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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용구, 삼양 극동이어 ‘일동’창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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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 이병구 기자
  • 작성일 : 2007-02-12 08:28:07

강장제.모르핀주사제 등 노하우 익혀
1941년 대도.대동.수도제약 흡수 통합


1941년 일동제약의 전신인 극동제약이 창립됐다.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고 어수선한 시기였다. 당시 삼양공사를 경영하던 송파 윤용구( 松派 尹溶求)는 제약업에 뜻을 두고 일제의 기업정비령에 의해 정비 대상이었던 대도제약 대동제약 수도제약 등을 흡수·통합해 이듬해 5월 일동제약을 만들었다.
이후 윤용구는 평생동안 제약외길을 걸어왔다. 그는 세 살 때 친모를 여의고 외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어미없는 어린 자식의 비애는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어 어린 용구의 가슴 한 구석은 늘 사모하는 마음으로 가득찼다.
그러나 성장하면서 자신의 앞날을 스스로 개척해야 겠다는 당찬 마음으로 미래를 향한 기개를 펼쳐 나갔다. 그가 태어난 곳은 예로부터 풍재(風災) 수재(水災) 박재(雹災,우박) 등 3재가 없는 살기좋은 충북 청원군 가덕면 수곡리 세칭 ‘머리울’ 이었다.


부친, 근검절약 배워


이곳에서 그는 평생을 논밭을 사고 땅을 늘리는 일에 전념했던 부친 윤영선(尹英善)의 맏아들로 태어나 근검절약을 배웠다. 서당생활 가덕공립보통학교 청주고보를 거치면서 인생의 눈을 새롭게 뜨기 시작했다.
특히 청주고보 시절은 그의 인생을 결정짓는 중요한 시기였다. 그가 입학했던 1925년은 국내외적으로 매우 어수선했다. 국내서는 김재봉(金在鳳,) 조봉암( 曺奉岩, 독립운동가이며 정치가.
인천강화에서 태어났으며  호는 죽산. 3.1만세 운동에 참여해 1년간 옥살이를 했으며 일본 주오 대학에서 1년간 정치학을 공부하고 비밀결사 흑도회에 참여해 사회주의 사상에 입각한 독립쟁취를 목표로 항일운동을 했다. 25년 조선공산당을 창설해 간부로 활동하다 46년 박헌영에게 충고하는 공개서한을 발표하고 공산당을 탈당한다.
이후 우익진영으로 급선회해 48년 제헌의회 초대 농림부장관 50년 국회부의장 52년 대통령선거 차점낙선 56년 진보당 결성, 58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돼 대법원에서 확정판결 받고 처형됐다.)에 의해 조선공산당이 조직되고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은 임시 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탄핵안이 의결돼 독립지도자들 사이에 반목이 일어나고 있었다. 손문(孫文,중국혁명의 선도자이며 삼민주의 주창자)이 죽은 것도 그해 3월이었다.
이 시절 그는 조선학생이나 일본학생에서 차별대우를 하지 않았던 일본인 선생 메구로 교장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다. 용구가 2학년 때는 재위 4년만에 국권을 뺏기고 실의에 차 있던 조선 마지막 왕 순종이 죽었다. 곡을 하던 군중들은 무리 중 학생이 외친 독립만세운동을 따라 불렀으니 이것이 6.10만세 운동이다.
이후 윤용구는 경성약전을 졸업한 후 경성의학전문학교 부속병원에서 사회인으로 첫 출발을 내디뎠다. 이곳에서 5개월 무보수로 일한 후 그는 조선상회에 취직해 월급으로 40원을 받았다. 100원짜리 지폐를 구경하기도 힘든 때였으므로 결코 작은 액수가 아니었다.
그가 조선상회에서 활동할 무렵 천일약방과 조선매약이 쌍벽을 이루면서 경쟁했고 효고다리 근처의 조고약이 큰 인기를 끌었다. 조선상회의 주인은 안호영이었고 용구는 조선상회의 유일한 약사였다.


