. 전국각지에서 몰려든 굶주린 피난민 들과 무질서가 심각한 상황이었으므로 제약사들은 수개월을 지켜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당장 식생활에 곤란을 느낀 약업인들이 하나 둘씩 광복동에 있던 자유시장의 노상에서 판매대를 마련하고 약품을 팔기 시작하자 오래지 않아 약품 노점상들이 늘어서게 됐다.


유한 ‘네오톤’술로 회사 지켜
원래 부산의 국제시장은 피난민들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자유시장이라 불리던 ‘블랙마켓’이었다. 해방 후는 일본에서 돌아온 동포들이 가지고온 물건들의 집산지였고 이후에는 일본의 밀수품을 비롯 마카오 홍콩의 밀수품과 미군이 유출한 군수품으로 유명했던 곳이다.
이곳이 1.4후퇴로 피난민들이 쏟아져 오면서 국제시장으로 이름이 바뀌고 더욱 번창해 지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약품 시장이 가장 활발하게 움직였으며 약업인들이 노점상을 점령할 정도로 전국 약품 집산지로 명성을 떨쳤다. 약업인들은 거의 전부 이곳으로 몰려왔고 밀수약품과 군사물자가 범람했다. 발빠른 일부 약업인은 직접 수입까지 해 톡톡한 재미를 보기도 했다.
이들이 취급했던 품목은 거의  완제품이었지만 군수품 중에는 일부 원료 약품도 섞여 있었다. 심지어 소련 제품까지 나돌아 다녔다. 나중에는 항생제 결핵제 호르몬제 등도 사고 팔았다.
당시 수입대행을 맡았던 곳으로는 이병철의 삼성물산, 이정림의 개풍상사 등 30여 거상 들이었다. 이들은 51년 12월 ‘대한무역약종상협회’를 결성하고 약업계 진출을 시도 했지만 이후 삼성물산을 제외하고는 모두 일반무역업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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