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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년간 외길 제약 산증인 우대규

  • 고유번호 : 911
  • 작성자 : 이병구 기자
  • 작성일 : 2007-02-12 08:41:21

15세때 평양 기꾸나약국 종업원으로 첫 발
탁월한 영업력으로 한독약품 성장가도에
63년 한일약품 인수 본격적 제조업 투신


한독약품 창업자 김신권은 우대규를 이렇게 평가했다. “천부적인 사업가로 탁월한 영업 수완외에 광고분야에 폭 넓은 식견을 가지고 있다. 매사에 사리가 분명하며 다재 다능하다. 대인관계가 좋아 친교의 범위가 넓고 화이여인(和以與人) 하는 높은 인격과 불굴의 기업 정신을 갖고 있다.” 과연 우대규는 신권의 표현처럼 탁월한 기업가이면서 뛰어난 약업인 이었다.


‘신언서판’을 좌우명으로


우대규(禹大奎 현재 83)는 평안남도 양덕군이 고향이다. 그는 학식이 높아 서당을 했던 조부에게 신언서판(信言書判, 자신은 물론 남에게 믿음으로 신용을 지키고 말을 올바르게 전하고 글을 알고 얼굴이 곧아야 한다. 이는 남자가 지녀야 할 4가지 기본이다)이라는 좌우명을 얻고 이를 평생 삶의 신조로 삼아 왔다. 그는 15살의 어린 나이에 80리 길을 걸어 깊은 밤 평양에 도착했다. 그의 손에는 전 재산인 2원과 일본인이 써준 추천서가 들려 있었다. 다음날 그는 ‘국명(기꾸나)약국’에 취직했다. 대규가 약업계와 인연을 맺게 된 첫 모습이다.
기꾸나 약국은 한일합방 당시부터 주인 기꾸나가 일본을 왕래하면서 평양에 개설한 양약국으로 ‘모리따약국’과 함께 평양에서 두 번째로 큰 약국이었다. 그는 기왕에 약업계에 투신한 이상 자본과 상술에서 월등히 앞선 일본인 약국에서 근무하게 된 것을 큰 다행으로 여겼다. 그는 고된 약국일을 하면서도 틈틈이 공부를 해 상업부기 상업문 세계지리 등을 배워 7년만에 선배들을 제치고 지배인의 자리에 올랐다.
대규는 훗날 국명약방에서 신용과 능동적인 일 처리를 익혔고 이는 한일약품을 창업하고 일궈 내는데 큰 몫을 했다고 회상할 만큼 첫 직장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23살 되던 해 대일약방(大一藥房)을 차렸다. 상호를 대일로 한 것은 이 세상에서 제일 큰 약방을 만들겠다는 야망에서 였다. 대일약방이 승승장구할 무렵 일본은 태평양 전쟁에서 패전의 기색이 역력하자 한국인들을 핍박하고 전쟁터로 끌고 갔다. 대규는 고향으로 잠시 피신해 있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했다. 약방을 정리하자 1,100원으로 시작한 자본이 무려 5,000원으로 늘어 있었다.
해방후 대규는 평양으로 돌아와 대일약방을 다시 열었다. 당시 이북지역은 콜레라가 창궐해 하루에도 수백명이 병사했으나 소독할 약품이 태 부족이었다. 그러나 남한에서는 신약들이 넘쳐나 북한은 38선을 넘어 약이 들어 오는 것을 묵인해 주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약이 ‘페니실린’이었다. 페니실린은 우수한 항균력으로 전쟁 당시 많은 군인들을 죽음의 문턱에서 구해낸 ‘기적의 약’이었다. 그는 페니실린만 있으면 엄청난 돈을 쉽게 벌 수 있다고 판단, 서울로 왔다. 서울은 평양에서 구하기 힘들었던 약들을  구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등짐으로 꼭 필요한 약만 지고 갔다. 이후 일정한 간격으로 월경해 약을 구해 팔았다.
그는 많은 돈을 벌었다. 하지만 그는 약사가 아니었기 때문에 약을 파는 일에 문제가 생겼다. 북한당국은 일인 약제사와 약업인이 귀국한 후 북한에 있는 약사가 겨우 100명 정도에 불과해 약품 취급인의 질적인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북한은 일제시 약종상도 재시험을 치르게 한뒤 약종상 허가를 다시 내줬다. 이 시험에서 대규는 당당히 일등으로 합격했다. 약종상 허가를 다시 얻은 그는 약품 취급을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되자 페니실린은 물론 스트렙토마이신 등 신약을 대량으로 북한으로 반입했다. 공산하 였지만 평양의 대일약방 명성은 더욱 커져만 갔다.


