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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규, 신종 마케팅기법 돋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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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 이병구 기자
  • 작성일 : 2007-02-12 08:38:59

버스.삐라.경품권증정 등 다양한 판촉활동
염색약 등 일본 인기상품 들여와 국내 히트


이선규(李善珪)는 충남 아산 둔포 출신이다. 1924년 태어난 그는 열 여섯 어린 나이에 서울로 올라왔다. 그 이전에 그는 온천으로 유명한 온양에서 인쇄소 문방구 지물 장사 등을 통해 돈을 벌었다. 장사꾼 ‘끼’는 타고난 것이었다.
돈이 모이면 그는 서울에서 은단 장사를 하는 외사촌 형 조규철에게 보냈다. 당시 조규철은 ‘고려은단’이라는 상호를 걸고 은단을 팔고 있었다. 하지만 사업은 신통치 못해 늘 빚에 쪼들렸다. 조규철은 어린 선규에게 지원을 부탁했고 그때마다 그는 아무런 불평없이 형을 위해 돈을 보냈다.
어느 날 규철은 선규에서 서울에 올 것을 요구했다. 선규는 고려은단에 입사했다. “가 보니 회사는 엉망이었어요. 온통 빚 투성이 였고 내가 오야 채권자 였어요. 그래서 상무 자리를 차고 앉아 본격적인 업무를 시작 했지요.”
은단은 만들었지만 재고는 쌓여만 갔다. 선규는 여기서 기가 막힌 신종 마케팅 기법을 선보인다. 당시 청량리에서 마포가 종점인 버스가 있었다. 그는 무작정 버스에 올라타서 손님들에게 외쳤다.


‘마포종점’구성지게 불러


‘문화인의 상비약, 은단을 자시라. 여성의 핸드백에도 은단’ 그는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당시 은단 값은 10원으로 비교적 비싼 편이었다. 이 방법은 효과적이었다. 그러나 다른 사원들은 창피하다고 이같은 영업을 피했다. 선규는 시범을 보였다. 그리고 매출은 늘어났다.
그는 여기서 또 한번 사업 수완을 발휘한다. 단순히 ‘은단사쇼’라고 하는 영업 방식은 매출에 한계가 있었으므로 새로운 방식을 도입 하기로 했다. 그만의 독특한 아이디어 였다. 한 번은 한 신사분이 “이봐 청년, 마포종점 노래나 불러 그러면 내 은단을 다 사주지.” 하는 뜻밖의 제의를 받는다. 순간 그는 부끄러워 어쩔 줄 몰랐다고 한다.
그러나 다 사준다는 말에 용기내 ‘밤깊은 마포종점 갈곳없는 밤전차, 비어젖어 너도 섰고 갈곳없는 나도섰다’ 가락에 맞춰 노래를 불렀고 다른 손님들도 박수를 치면서 좋아했다.(이선규의 노래 솜씨는 수준급이다. 동성제약이 승승장구 할 수 있었던 밑바탕인 염색약의 광고카피인 ‘아름다운 갈색 머리’ 하는 멜로디도 그가 만들었다.)
다음부터 그는 은단 ‘어쩌구저쩌구’ 하는 말 대신 마포종점 노래를 신나게 불러 재켰다. 하루 종일 마포종점만 부르다 보니  炷?쉬고 입술이 불어 터지기도 했다. 대신 은단 매출은 늘어만 갔다. 선규의 실적이 높아만 지자 다른 영업사원 들도 창피함을 무릅쓰고 이를 따라 하기 시작했다.
선규는 이 방식에 실증을 냈다. 남들이 하는 것은 이제 한물 갔다고 판단했다. 그는 거금을 투자해 세기항공의 세스나기를 빌렸다. 그리고 서울 상공을 날아 다니며 삐라를 뿌렸다. 삐라에는 은단 세알을 붙였는데 사람들은 삐라에 붙은 은단을 떼먹기 위해 구름처럼 몰려 들었다.
서울 뿐만 아니라 부산 인천 광주 대구 울산 목포 등을 돌며 마구 뿌렸다. 한 번은 부산상공에서 수 만장의 삐라를 뿌렸는데 갑자기 바람의 방향이 바뀌면서 해운대 앞바다에 빠져 비용만 들인 일도 있었다.


