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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후 구호의약품 약업계 큰 힘

  • 고유번호 : 901
  • 작성자 : 이병구 기자
  • 작성일 : 2007-02-12 08:37:18

국내시장서 국산약 밀리는 부작용 초래
ICA자금 배정으로 제약계 기사회생


전쟁으로 파괴된 약업계에 힘을 준 것은 ICA,CRIK,FOA 등 외국의 경제 구조 기관들 이었다. 이들 단체는 구호의약품을 보내 오거나 완제의약품을 수입 할 수 있도록 달러를 지원하는 등 물심 양면의 노력을 기울였다.
휴전 이듬해인 54년에는 CRIK가 의약품 85만7,639억 달러 어치를 지원했고 55년에는 FOA가 18만 2,552 달러에 이르는 구호의약품을 보내왔다. 제약사들은 또 FOA 자금 100만 4,326 달러로 완제의약품과 원료의약품을 수입했다. 56년에는 ICA가 19만 4,371 달러 상당을 완제의약품으로 지원했고 업자들은 지원단체의 자금을 이용해 458만 1,151 달러의 완제약과 66만 4,374 달러 의 구호약을 들여왔다.
57년 부터는 직접 약을 지급하는 대신 ICA 자금을 배정해 이 원조금으로 완제약 336만 659 달러와 원료약 123만 6,038 달러 어치를 수입했다. 이처럼 경제 구조 기관들의 도움은 피폐된 국내 약업계에 숨통을 띄워 주는 구실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우리 제약산업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 의약품시장에서 국산약은 고개를 들지 못하는 부작용으로 나타났다는 일부의 지적도 있었다.)
55년 7월 부터 모든 경제 지원을 ICA로 국한 하도록 했는데 이는 한국 정부의 요청에 의해 이루어 진 것이다. 당시 이 자금의 배정은 부흥부가 주관이 돼 경제조정위원회와 기획처의 심의를 거쳐 한국은행에서 불하하는 형식을 취했다. 보사부는 주무부서로 추천 업무만 했으나 수입완제약의 범람으로 막대한 외화가 소비되고 있어 이 자금의 추천은 항생제 시설 등 주요 생산 시설자금에 국한됐다.


업계 새로운 강자 ‘부상’


그해 1차 배정에 참가한 제약사는 많았으나 유한양행 15만달러, 동양제약 근화약품 동아제약 8만 달러, 서울약품이 7만5,000달러 등 5개사에만 46만 5,000 달러가 배정됐다. 56년에는 대한비타민 태양제약 범양약화학 신아제약 57년 유한양행 동아제약 유유산업 합동화학 58년 건일약품이 배정을 받는 행운을 잡았다. 이 자금으로 제약사들은 파괴된 공장과 시설을 복구했다.  또 주사약 시설을 비롯한 항생물질 소분제제기 정제시설 건조시설 공기조절기 자동바이알 세병시설 연고충전기 무균시설 등 기계와 시설을 미국이나 서독 등에서 들여오기도 했다. 새로운 기계의 도입은 국산약 생산이 본격화 되는 계기가 됐다.
자금을 받은 업체들은 잇따라 항생제를 소분 시판하고 신약을 선보이며 국내 약품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이들 발빠른 업체들은 과거의 명성과는 상관없이 약업시장의 새로운 강자로 부상했다. 이 와중에서 소외된 업체도 있었는데 동화약품이 대표적이었다. 동화는 당시 60년의 전통을 자랑하며 ICA 자금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었지만 보당 윤창식 사장은 “ 민족 기업의 긍지는 순수 민족 자본으로 재건 될 때만 지킬 수 있다” 며 남의 힘을 빌어 쉽게 성공하는 것은 동화의 길이 아니라는 판단을 내렸다.
어쨋든 55년에 유한양행은 이 자금을 이용, 6년간에 걸쳐 대방동 사옥을 개축했다. 56년에는 삼일제약이 개축했고 범양약화학이 증축했다. 57년에는 종근당 동아제약이 사옥을 신축했고 이어 동양제약이 증축 59년에는 한독약품 유유산업 대한비타민이 60년에는 동성제약이 이 자금을 이용 건물을 세울 수 있었다.


