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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경영법 보령제약 도약 발판

  • 고유번호 : 907
  • 작성자 : 이병구 기자
  • 작성일 : 2007-02-12 08:39:53

전표제 실시.서비스 차별화로  성장가도
63년 ‘동영’인수 APC정등 선보이며 두각


보령제약 창업주 김승호(金昇浩)는 충남 보령 웅천 대창리 출신이다. 웅천국민학교를 졸업한 그는 진학을 위해 상경을 결심한다. 문전옥답을 양조장에 투자했다 실패해 가세는 기울었지만 학업을 위한 소년 승호의 열기는 막을 수 없었다. 승호는 숭문학교에 입학했다. 승호가 숭문에 입학 할 수 있었던 것은 종로 6가에서 ‘홍성약국’을 운영하고 있던 사촌형 인호의 영향이 컸다.
홍성약국을 드나들면서 승호는 자연히 약에 호기심을 갖게 됐다. (그 이전에도 승호는 터울 차이가 컸던 형 영제가 흐트러진 가세를 수습하고 ‘대창약방’을 운영하고 있어 약에 대한 인연이 있었다.) 승호가 약업인의 길을 걷게 되는 과정은 이렇게 시작됐다. 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던 바로 그해 승호는 19살의 나이로 숭문학교를 졸업한다.


‘웅천’시골 출신의 꿈
그는 학병을 자원 입대해 간단한 훈련을 마치고 전선에 투입됐다. 남다른 지도력을 인정받은 그는 조교 생활을 거쳐 갑종간부로 임관해 57년 중위로 제대했다.
그는 제대 후 바로 홍성약국을 찾았고 여기서 당시 약업계 사정에 정통했던 집안 매형 김선기의 도움으로 약국을 세웠다. 집을 판 300 만환이 종잣돈이었다.
어느 날 종로 5가를 거닐던 그는  낡은 건물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약국 입지 조건으로는 최적이라고 생각했다. 종로 5가 보령약국이 자리 잡은 곳은 1905년 배우개장을 확장해 세워진 동대문 시장 근처였다.
이 시장은 초기에는 농산물 거래가 주종을 이뤘으나 차츰 포목 양장 양품으로 바뀌다 한약재 거래장소로 이용돼 대구의 약령 시장과 함께 한약재 도매시장으로 명성을 날렸다.
57년 10월 1일 승호는 자신의 약국 앞에서 넘치는 희열을 만끽했다. 승호가 기업가로 원대한 포부를 펼쳐가는데는 부인의 내조가 컸다. 당시 승호는 결혼한지 일년째 되는 신혼 이었지만 신혼의 단꿈에 젖어 있을 시간이 없었다. 부인 박민엽은 밥을 머리에 이고 약국까지 날라다 주는 고된일을 하면서도 남편일을 열성으로 도왔다. 장부정리와 재고를 파악하는 일도 부인의 몫이 었다. 훗날 승호는  부인의 이런 헌신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보령제약이 있었다고 회고 하고 있다.


