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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업자 군납 입지좋은 대구 집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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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 이병구 기자
  • 작성일 : 2007-02-12 08:36:39

약품 품귀로 약업시장 판매경쟁 치열
외제품 전성기불구 국산약개발 온 힘


부산 대구 마산 등 피난지에서도 약업인들은 자신들의 역할에 최선을 다했다. (참고로 생산업자는 주로 대구에 집결했다. 도매업자는 부산에 몰렸는데 이는 정부가 대구 사수를 위해 육군본부를 대구에 두었고 업자들은 자연히 군납 등 입지조건이 좋은 곳을 선택했다.) 이들은 약을 생산하고 공급하고 판매하는 일에 진력했다. 전쟁의 참화가 계속되고 생필품 부족으로 아우성이었지만 약에 대한 집념은 대단했다.


‘불티’와 ‘재’ 들어 가기도


구식 단말 정제기 한 대 만으로도 약 생산을 멈추지 않았다. 어떤 때는 손으로 과립을 만들기도 했다. 건조실의 연료는 숯불이어서 간혹 완제약에 불티와 재가 들어가는 것은 물론 건조판위에 있는 약을 제대로 젓지 않거나 시간이 지체돼 약이 녹고 타버리기도 했다.
정제의 정립(整粒)은 스테아린산을 ‘에칠에텔’에 완전히 용해 시킨 후 과립에 부어 날아가기 전에 손으로 저어 혼합 한 뒤에 타정했으며 타정한 약의 포장은 탁자위에 종이를 펴고 알약을 쏟아 놓고 명함 쪽지로 백 정씩 세서 병에 담는 원시적인 것이었다.
단말 정제기는 모터가 달려 있지 않아 손으로 돌리면서 타정해야 했다. 연고는 무쇠솥에 원료를 붓고 손으로 섞은 다음 충전탱크에 담고 압출 공기로 튜브에 넣었다. 공기는 자전거 펌프를 개조해 넣었고 원료가 굳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계속해서 숯불을 사용했다. 약의 부작용이나 약효를 따질 겨를도 없었다. 활탁제로 사용한 붕산은 심한 부작용으로 사용을 중지해야 했다.
포장재료를 구하는 것도 힘에 겨웠다. 양지(洋紙)는 물론 마분지 조차 귀했다. 어렵게 포장지를 구해도 인쇄 하기가 어려웠다. 중앙관서는 물론 모든 기관과 기업체들의 주문이 몰려 한정된 인쇄소 시설을 이용하기가 벅찼다. 인쇄소의 콧대가 높아 약품 포장지 같은 영세 인쇄물은 거들 떠 보지도 않아 구걸하면서 인쇄 해야 했다.
하지만 만든 약 들은 잘 팔렸다. 약이 귀해 내놓기 무섭게 팔려 나갔다. 따라서 약업 시장의 판매 경쟁은 상상도 못할 만큼 치열했다. 지금도 치열하지만 그 때도 대단했다. 예를 들어 구충제가 하나밖에 없을 당시 ‘피페라진’ 제의 구충제가 나왔는데 무려 19개사가 모방품을 만들어 접전을 벌이기도 했던 것이다.