60년 전통 동화 ‘소외’


ICA 자금은 10년 상환 조건에 파격적인 저리 융자 였으며 한국정부가 배정액에 비례해 산업은행을 통해 운영자금을 융자해 주었고 환시세가 나날히 인상 됐기 때문에 일단 배정만 받으면 큰 이득을 볼 수 있었으므로 당시 제약사들은 이 자금을 받기 위해 치열한 로비전을 펼쳤다.
ICA 배정이 제약사 경영에 가장 핵심적인 요소로 떠오른 것이다. 따라서 공정성과 객관성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상이군경회나 각종 단체 등이 낙찰 시키기도 하는 등 변칙적인 폐단이 일어나기도 해 제약업자들은 배당업무를 대한약품공업협회에서 관장해 줄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에 약공이 배당에 참여 하기도 했으나 공정성 논란은 계속됐다. 계속된 갈등으로 57년에는 원료 구입에 많은 자금을 요구하는 한국항생물질협회와 완제약 수입의 비중을 높여야 한다는 대한의약품수출입협회가 분리, 발족 되는 우려곡절을 겪기도 했다. 항생물질협회는 유한양행 동양제약 동아제약 근화약품 등 4개사가 중심이 돼 별도로 만든 단체였다.


서로 차지하려 ‘다퉈’


ICA 자금을 좀더 배정 받기 위한 당시 제약업계의 이해관계에서 파생된 것이다. 이에 그동안 ICA 자금의 배정권을 쥐고 있던 대한약품공업협회에서 이 문제를 그대로 넘기지 않고 그해 10월 이사회에서 심도있게 따졌다. 항협(抗協)의 주요 멤버에 약공회장단도 포함돼 있었기 때문이다.  
이사회는 결국 이덕휘회장 강중희 송재원 전규방 부회장 등 전회장단의 사표를 받아 이덕휘 강중희의 사표를 수리하고 나머지 2명의 부회장 사표는 반려 하는 등 파문을 남겼다. 이후 약공은 그해 한 달 후인 11월 16일 임시총회를 소집, 회장에 전규방 부회장 송재원 박철영 고희익을 선출하고 감사 이사를 전원 유임시키는 홍역을 치렀다. 이보다 앞서 57년 5월 13일에는 대한의약품수출입협회가 창립됐다. 수협의 창립은 ICA 자금을 원료 구입에 더 많이 받아야 하느냐 아니면 완제품 수입에 더 사용하느냐 하는 문제와 연결됐다. 제조업자는 약공을 통해 자금을 받을 수 있었지만 수입업자들은 배정을 받을 수 없어 수입업자 들이 모여 단체를 만든 것이다.
주동이 된 당시 수입업소는 공익통상(박순원) 연합약품 (김신권) 동양약품( 김현철) 백광약품(조성호) 등이다. 수협의 초대회장은 조성호가 맡았고 1년 후 58년 1월 박순원이 회장에 선출되면서 활동은 본격화 됐다. 수협은 성격상 약공과 정반대의 주장을 해야 했기 때문에 상호 견제가 심했다. 하지만 약정당국은 수협의 창립을 찬성했다.
한편 ICA자금이 들어온 56년 이후부터 국내 제약사들의 생산이 본격화 됐다. 외국원조가 국내 제약산업의 발전을 저해 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외국자본이 국내 제약산업의 숨통을 터준 것이 분명하다 . 완제 수입위주에서 국내 생산약으로 대체됐기 때문이다. 원료 및 완제약 수입 추이를 보면 이같은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다. 완제약의 수입실적은 56년 531만달러에서 57년 436만달러 58년 302만 달러 59년 312만 달러 60년 278만 달러 등 계속 하향 추세를 보였다.
반면 원료 수입은 56년 66만 달러 57년 139만 달러 58년 264만달러 59년 215만 달러 60년 245만 달러 등으로 늘어 났다. 원료 수입이 늘어난 것은 그만큼 국내 생산이 비례해 증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같은 상황은 제조업소수와 생산추이에서도 여실히 나타난다. <표 참조>
58년에는 약사법 제정에 따라 대한약전이 보건사회부 고시로 제정 공포 될 무렵 이었으므로 약전약의 생산은 물론 항생물질의 국산화 정제 캅셀제 등 고형제 수액제 기술이 국산화 됐다. 일부 제제는 국내서 얻어지는 약용식물을 통해 원료약을 국내 조달하기도 했다. 원료 생산 업체는 서울약품공업주식회사(54년10월 건조효모와 간유 원료생산 허가) 이연합성약품공업주식회사(58년 11월 염산메칠에페르린분말 허가) 제일물산주식회사(59년 4월 약용효모허가) 서울약품(59년 9월 디아스다제 허가) 경주박하 회사(59년 12월 박하뇌 및 박하유 허가) 등이다. 미미하지만 일부 제약사는 의약품 수출도 했는데 주로 한약재 약전약 등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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