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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기술제휴로 제약산업 도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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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 이병구 기자
  • 작성일 : 2007-02-12 08:40:41

외자도입법 시행 제조기술 향상 기여
완제품 수입줄고 국내생산액 4배 증가


60년대는 국내 제약산업이 점차 기반을 잡아 가는 시기이다. 정치·사회적으로는 4.19와 5.16의 격동이 몰아 쳤지만 경제적으로 점차 안정을 찾아 가고 있었다.
대외 원조도 62년을 고비로  감소세로 돌아섰다. 제약업계는 50년대 후반 이루어진 제제화 기술의 발전과 확산을 통해 건실한 성장의 발판을 다졌다.
장용정, 연질캅셀, 지속정 제제,과립, 코팅 등의 기술이 들어왔다. 이같은 기술 축적은 다른 분야의 외제 밀수품이 물밀 듯이 들어온 것과는 대조적으로 완제의약품의 수입을 억제하는 효과를 얻기도 했다.


외제약과 비슷하게 만들어


외제약은 시장에서 점차 사라지고 그 자리를 국산약이 메꿔 나갔다. 국산약이 짧은 기간에 자리를 잡는데는 효과적인 마케팅 전략이 한 몫을 단단히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외제 선호 사상은 대단했다. 이같은 분위기를 십분활용 국산약을 외제약과 비슷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포장의 내용이나 외형을 외제와 거의 똑같이 만들어 소비자들에게 외제약과 약의 효능이 별 차이가 없다는 인식을 각인시켰다. 외국사들과는 기술제휴나 합작을 통해 유명메이커의 분위기를 이어갔다. 이 결과 국산품 경시 사상은 많이 사라졌다.
제약업계에서 외국사와 가장 먼저 기술제휴를 한 곳은 한독약품 이었다. 한독은 59년 4월 28일 독일 훽스트 사와 기술제휴를 성공시켜 국내 기술 제휴 1호로 기록됐다.(본지 3345호 10면 참조)
이후 아주약품이 독일 바이엘과 종근당이 덴마크의 레오사와 기술제휴 했다. 이후 독일 바이엘과 한일약품, 이탈리아 레페딧트사와 국제약품, 미국 사이나미드사와 유한양행 등이 그 뒤를 이었다. 종근당이 레오사와 기술제휴 하는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은 유인섭 이었다. 유인섭은 약사 이면서 오랫동안 약품 무역부에 종사했고 종근당에서 제약원료 수입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그는 미래를 보는 안목으로 외국사와 기술제휴 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판단, 이종근에게 기술제휴를 통한 항생제 생산을 제의 했다.
당시 항생제는 중요한 품목이었고 눈치 빠른 이종근은 이 제의를 흔쾌히 수락했다. 레오사는 클로람페니콜 제제와 페니실린, 스트렙토마이신 등을 생산하는 전문 업체로 유럽에서 이름있는 회사였다.
57년 3월 종근당은 레오사와 계약 했는데 당시는 외자 도입법이 제정되지 않은 때여서 당사자 간의 계약으로 효력이 발생했다. 계약 당시 클로람페니콜 완제품은 연간 60만 달러에 달해 상당한 외화 절감 효과가 있었다.
클로람페니콜 캅셀의 경우 4,000 캅셀 당 수입 가격이 165 달러 인데 비해 원료 가격은 kg 당 45달러 였다. 이는 250mg 짜리 4,000캅셀을 생산할 수 있는 양으로 결국 5kg 당 120달러가 절감되는 것이다. 완제품으로 계산 했을 때 연간 60만 달러에서 16만 달러 어치만 수입하면 돼 44만 달러의 외화가 절약됐다. 결론적으로 국가나 종근당은 막대한 이득을 얻었던 것이다.
이후 종근당은 낙후된 제약 수준에서 벗어나 선진제약으로 가는 전기를 마련했다. 종근당은 항생제를 생산하기 위해 58년 항생물질제제 자동소분기를 서독 데프리카 사에서 수입 설치했고 제습기는 국내서 제작했다.
모든 시설을 끝낸 공장에서는 클로람페니콜은 물론 헤로세친 캅셀과 페니실린 제제인 레오마이실린주사 칼시펜정 스트렙토마이신 혈압강하제인 론칠정을 생산했다.
여기서 일화 한토막을 소개한다. 우대규(전 한일약품 회장)는 당시 한일의 전신인 대풍신약을 경영하며 클로람페니콜 시럽을 수입해 오고 있었는데 종근당이 이를 생산하게 되자 큰 타격을 입었다.
정부는 국내 제약산업 육성을 위해 완제품 수입을 금지했다. 수입이 불가능 해지자 우대규는 이종근에게 한 번만 더 수입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 회장은 그 요구대로 복지부에 건의해 5~6만병 분량 수입이 가능하게 했다.
그런데 우대규는 약속한 수량을 어기고 무려 15만 병이나 수입했다. 그리고 신문과 라디오를 통해 제품 광고에 열을 올렸다. 종근당은 타격을 입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대범한 이종근은 이를 문제 삼지 않고 오히려 재고가 다 소진되면 종근당 제품이 시장을 석권할 것이라고 자신만만 했다. 이 예측은 맞아 떨어져 종근당의 헤로세친은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다.


