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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규방, 국내 약사법 제정 큰 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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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 이병구 기자
  • 작성일 : 2007-02-12 08:29:17

45년 중외제약 전신 조선중외제약소 탄생
지달삼, 국내 첫 비타민 당의정 판비타 개발


1945년 해방은 약업계에 또 하나의 기쁨을 선사했다. 바로 중외제약과 대웅제약이 탄생한 해이기 때문이다.
중외제약의 전신은 조선중외제약이다. 일본 쥬가이 제약 경성지점공장 당시 관리자 였던 남효범과 이원우가 조선중외제약소로 상호 변경하고 임용식 임도순 박창순 등 세사람이 공장의 경영과 생산을 맡아 새로운 출발을 했다.
사장은 임용식(林容植)이 맡았다. 임용식은 경기도 김포 출신으로 젊은 시절 도일해 숱한 고생을 겪고 귀국한 뒤 처음에는 약품 도매상인 기다시마에서 근무했다. 그러다 쥬가이 제약이 이를 인수하자 경성지점공장에서 회계업무를 담당했다. 감사인 임도순(任道淳)은 일본 쥬가이 본사 근무중 해방 후 귀국해 임용식과 고락을 함께 했다.


‘쥬가이’경성지점이 시초


박창순은 생산을 담당하는 유일한 기술자 였다. 임도순과 박창순은 사내에서 공장업무를 담당했고 임용식은 판매를 전담했다. 그는 사장겸 영업사원으로 전국 방방곡곡을 누볐다. 조선중외제약소는 해방 직후 혼란기에 숱한 제약사들이 도산을 하는 와중에서도 약 생산을 계속했다. 해방 당시 남한에 있던 제약공장 수는 255개 였으며 제조 허가 품목수는 2,300여 가지에 달했다. 그러나 수는 많았지 제대로 된 제약회사는 30개 정도에 불과했다. 그나마 제약공장 다운 시설을 갖추고 실제로 공장을 가동한 업체는 이보다 적었다.
해방은 됐지만 심각한 원료 구득난으로 공장을 계속 가동하는 것은 무리였다. 전적으로 일본에서 원료를 수입해 오던 것이 하루 아침에 끊기다 시피 했기 때문이다. 일부 재고와 일본인 들이 남기고 간 보유 원료로 겨우 명맥을 이어갔다. 그러나 이마저도 곧 바닥나 제약원료는 극히 한정된 밀수품이나 미 군수품밖에   없었다.
따라서 국내 의약품의 수요는 대부분 한약재를 원료로 만들어 낸 한방제제나 미군정청의 배급품,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페니실린,다이아지,DDT, 모노후라톨,스트렙토마이신 등이 고작이었다. 당시 일제의 위생국을 대신해 전국에 구호의약품을 배급한 기관은 고려약품주식회사였다. 고려약품을 통해 전국의 병의원과 약국으로 약이 공급됐던 것이다.
이처럼 원료난과 약품난이 심각해지자 일부 제약회사는 조악한 원료로 약을 만들어 팔기도 했다. 이로 인해 부작용도 만만찮게 발생했다. 당시 국내 제약업계를 주름잡던 금강제약은 포도당 주사약인 후루덱신의 부작용으로 환자가 사망하자 여론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자진폐업 하는 불행한 사태를 맞았다. 조선중외제약소는 상당한 재고 원료 덕분에 병 의원에 공급할 수 있는 포도당 등 약품과 약전약을 적게 나마 생산하면서 공장을 돌릴 수 있었다. 당시 조선중외가 생산한 품목은 사루소부로카농 외에도 20%포도당 20ml, 50% 포도당 50ml 등 이었다.
2층 건물의 공장에서 1층에서는 앰플 생산과 함께 포장업무를 2층은 사무실과 살림집으로 이용됐다. 생산량은 많지 않았지만 조선중외는 남한은 물론 이북의 함경도 까지 판매망을 넓혀 경성신약 금강제약 유한양행 등과 함께 쓰러져 가는 국내 제약계의 명맥을 그대로 유지시키는 큰 역할을 해냈다.
대웅제약은 지달삼( 池達三)이 45년 8월 미군청으로부터 일본 가와이 제약소의 시설 등을 인수받아 조선간유제약공업사를 창립하면서 시작됐다. 지달삼은 1922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다. 동래고와 일본 구마모또(熊本)약학전문 학교를 마쳤다. 그는 구마모또 시절 학업이 우수해 조선인의 기개를 떨쳤으며 수석으로 졸업할 만큼 재원이었다.
해방전 경남도청 위생과 의약계에서 근무하다 조선간유제약공업사를 세웠다. 지달삼은 부산에 위치한 공장에서 간유구 생산으로 명성을 날리기 시작했다.


