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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난시절 불구 제약 명맥 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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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 이병구 기자
  • 작성일 : 2007-02-12 08:35:56

전쟁 장기화로 군납 의약품 규모 커져
제약사, 지방 제조시설 빌려 생산 박차


제약인들은 전쟁으로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회사를 지키기 위해 갖은 고초를 마다하지 않았다. 장남 신호와 사위 김준만을 먼저 피난시키고 자신은 미쳐 남쪽으로 떠나지 못했던 동아제약 강중희는 내무서원 들에 연행돼 3일간 구금 상태에 있었다. 하지만 해방전 중학동에서 동회장직을 맡은 인연으로 기적적으로 풀려나는 행운을 잡았다. 그는 퇴계원 인근 친지 집으로 피신해 있다 9.28 서울 수복으로 다시 회사로 돌아왔다.
뿔뿔이 흩어졌던 직원들도 3개월 만에 다시 모여 들었다. 하지만 회사는 엉망이었다. 전쟁직전 새로 설치해 미쳐 가동도 해보지 못했던 정제기 2대를 고스란히 탈취당하고 원료로 썼던 알코올과 설탕도 바닥났다. 다행히 산제와 액제 시설은 어느 정도 복구가 가능해 다시 원재료를 확보하는 등 생산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중희, 닛산 트럭 이용 피난


미군과 유엔군의 공격으로 전황이 반전되자 직원들은 잃었던 북쪽의 기반을 다시 회복할 것을 기대하면서 생산시설을 늘리기도 했지만 중공군의 참전으로 1.4 후퇴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희는 이번에는 일찌감치 피난을 서둘렀다. 직원들에게는 동아제약 제품이 눈에 띄면 다시 회사로 찾아오라는 막연한 약속만 하고 고향인 상주로 무작정 떠났다. 중희는 당시를 “일본제 닛산 트럭 한 대에 약간의 가재도구와 당장 생산에 필요한 원료 및 기구 그리고 얼마간의 완제품을 싣고 피난길에 나섰다. 이때가 유난히도 추웠던 51년 1월1일 이었다.”고 회고했다.
경찰 친구의 도움으로 도강에 성공한 동화약품 보당 윤창식은 9.28 수복과 함께 서울로 돌아왔다. 시설물 기계류 등 일부는 사라 졌지만 공장은 원료를 제외하고는 온전한 모습이었다.
보당은 재기의 의욕을 보였으나 그것도 잠시 1.4 후퇴로 다시 피난을 가야 했다. 그는 부산 대신 마산을 택했다. 한 3개월 후 쯤이면 다시 서울이 회복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곳에서 동화는 지인들의 도움으로 공장장 남기준, 보당의 아들 윤광렬 등과 함께 생산을 시작했다.


윤광렬 마산서 생산활동


일동제약 설립자 윤용구는 부친이 한약방을 하는 청주로 피난처를 옮겼다. 용구는 계모 등의 박대에 설움을 겪기도 했지만 ‘동명약국’을 시작하면서 점차 생활의 안정을 찾아갔다. 서울에서 성공한 윤 아무개가 자기 회사 약품을 가지고 와서 직접 조제까지 해 준다는 소문이 멀리 까지 퍼져 초라한 약국이었지만 환자들로 넘쳐 났다. 동상, 설사 ,감기, 홍역, 마마로 고생하는 아이에 이르기 까지 환자들이 많았다.
하지만 용구는 “국민 모두가 전쟁으로 시달리는 판에 이를 기화로 이익을 취한다는 것은 당치 않다” 는 생각으로 가난한 사람에게는 약값 조차 받지 않았다.
용구는 훗날 “약이 귀해 부르는게 값 일 정도인데도 동명약국에서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회고록에 기록하고 있다.
효자동 집 다락방에서 숨어 지내던 종근당 창업자 이종근은 9.28 수복이 되자 곧바로 뛰어나와 막 시작해 자리를 잡은 제약공장을 살폈다. 집기와 원료는 없어지고 일부 약품은 장 모씨가 꺼내 팔았지만 다행히 건물에는 이상이 없었다.
이 회장은 서둘러 대광화학연구소를 재건하고 제약활동에 박차를 가했다. 400만원의 빛을 얻어 와세린, 튜브를 사들여 다이아졸 연고를 생산하기 시작했으나 다시 피난길에 올라야 했다. 종근은 형 종대와 함께 화물열차를 타고 부산에 도착했다.
유한양행은 전란 중에 ‘네오톤’ 덕을 톡톡히 봤다. 네오톤을 이용한 술(본지 35회 참조)로 제약 시설들을 고스란스 지켜낸 유한은 서울이 수복되자 즉시 동상연고를 2차에 걸쳐 군납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재기의 의욕도 잠시 다시 피난길에 올랐는데 이때 백대현 취체역, 홍병규 지배인 고참사원 들은 소사 공장의 제품과 원료, 주요물품을 운반하기 좋게 포장하는 등 회사 살리기에 앞장섰다. 부산으로 자리를 옮긴 유한은 범일동에 소규모 공장을 차리고 삼광제약 공장을 빌려 제품생산을 시작했는데 이는 상당한 양에 이르는 제품 및 원료 수송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유한은 두 공장에서 APC를 찍어내고 포도당 주사를 생산했다.
일양약품을 세운 공명약업사 정형식도 전쟁 초기 피난을 가지 못해 공포에 떨어야 했다. 그는 당분간 약방을 지키기로 하고 가족인 부인 이영자와 두 아들 도언과 영준을 먼저 처가인 충남 아산으로 피신 시켰다.
서울에 있던 그는 국민방위군 종로구 방위군에 소집됐다. 제 25교육대에 배속된 그는 의무반 활동을 하면서 서울 재탈환시 대구를 거쳐 서울로 돌아왔다. 서울은 잿더미 였고 공명약업사 역시 폐허로 변해 있었다.