‘삼용정’ 개발 인기


안호영은 내시였으나 아내가 있었고 호탕해 천일과 조선매약에 대항하는 큰 제약사로 키우려는 야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용구에게 천일이나 조선매약의 잘 나가는 ‘삼용보약수’( 蔘茸補藥水)와 비슷한 약을 만들기를 주문했고 이에 용구는 이를 분석해 ‘삼용정’(蔘茸精)을 개발했다.
약의 허가는 간단해 시공품을 만든 다음 관계사항을 기재한 후 경기도 위행과에 제출하여 허가가 떨어졌다.
조선상회의 삼용정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삼과 녹용이 들어가 있는 강장제로 보약 제품으로 인기가 높았다. 약이 잘 팔리자 안사장은 용구를 극진히 대접했으며 한편으로는 새로운 약을 만들 것을 바랐다. 당시 이름을 날렸던 금강제약은 진통제 ‘페지날’로 일본의 우에무라 제약소 것 보다도 인기가 높았다. 용구는 주사제도 만들어 냈다.
이 제품은 독일의 크노르 회사에서 만든 디히드로모르핀(지라우지드)을 원료로 썼다. 모르핀보다 약효가 4배나 강해 똑같은 분량을 넣어도 잘 들었다. 이런 진통제를 1년 가까이 생산했다. 물론 다른 제약사들도 생산에 열을 올렸고 따라서 경쟁은 과열됐다. 그러자 일부에서 마약을 해독제로 팔고 있는 현실을 비판했고 허가해준 것이 잘못이라는 여론도 일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위생과 가와구찌는 “조선의 제약 수준은 너무 빈약해 제약계를 부흥시키기 위해 어쩔수 없었다”는 대답만 들어야 했다.
용구는 당시 조혼습관에 따라 일찍 결혼 했던 것과는 달리 늦은 나이에 장가 들었다. 그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지금의 충무로 2가 쪽의 진고개에서 상사 여사무원으로 근무하고 있던 송월례와 교제하기도 했으나 애가 하나 있는 과부 였다는 사실을 알고 교제를 멈추었다.
그리고 진통제 페지날로 돈방석에 앉은 금강제약 전용순의 친동생인 이화여전 출신의 처녀와 맞선을 보기도 했으나 너무 활달하다는 이유로 청혼을 거절했다. 그후 그는 청주고녀 출신의 안애소 여사와 화신상회 5층 음식점에서 첫 만남을 가진 후 34년 27살의 나이에 결혼했다.


아편으로 악용


이후 그는 조선상회가 조일제약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크게 사세가 확장되자 만주 봉천으로 파견근무를 떠났다. 조선상회가 만주로 간 것은 금강제약이 만주와 중국으로 진출하면서 막대한 이득을 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일전쟁이 일어난 1937년 용구는 1만 7,000여명의 한국인이 거주하는 봉천에서 일에 매달렸다. 스타놀은 물론 일본 영사관에서 모르핀을 구해 주사제로 만들기도 했다. 당시 만주지역은 아편을 마음대로 사고팔수 있었는데 10앰플에 1원 정도로 아주 쌌다.
만주의 사교계는 아편을 제대로 피울줄 알아야 행세를 할 수 있었다. 친구를 만나면 술한잔 하러 가자는 말 대신 ‘아편 피우러 가자’는 것이 일상적인 인사였다. 당연히 아편흡연소가 번창했다. 용구도 회사 동료에 이끌려 흡연소에 간적이 있었는데 여기서는 여자가 뿜어 주는 아편 연기를 맡는 것이 기본이었고 연기를 맡는 사람은 씽(좋다)이라는 말로 인사를 대신했다.
몽롱해 드러누운 사람들 가운데는 배 같은 과일을 팔았는데 갈증을 없애기 위해서 였다. 헤로인은 물론 주사제도 상용했으며 스타놀을 마약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중국사람들의 마약 탐익은 끝이 없었고 중독자들은 집은 물론 아내까지도 내다 팔면서 마약에 빠져들었다. 용구는 중국도 망할날이 멀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삼용토닉’도 빅 히트


용구는 많은 사람들을 아편장이로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는 자책감과 신용이 없는 안사장의 태도 때문에 38년 조선상회를 떠난다. 1년간 실직 후 그는 김일영이 운영하던 자선당에 들어가 삼용정과 흡사한 ‘삼용토닉’을 만들어 내 또한번 히트를 쳤다.
윤용구 때문에 큰 돈을 벌었지만 자선당은 애초 약속과는 달리 월급으로 105원을 주는 등 신용을 어겼다. 그리고 김일영은 여자관계가 복잡했다. 사장의 사생활과 언행이 다른 자선당과 일할 수 없다고 판단한 용구는 자선당에 입사한지 1년만에 다시 회사를 떠났다. 그는 자립을 결심하고 안암동의 자택에서 삼양공사를 발족했다. 1940년 4월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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