미군정에서 ‘가와이’받아


47년 대한비타민화학공업사로 상호를 변경한 후에는 간유구 뿐만 아니라 각종 비타민으로 사업을 확대 했다. 종합비타민 시럽 비타톤,  판비타 등이 그의 작품이다. 특히 판비타는 국내 최초로 선보인 비타민 당의정으로 약업사에 기록되고 있다. 당의(糖衣) 기술의 개발은 외제 약품과 비교할 수 있는 국산기술이 전무한 상태에서 나온 것이어서 더욱 값졌다. 49년 11월 대한비타민은 판비타 개발공로를 인정받아 우량 국산품 전람회에서 영예의 부통령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대한비타민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유한양행과 협동연구 관계를 맺고 어류의 간장으로부터 간유를 추출해 분말화하는 기술을 공동으로 개발했다. 특허를 얻은 간유분말은 그 후 계속 개발돼 비타민 제의 주원료로 이용됐다.
한편 업계는 약업인들의 애로를 공동으로 타결하기 위해 45년 10월 26일 조선약품공업협회 창립총회를 개최해 제약업계의 새로운 장을 열기 시작했다. 총회에는 국내 제약업체 대표자와 적산(敵産)업체를 임대차해 관리하는 대표자 65명이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 임원선거를 통해 위원장에는 금강제약의 전용순 부위원장에는 삼성제약 김종건 제생당약방 이경붕이 각각 선임됐다. 사무국장 격인 서기장에는 정복용이 맡았으며 사무실은 서대문구 정동 1번지에 있었다.
보건위생 행정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일제는 보건위생 분야의 감시와 감독을 위해 경찰기관인 경무국에서 관장했으나 미 군정은 약무 행정을 포함해 보건행정을 경찰행정에서 분리해 위생국에서 맡게 했다. 그 후 군정청에 보건위생부가 생겨 부장에 이용설 차장에 최재남이 취임했다. 약무국장은 양주동 과장은 김석만 양석래 권용화 이선주 백남원이었다.
이들은 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때 까지 약무행정을 관할 했다. 미 군정은 일본이 경영하던 제약회사 도매상 약종상을 연고권자가 있을 경우 관리권을 부여했다. 따라서 적산을 둘러싸고 관리권을 얻기 위한 이권 다툼이 극심했다. 그러나 막상 한국인 종업원이나 연고자가 관리권을 인수 했으나 경험 부족과 경영 능력 부족으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도산하는 경우가 많았다.
군정은 이와는 별도로  일제가 만든 약품영업취체령 등 각종 법령의 수정과 의약품의 수급조절을 포함해 의료구호 사업을 실시했다. 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군정의 보건위생부는 폐지됐다. 보건행정은 사회부 아래의 국으로 격하 됐으며 사령탑인 초대 국장에는 박주병이 임명됐다.


적산 이권다툼 치열


군정내의 약무국장과 과장들은 정부수립 후 직급이 낮아지자 약무과장 심학진 등 대부분 사임했다. 조선약품공업회 등 의약단체 들은 보건행정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독립된 정부부처로 승격을 주장했다. 이듬해 3월 정부기구 개편시 사회부의 보건국은 보건부로 독립됐고 약무과는 약정국으로 승격됐다.
초대 보건부 장관에는 구영숙 차관 이갑수 약정국장 이성주가 취임했다. 약무과장 전규방 기획과장 정경한 수급과장은 이선주 였다. 얼무 후 이성주 약정국장이 사임하고 총무국장이었던 김정국이 약정국장으로 발령 받았으나 약제사가 아니라는 이유로 반대에 부딪혀 전규방 과장이 국장서리 역할을 했다.
정부가 제자리를 잡아 감에 따라 약업계 최대 현안은 약사법을 제정하는 것이었고  특히 일제 식민 통치의 일환이었던 약품영업취체령의 폐지 여부가 가장 큰 관심사 였다. 1929년 조선약학교 출신인 전규방 약정국장 서리는 약품공업협회 부회장이며 약제사회 회장인 이경붕 등과 함께 약사법 제정에 힘을 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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