돈 벼락, 즐거운 비명


창경원 경품 판매도 잊을 수 없다. 그는 사람이 많이 모이는 창경원에 간이 매표소 비슷한 가건물 속에서 자건거 재봉틀 라디오 탁상시계 손전등 만년필 연필 공책 등 경품을 쌓아 놓고 은단 하나 사면 경품권 한 장을 줬다. 경품은 즉석에서 확인이 가능한 일회용이었다. 사람들은 은단보다는 경품에 눈이 어두워 줄을 서서 은단을 샀다. 얼마나 장사가 잘 됐는지 어느 날은 돈이 걸려 가판대 문을 열 수 없을 정도였다. 억지로 문을 열고 들어가니 돈이 가슴팍 까지 차 있었다. 자루에 쑤여 넣고 어깨에 메고 오는데 제법 묵직 했으니 돈의 규모가 얼마인지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선규의 영업재능은 이제 업계에서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심지어 동아제약 강중희는 그를 전무로 스카우트 하겠다는 제의를 하기도 했다.
궁부약방(동아제약 전신)으로 고물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약을 떼러 가던 일(선규는 자전거 영업 당시 궁부약방의 직원이었던 강중희로부터 마진이 엄청난 금계랍과 사카린 등을 넘겨 받아 판매했다. 인기가 좋았던 금계랍을 오원에 받아 오십원에 팔았다. 당시 광목 한 통에 이 원 하던 때 였으니 선규는 곧 큰 돈을 벌 수 있었다.)을 생각하면 자신이 생각해도 참으로 대견 스러웠다.
그러나 그는 강중희의 이런 제의를 정중하게 거절하면서 그의 호의를 평생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남이 하는 것을 쫓아 하면 잘 해야 2등 이라면서 언제나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개발하려 했다.
독학으로 일본어를 배운 그는 혼자 일본을 들락날락 할 정도였다. 한 번은 일본의 모리시다 인단사를 몰래 방문해 그곳에서 ‘강력인단’을 만들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해 일본보다 ‘정력은단’을 먼저 출시하는 발빠른 움직임도 보일 만큼 상술에는 동물적 감각의 소유자 였다.
고려은단의 재무구조는 나날히 좋아졌다. 매출은 늘고 회사는 안정을 찾아갔다. 어려울 때는 힘을 합치다가도 잘되면 찢어지는 것이 한국적 풍토라는 말이 있듯이 선규는 자신이 다 망가진 고려은단을 살려 냈지만 이제는 떠나야 할 때라는 것을 알았다. 사장 상무 감사 공장장 등이 모두 조규철 파 였기 때문이다. 선규는 신촌에 있던 조그만 건물을 받고 주식 전액을 미련없이 넘겼다.
그는 새로운 일거리를 찾았다. 마침 네명이 공동 운영하던 동성제약이 부도직전에 있다는 말을 듣고 헐값으로 사들였다. 그때가 57년이었다. 동성제약에서는 염색약이 있었다. 당시 염색약은 물에 끊여 사용해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물에 타는 염색약 이었고 이것은 사용의 간편성 때문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양귀비’ 1호는 이렇게 해서 나왔다.
선규는 염색약을 가방 가득 넣어 가지고 동대문 서대문 등 서울 지역은 물론 대구 광주 여수 등 전국을 돌면서 판매했다. 그때는 고학생 들도 많아서 이들은 껌을 팔아서 학비를 대던 시절이었다.


57년 ‘동성’ 설립


선규는 이런 학생들을 영업에 동원했다. 염색약을 나눠주고 다 팔아오면 얼마씩 떼어주는 조건이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돈을 세는데 몇 시간이 걸릴 정도였다. 학생들이 가져온 10원 짜리 지전을 가방(네이손 박스)에 아무렇게나 넣어 놓고 집에 와서 세는데 어떤 때는 새벽 2~3시 까지 계산했다.”  소문이 나면서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동성제약으로 찾아 오기도 했다. 많을 때는 400 여명의 학생들이 염색약을 들고 다니면서 판매했다. 돈은 다음날 바로 서대문 은행에 예치했다.
‘훼미린’도 일본에서 힌트를 얻었다. 일본에 갈 일이 있었는데 그곳에서는 갈색머리가 대 유행이었다. 여자들은 너나 없이 브라운 색으로 머리를 염색했다.
귀국해서 바로 ‘아름다운 갈색머리’ 라는 광고카피를 통해 대대적인 광고를 했다. 모두 다 반대 했지만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동성의 간판 ‘정로환’도 선규가 일본에서 보고 배워서 만든 순전히 그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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