‘보령약국’이 시초
당시 전국에는 약종상과 한약종상 그리고 매약상이 6,877개소에 달했으나 약국은 겨우 1,177개에 불과했다. 약국수가 적은 것은 약사들이 개업을 기피했고 대우가 좋은 제약사나 대형 도매상에 취업하기를 선호했기 때문이다.
또  유통시장의 여건이 좋지 않았고 소매약국의 미래가 어두 웠다.  즉, 당시 도매상은 메이커의 생산가격에 유통비용과 이윤을 붙여 파는 것이 아니고 생산 가격으로 납품 받아 판매하고 유통비용과 이윤은 나중에 메이커로부터 받아내는 방식을 택해 소매약국들은 가격 경쟁을 벌일 처지가 못됐다.
이에 승호는 적정가격 판매, 서비스 강화, 상품 구색 갖추기 등으로 도매상 들과 경쟁해 나갔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특매 제도는 마진이 100%를 넘는 것이 허다했다. 승호는 마진을 조금 보더라도 약을 싸게 팔아 소비자들의 신뢰를 얻었다.
보령약국에서 약을 살 경우 교통비, 점심값을 제외하고도 싸다는 소문이 일자 미아리나 불광동 지역에서도 단골이 생겨났다.
승호의 싼 약국, 어떤 약이든 살 수 있는 곳, 친절한 약국의 모토는 소비자들에게 각인되면서 보령약국의 일취월장 성장의 가도를 달렸다.
사세를 확고히 갖출 즈음 승호에게 또 한번의 기회가 찾아왔다. 그것은 대형 도매상들의 퇴조 였다. 수입의약품을 주로 팔던 도매상들은 정부의 국산의약품 장려 정책에 따라 몰락하고 새로운 판로를 개척하던 제약사들은 소매 약국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보령약국 앞에는 인파들로 넘쳐났다. 말 그대로 문전성시 였다. 환자들은 약을 한 보따리씩 사갔으며 동대문 시장을 왔던 지방 상인들도 보령약국에 들러 약을 산 후 지방으로 내려갔다. 각 터미널에는 보령약국에서 약을 산 상인들의 모습을 언제라도 볼 수 있게 됐다.
1962년 보령약국은 이미 소매약국으로는 최고의 위치에 올라와 있었다. 업계에서는 종로 5가를 지나가는 행인 5명중 한명은 보령약국 가는 손님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 였다. 약국 주변에는 ‘약 브로커’라고 불리는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중간 도매 업자들의 자전거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승호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도매업소 보령약품을 세웠다. 도매상을 차린 그는 전표제라는 획기적인 경영 기법을 약국에 도입했다.
전표제는 물건이 판매 될 때마다 품목과 수량 그리고 가격을 그때그때 확인해 두는 것으로 창구에서 약사의 처방이나 고객의 요청으로 약이 반출되면 약사는 일정한 서식의 전표에 그 내용을 기재해 관리부서에 넘기고 관리부서는 영업 방침대로 판매가되는 것인지 확인하고 약품을 창고로 보냈다. 전표 제도 도입으로 재고 관리가 확실해 졌다.
실제로 이 제도로 쓸모 없이 창고에 방치돼 있던 두 트럭 분의 약이 정리됐다. 승호의 선진적 경영 수완이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대형약국과 도매상을 차린 승호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제약업에 뛰어 들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62년 당시 제약업소는 무려 482개나 달해 보사부는 신규 허가를 내주는 대신 대대적인 업소 정비를 하고 있을 때여서 승호의 꿈은 한걸음 뒤로 물러 설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부산에 있는 동영제약이 경영 부실로 사업주를 찾고 있다는 소문을 접하고 바로 동영을 인수했다. 그때가 63년 10월 1일이다. 승호는 보령약품주식회사를 설립하고 대표 이사에 취임했다. 승호의 나이 겨우 31살 . 당시 업계는 항생제 개발에 몰두 할 때 였다. 또 활동 비타민도 인기가 있었으며 동아제약의 박카스 D는 전성기를 맞고 있었다.


보령상호 변경, ‘애향’
승호는 아스피닌 페나세틴 카페인을 배합해 만든 A.P.C 정, 산토닌 정, 치아민 정 에페드린 정, 설파다이아진 등을 선보이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66년 승호는 동영제약에서 상호를 보령제약으로 바꿨다.
그가 보령(保寧)으로 변경한 것은 고향에 대한 그의 남다른 사랑 때문이었다. 그와 동시에 회사 로고를 제정, 상호 등록을 마쳤다. 로고는 보령의 이니셜 B자를 영문 글자체 중 우아하게 보이는 ‘웨딩 텍스트’ 체로 하고 둘레를 원으로 둘러싼 형태를 취했다.
이는 안정을 추구하는 상징적 의미를 부각 시키는 동시에 세계로 뻗어 나가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었다. 드디어 보령의 시대가 화려한 막을 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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