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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전이후 제약사 속속 서울 재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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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 이병구 기자
  • 작성일 : 2007-02-12 08:38:08

유한.종근당.동화등 공장복구 생산박차
동아, ICA자금으로 거대 제약사 발판


54년 6월 동아제약은 부산 공장을 청산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환도 후 동아는 ICA 자금 지원으로 거대 제약사의 발판을 굳히기 시작했다.
8만 달러를 배정받은 동아는 새로운 시설을 확충하기 위해 중학동 공장으로는 부족함을 느껴 새로운 공장 건설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또 항생제 생산을 위해 항생물질 소분 제제기와 연고충진기를 도입하기로 하고 당시 무역중개상 들의 집합소 였던 반도호텔을 출입하면서 정보를 수집했다.


‘반도호텔’ 무역상 집합소


이 과정에서 독일 리커만 사에 발주를 맡겼고 원료 도입선으로 미국 스퀴브 사와 손을 잡았다. 스퀴브는 ‘페니실린’의 종주 메이커로 이재지( 李哉之)라는 중국인을 통해 삼미양행이라는 이름으로 반도호텔에 대리점을 설치하고 있었다. 이재지는 전쟁때부터 부산에서 홍콩을 왕래 하면서 의약품 보따리 무역상으로 치부했으며 스퀴브 뿐만 아니라 머크사의 대리점도 맡고 있었다.
강중희는  머크와도 손을 잡고 본격적인 항생제 등 생산에 전력을 기울였다. 여기에는 ICA 자금이 큰 도움이 됐다. 동아는 56년에도 ICA 자금 대상 업체로 선정됐으나 여론을 의식한 당국의 눈치로 더 이상 이 자금을 받지 못했다. 대신 ‘피마자’유 생산 시설을 위한 배정액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이 자금을 통해 유지사업에 매달리기도 했다. 동아와 강중희에게 가장 바쁘고 중요한 시절이었다.
53년 미국에서 돌아온 유일한을 맞은 유한은 서울 본사와 소사공장의 수리 및 시설확충과 원료 확보를 위해 자본금 75만원에 2억원을 증자해 총자본금 2억 75만원으로 새출발을 시작했다.
부산피난 시절 군납으로 명성을 이어갔던 유한은 환도 후에도 ‘네오톤’ 등으로 군납을 성실히 이행하는 한편 유특한 사장이 유한산업주식회사의 자본과 운영권을 쥐는 전환점을 맞았다. 유일한 회장은 회장과 사장직을 겸임했다.
유한의 소사공장은 당시에는 보기 드문 튼튼한 벽돌로 세워져 전화에 휩쓸렸어도 쓰러지지 않고 그 골격을 보존하고 있었다. 유한의 관계자들은 소사공장의 건재를 보면서 “마치 폐허 위에 우뚝서 있는 불사조와 같은 모습” 이라고 회고 하기도 했다.


“폐허위의 불사조”


53년 1월 부산 국제시장의 큰 화재에 이어 12월에는 용두산 난민 바라크에 대형 화재가 발생했다. 큰 불은 아주 삽시간에 모든 것을 삼켜 버렸다. 이제나 저제나 서울 환도를 엿보고 부산에 남아 있던 종근당의 공장이 그야말로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다. 다행히 불은 건물로 옮겨 지기 직전 잡혔다. 이종근은 “나는 지금도 당시의 위험천만 했던 용두산 화재 사건을 상상해 본다. 더구나 첫 아들 장한이를 업고 겁에 질려 애태우던 아내의 애절한 마음을 지금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고 술회하고 있다.
55년이 되자 부산은 썰렁해 졌고 종근당은 더 이상 환도를 미룰 수 없었다. 부산을 중심으로 울산 경주 대구 김천 대전 조치원 청주 천안 수원 안양 등을 돌며 외판에 치중했던 이종근은 형 종대와 함께 충정로 3가에 350 만환을 주고 2층짜리 목조건물을 인수,제약공장을 세웠다. 그해 10월 4년만에 서울로 돌아오는 이종근의 감회는 남달랐다. 부산역 광장에 쌓여 있는 산더미 같은 이사짐을 보면서 “하면 된다는 강한 신념과 투지가 솟았다” 고 회상했다. 종근의 이런 신념은 종근당약국이 총자산 6,000만환으로 성장하는 결정적인 바탕이 됐다.
마산에 있던 동화는 55년 7월 서울로 돌아왔다. 폐허가 된 중구 순화동 공장을 복구하고 본격적인 생산을 서둘러 활명수 자해로 팔선단 순경환 설태고 치통수 옥도정기 마기소루 통이액 우황청심원 상사향소합원을 새로 발매했다.
이같은 활발한 활동으로 동화의 그해 매출액은 857만 3,340 환에 달해 전년대비 322% 초과달성하는 놀라운 저력을 보였다. 민족기업의 자존심으로 ICA 자금을 받지 못했던 서운함을 일거에 날려 버린 것이다.