유한 APC, 포도당 찍어


정형식은 “점포 안에 남겨 두었던 약품들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졌고 빈 포장지와 쓰레기만 너저분하게 널려 있었다” 고 당시를 회고 했다.
한편 피난지 부산의 상황은 혼란 그 자체 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국제시장의 노점상에서 약품 거래가 이뤄지고 제한적이지만 제약원료도 구할 수 있게 되면서 일부 제약사들은 발빠른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다.
동광약품(대표 이계영) 아주약품(대표 김광남) 백수의약(대표 조경규) 등은 남보다 먼저 제약시설을 가동했다. 특히 넘쳐 나는 군인 환자 치료를 위해 의약품의 군납이 아연 활기를 띄었다. 당시 군에서 사용하던 의약품이나 위생용품은 대부분 미국의 원조에 의존 했으나 작전상 긴급을 요하는 약품의 경우, 민간에서 공급 받았다.
특히 전쟁이 장기화 되면서 원조의약품 만으로 환자 치료를 감당할 수 없게 되자 군납의 규모는 점차 커져 갔다. 이를 기회로 제약사들은 지방의 제조시설을 빌려 군납에 열을 올렸는데 이때 번 돈은 서울 환도 후 재건에  요긴하게 이용됐다.
군납업소로 활약했던 주요 제약사들은 고려의약품(대표 내동식) 신흥제약소(대표 유인섭) 신아제약 (대표 양계동) 서울약품 (대표 이광휘) 유인제약(대표 김한규) 아주약품(대표 김광남) 동양제약(대표 이덕휘) 환인제약(대표 신호균) 유한양행(대표 유특한) 계림화학(대표 김근규) 대한비타민(대표 지달삼) 등 이었다.
부산 지역에서 활동한 제약사들은 삼성제약(대표 김종건) 동아제약 (대표 강중희) 종근당제약(대표 이종근) 만유제약(대표 김우섭) 한흥제약(대표 박주영) 신광약품(대표 박철영) 건일제약(대표 정복용) 삼화약품(대표 박용선) 백수의약(대표 조경규) 조흥제약(대표 이환승) 경남약품(대표 김무준) 성광약품(대표 박정근)태극약화학(대표 이성규) 등이 었고 대구 지역에서는 쌍용제약(대표 오영출) 보건제약(대표 허유) 세브란스제약(대표 한기엽)영흥제약(대표 김석만) 등 적지 않은 제약사들이 활동을 시작했다.


제약사 난립, 실적은 미미


51년 제약업체 수는 무려 376개나 됐으며 허가품목 수도 4,209품목에 이를 정도 였으니 피난 시절의 혼란상을 감안하면 그 규모에 놀라움을 감출 수 없다.
하지만 난립한 제약사 수에 비해 연간생산 실적은 지금의 화폐 단위로 1,500만원 정도에 불과했다. 종류별 생산 실적을 보면 51년 처음 생산된 신약(항생제와 호르몬제를 지칭하는 것으로 지금의 신약 개념과는 다르다.)이 785만원으로 40.7%, 그 다음이 주사약 551만원(28.6%) 매약이 409만원(21.2%) 약전약이 183만원(9.5%)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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