김신권과 운명의 만남


엄청난 돈을 번 그는 뜻하지 않은 시련에 부딪쳤다. 바로 민족 상잔의 전쟁인 625를 만난 것이다. 유엔군의 반격으로 낙동강 까지 왔던 북한군이 다시 북으로 물러나고 평양 거리에는 유엔군이 들어왔다. 이와 함께 많은 양의 씨레이숀, 신장비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대규는 이런 것 보다는 신약에 우선 눈이 갔다. 몇 달씩 고름을 흘리며 낫지 않던 질병이 단 며칠 투약으로 치료되는 항생제들, 멈출줄 모르던 하리(下痢,이질)를 한두 알로 치료하는 설파제, 실로 기적 같은 일들이 벌어졌다. 그는 남하를 결심했다.
대전에서 터를 잡고 곧 충남도청에서 임시 약방허가증을 얻었다. 처음에는 시장점포에서 몇가지 약을 구해서 팔았으나 타고난 장사꾼 기질로 곧 돈을 벌어 점포를 냈다. 장사가 잘되자 당시 수도 였던 부산으로 자리를 옮겨야 겠다고 생각했다. 한번 출장에 3일 걸리는 일정을 한달에 7번 정도 하는 것이 무리였기 때문이다.
부산에 내려온 그는 약업인들이 모이는 대청동 일대의 약방과 국제시장의 약품좌판상을 돌아보며 소일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양에서부터 알고 지내던 한독약품 창업자 김신권을 만나 의기투합했다. 공동으로 약품 도매상을 차린 것이다. 이때부터 신권과 대규는 평생을 동지이면서 라이벌로 살아가게 된다. 두 사람은 부산 창선동에 ‘동서약품’을 차렸고 소문을 듣고 제약사 수입약품상 약품을 구하러온 전국의 약업자들이 모여 들었다. 돈은 눈덩이 처럼 쌓여갔다.
54년 대규는 서울로 왔다. 신권과 다른 7명의 동업자와 함께 ‘연합약품’을 세웠다. 연합약품의 전무를 맡은 대규는 영업과 선전에서 탁월한 기량을 발휘했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이라는 말이 있듯이 ‘아무리 좋은 약이라도 소비자들이 사야 진정한 약’이 되는 것과 같이 대규의 영업이 없었다면 연합약품의 영업이익은 꿈도 꿀수 없는 것이었다.


1인자 되기위해 한독떠나


그는 손을 잡은 훽스트 사의 상표와 약품의 우수성을 연일 광고 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훽스트사가 가장 유명한 제약사로 알게 됐고 그 상표가 붙은 약의 효력이 가장 우수한 신약으로 생각할 정도였다.
그 다음으로 그는 효과적인 판매를 위해 전국 도매상 중 자본과 운영면에서 건실한 업체 40개를 선정해 특약점 계약을 맺고 측면 지원했다. 이 특약점 제도는 우대규가 처음 시도한 것이다. 이후 대규는 자신이 이름을 지은 업계 5위까지 진입한 한독약품의 전무를 끝으로 새로운 길을 가게 된다.
김신권은 “한독약품과 우대규가 결별한 것은 수입상에서 제약사로 변신하는 과정에서 의견 충돌 때문”이라고 표현 했으나 대규는 한마디로 “그런것이 아니고 제 1인자가 되고 싶은 욕망 때문에 김신권과 결별 하게 됐다”고 말했다. 우대규는 “신권은 돈이 많아 일인자 였다, 나는 영업력으로 회사의 수익을 책임 졌지만 참여 자본이 적어 동서약품 연합약품 한독약품 등에서 늘 2인자 였다. 내가 1인자가 되지 말라는 법이 없었고 나는 1인자의 모든 준비를 마쳤다” 며 신권과 결별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한독을 나온 대규는 자본금 1억3,500만원으로 정원병겴煥늙¥ 등과 함께 ‘대풍신약’을 세웠다. 회사를 차린 후 곧 독일 노드마크사의 간장약 ‘프로헤파룸’을 들여왔다.
국내에서는 간장약이라고는 ‘메치오닌’ 외에는 별다른 약이 없어 프로헤파룸은 큰 인기를 끌었다. 그는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59년 동안 막혔던 일본과 교류를 텄기 때문이다. 대규는 좋은 약을 보급하는데는 정치나 이데올로기는 필요하지 않다는 생각으로 일본제약사의 신약을 국내에 도입했다.
대풍은 승승장구 했다. 그러나 60년대 들어 국산을 장려하는 정책에 따라 수입상인 대풍신약은 시련을 맞았다. 대규는 제조업으로 눈을 돌렸다. 진정한 약업인이라면 좋은 약을 생산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생각을 실천에 옮겨야 할 때가 왔다고 결심했다. 63년 그는 한일약품을 인수했다. 현재 그는 하반신 마비로 병마와 싸우고 있지만 ‘한국제약’의 미래를 걱정하는 진정한 약업인의 자세를 잃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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