‘사치품’ 반대 심해


대웅제약의 전신인 대한비타민은 56년 ICA자금 5만달러로 비타민생산용 최신 설비를 서독으로부터 도입했다. 당시 대한비타민이 신청한 ICA자금 용도는 비타민 설비. 이에 경쟁 업체들은 비타민은 사치품으로 자금 배정은 부당하다고 반대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ICA 집행관으로 활약했던 라자루스씨는 비타민은 사치품이 아니라는 이유로 배당금을 확정했다. 대한비타민은 “아직 까지도 라자루스씨의 사심없는 공정한 자금 배당은 약업계에 고맙고 흐뭇한 일로 남아 있다”고 기록할 만큼 이 자금은 대한비타민을 도약하게 하는 원동력이 됐다.
이기석 전무가 회사 경영에 가담하면서 본격적인 제약사 면모를 갖춘 중외제약 전신 대한중외제약주식회사는 54년 3월 일본 쥬가이 제약이 개설했던 경성지점 공장 옛터에 공장을 재건했다. 성실근면 친절응대 규율엄수 융화단결 신속정확을 사훈으로 정하고 매출 확대에 박차를 가했다. 57년 뒤늦게 ICA자금 1만달러를 받은 중외는 원료 도입으로 순탄한 수액제 주사제 생산을 이어갈 수 있었다.
일양약품은 55년 ‘주사제 전문메이커인 경성신약사’와 GAM 겔 총판 대리점 계약을 체결 했다. 갬은 수산화알미늄겔 500그람으로 일반대중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제품. 정형식은 그러나 갬 판매로 약업인의 기반을 한층 강화하기로 하고 시중 약국에 골고루로 깔았다. 그러나 판매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200만환이라는 막대한 부채만 지게 됐다. 형식은 눈물로 세월을 보내면서 재기의 의지를 불태웠다.


조악한 상품 배척, 난매방지


제약인들이 전쟁의 폐허 위에서 힘찬 시동을 거는 의욕을 보일 즈음 부산을 축으로 박주형 오학섭 김동호 등 부산지역 생산업자와 도매 업계를 대표한 한응국은 53년 겨울, 약업 질서 회복을 위한 자율모임체조직을 결성했다.
서울의 생산업자 대표는 유한양행, 동양제약, 동아제약, 환인제약, 신광제약, 근화항생, 삼화제약, 삼일제약, 중외제약, 아주제약, 경성제약, 동화제약 등이고 부산의 생산자 대표는 오학섭, 박주형, 김동호, 한응국, 서울의 도매업자 대표는 백광약품, 한성약품, 한양약품, 삼창약품, 범양약품, 종로약품, 청계약품, 구세약품, 연합약품, 흥일약품 등이었다. 이들은 동대문구 전농동에 있는 동양 제약소에서 회동, ‘대한의약품진흥회’를 발족했다.
진흥회의 발족은 일부 몰지각한 생산자의 조악한 상품생산, 터무니 없는 난매를 방지 하자는데 공감대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일부 제약사에서 이런 문제가 터져나와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다.
제약사들은 전국 교통망을 이용, 영업망을 확충하는 한편 생산 판매 수금 등 1인 3역의 역할을 해 도매업자와 판매 경쟁이 치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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