약 팔다 ‘거부’ ‘거지’속출


53년 길고 지루했던 전쟁이 끝났다. 이즈음(1월 30일) 부산 국제 시장에서 대화재가 발생했다. 4,360 개동에 달하는 점포가 일시에 소실 됐으며 6,800여 가구가 전소돼 피난민들은 알거지가 됐다. 하지만 약품 노점상들은 현대식으로 재건된 건물에서 한 두 평의 점포를 얻어 의약품 판매에 나섰다. 당시는 허가나 등록 없이도 누구나 약을 사고 팔 수 있었다.
국제시장을 중심으로 광복동 대신동 언저리는 약업인들의 총 집결지로 북적댔다. 군수물자 밀수품 등이 넘쳐 났으며 하루 아침에 거부가 된 사람이 나오기도 했고 반대로 약으로 패가망신한 사람이 줄을 이을 만큼 흥망성세가 볼만 했다.
약 수요가 부족하면 바로 수 십배로 약값이 뛰었다. 일부 약품상들은 약을 사재기 하거나 창고에 쌓아놓고 약값을 부풀려 터무니 없는 이익을 얻기도 했다. 항생제 페니실린은 단연 인기 였는데 어느 무역상이 어느 날 부산에 입항한다는 정보를 먼저 입수하느냐에 따라 희비가 엇갈리기도 했다.
이처럼 국제시장 부근은 ‘블랫마켓’, 난매의 중심지 였지만 정부 환도 후에는 약업 시장을 부활하는 중심지 역할을 하기도 했다. 삼성물산 개성상회 천우사 등은 해외무역의 경험을 바탕으로 의약품 수입에 진출했고 이세전의 자유약국(후에 흥일약품 변경) 이동규의 원산약국, 최성철의 평양약국, 김성율의 세명약국 그리고 심정록 박승민 연기식 이규용 김신권 등이 판매업자로 이름을 날렸다.
광복절을 맞아 정부는 돌아왔고 국회도 9월 16일 환도했다. 제약사들은 많은 수가 부산에서 더 머물렀다. 폐허가 된 서울이 정리 되기 까지는 2년여 정도의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판단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부 환도 후 바로 서울에 온 업자들도 있었다.
백광약품(조성호) 연합약품(김신권, 우대규) 흥일약품(이세전) 덕수약품(이상덕) 한양약품(문형용) 한성약품(배인환) 종로약업(한원석) 국제약품(이동규)등 이었다. 이들은 대개 수입약품 도매상으로 위세를 떨쳤다.
당시는 외래약품 전성시대 였으므로 국내 제약업자들을 깔보는 풍조가 있었다. 국산약이 미제 위주의 약에 비해 품질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했지만 도매업자들의 멸시 속에서도 제약사들은 국산약 개발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수입상 국내 제조 얕바


한편 52년 11월에는 부산에서 대한약품공업협회 임시총회가 있었다. 회장은 유한양행의 유특한 부회장은 김근규 이성규 총무부장에는 한흥제약 이환승,사무장에 황도영을 뽑았다.
53년 3월 20일에는 제 8차 정기총회를 열어 회장에 김종건 부회장에 김근규 이덕휘 감사에 강응천 주세환 지달삼을 선출했다. 54년에는 성균관대 강당에서 93명이 참석한 가운에 9회 총회가 열려 회장에 이덕휘 부회장에 강중희 송재원으로 임원을 구성했다.
이때 총회 사회를 보던 김종건은 뇌일혈로 쓰러져 서울대병원에 입원했으나 5일만에 사망했다. 입원중에 열린 대한약사회 창립총회에서 김종건은 회장에 선출됐으나 사망함에 따라 그해 11월 26일 이덕휘 부회장이 회장으로 선출돼 이덕휘는 약공과 약사회를 이끌었다.
약사법이 제정, 공포된 것은 53년 12월 18일이다. 피난시절 약정국장 서리였던 전규방은 부산역에 보관돼 있던 마약 다섯 상자를 군인에게 넘겨 준 책임으로 관직에서 물러난 상태였다.(전규방은 후에 군정시대 약정국장 이었던 양계동 정부 수립 후 약정국장인 이성규 동양제약 이덕휘 사장과 함께 신한합동 제약사를 차려 우리나라 항생물질 1호 허가를 받고 53년 페니실린 연고를 생산했다.)
따라서 약사법 개정은 약정국장 서재식과 그 후임인 정경모, 약무과장 황원성, 사무관 조동렬이 주도했고 업계에서는 김종건이 도왔다. 수급과장 한명수 마약과장 김성익은 황과장과 함께 경성약전 11회 동기생으로 한국약업을 재건하는데 힘썼다.


마침내 약사제도 기틀


약정법 의약품법 약무행정법 등의 명칭 논란이 있었던 약사법은 12월 18일 법률 제 300호로 이날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약사법의 골자는 약사에 관한 정의와 범위,일제식 이름인 약제사 대신 약사, 민주 약무행정 도모,약사 법정단체 구성,약품의 품질과 순도를 마련하기 위한 대한약전 제정,조악한 약품 출현의 방지와 과대 선정의 피해를 막기 위한 불량품과 부정행위의 한계, 과대 광고 범위 규정 등이었다.
약사법이 제정됨에 따라 비로소 약사제도의 기틀이 잡히기 시작했다. 이 당시의 약 생산액,약사수, 약국 등 판매업소 수는 별표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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