이종근, 우대규 대범하게 용서


한편 외자도입 촉진법은 59년 12월 28일 국회에서 통과돼 60년 1월 1일 공포 시행에 들어갔다. 당시 의약품 분야의 합자투자와 기술 제휴는 경제기획원이 담당 했지만 주무부서인 보사부의 사전 조회 결과를 반드시 참고로 했다. 보사부는 이를 위해 사전 심사를 위한 내규를 마련 했다.
‘의약품 등 기술원조 계약과 체결 및 개정업무 취급규정’에 의하면 “특별법에 의한 특허권이 발생하고 특허권이 존속 되고 있는 품목으로서 당해 품목이 국민보건상 특히 필요하고 제조 또는 외화획득 내지는 절약에 기여도가 큰 품목으로서 제조기술면에 있어서 사실상 기술 도입의 필요성이 있다고 인정되는 경우”에 한해 기술 도입 승인을 해줬다.
그러나 내규의 특례 조항은 “국내 의약품 등 제조 공업의 기술 또는 품질의 향상에 기여할 수 있다고 인정되는 것으로 당해 외국 상표 상사명 또는 기술 제휴 등의 표현을 제품 또는 사고에 있어 사용하지 않는 경우에는 제 2호의 규정에도 불구하고 이를 승인할 수 있다”고 명시했다. 이는 당시 국내 제약사들이 단순한 상표 이용을 목적으로 기술 제휴를 신청하려는 경향이 높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약공협회를 중심으로 한 제약업계의  노력, ICA시설 자금과 원자재 확보 그리고 정부의 정책 지원에 힘입어 업계의 사기는 크게 올랐다. 약 생산도 급속히 증가했다.
60년 업소수는 321개소 허가품목수는 5,462품목 생산액은 18억 5,500만원 이던 것이  65년에는 업소수 468개소 허가품목수 1만747품목 생산액 71억 8,800만원으로 업소수는 50% 늘었고 품목수는 200% 생산액은 4배로 크게 증가했다.


약국수 폭발적 증가


반면 완제의약품 수입은 그에 비례해 줄었다. 61년 215만 달러 였던 것이 65년에는 52만 달러로 급감했고 원료약 수입액은 61년에 209만 달러에서 65년에는 387만 달러로 2배 가까이 증가했다.(도표 참조) 국내 생산이 늘고 완제 수입이 줄어든 것은 정부의 정책이 큰 역할을 했다.
특수한 신약이 아닌 이상 국산약품으로 수요를 충당할 수 있다고 판단 했기 때문이다. 수입억제 정책이 국내 제약 산업의 성장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생산량과 비례해 판매업자의 수도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약국수는 60년대에만 9배 이상 늘어나 4,000여개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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