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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형식, 1946년 일양약품 창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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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 이병구 기자
  • 작성일 : 2007-02-12 08:30:00

의약품 소매상 인수후 공신약업사 개업
기무라등 일본인 약방서 영업기술 익혀


해방 이듬해 일양약품이 창립됐다. 일양은 불세출의 약업인 위제 정형식(暐薺 鄭亨植)의 작품이다.
정형식은 1922년 서울 종로구 훈정동에서 4남매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어린시절은 불우했다.
조부가 갑작스럽게 타개했고 겨우 4살 때 부친마저병고에 시달리다 작고했다. 가세는 급속히 기울고 어린 위제는 감당하기 힘든 슬픈을 이겨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어렵고 궁핍한 환경속에서도 교육에 대한 남다른 열정으로 학업에 열중해 광희심상소학교를 졸업했다. 하지만 그의 학업은 여기서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미 졸업전 일본인이 경영하는 우에무라제약소에 취업했기 때문이다. 그의 나이 17세 때(1938년) 였다.


우에무라제약 근무


우에무라 제약소는 500평 규모의 2층 콘크리트 건물로 그 안에 사무실 공장 부대시설 등이 있었다. 정형식은 발송부에서 근무했으나 근면과 성실성을 인정받아 입사 몇 달 후 창고 수납보조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중일전쟁이 점점 더 치열해 지고 환자들이 늘어 남에 따라  거의 모든 약품들이 불티나게 팔렸다. 정형식은 똑같이 되풀이 되는 창고 업무에 회의를 느껴 우에무라 제약사소를 퇴사하고 이듬해 기무라 약방에 취직했다. 하지만 우에무라제약은 정형식에게 약을 알게 했고 약과 숙명적인 관계를 맺게 한 인연을 제공했다.
기무라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대형 도매상으로 전국의 약국 약방 약포를 조사해 영업 활동에 적극 활용했으며 상보를 제작해 전국의 약업인에게 발송하는 등 다양한 판매전략으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배달업무로 기무라 생활을 시작한 그는 4개월 만에 외무판매사원으로 기용돼 본격적인 영업에 뛰어 들었다.
영업은 일본계와 조선계로 나뉘어 졌는데 각각 7명으로 구성돼 있었다. 일본계는 대학병원 도립병원 관공서 야마기시천우당을 비롯 충무로의 귀생당, 고성찬화당, 기타지마 약점, 모리카와, 회천당, 아베약방 등을 담당했다. 광화문 용산 명동의 약방과 정자옥 ,미나카이, 히라다, 미스코시 등 백화점 약품부도 일본계 차지였다.
조선계는 천일약방, 조선매약 양약부, 세브란스병원 의약품 상회, 화신백화점을 비롯 종로 청량리 서대문 영등포 지역에 분포돼 있었다. 정형식은 ABC 급으로 나누어진 거래선을 신입사원으로는 드물게 A급에 해당하는 영등포 지역을 담당할 만큼 인정을 받았다. 1급 영업사원을 뜻하는 반장은 입사 후 1년 4개월만에 달았다.


영업귀재 명성


당시의 영업사원들은 모두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영업을 해 자전거 소년들을 보면 제약회사 영업사원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자전거 짐받이에는 약 샘플은 물론 팸플릿 거래 장부 등을 싣고 다녔다. 정형식 역시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영업을 했다. 반장으로 승진한 후 2년만에 태평양 전쟁이 발발해 약을 구하는 것은 힘에 겨웠다. 당시 정형식의 거래선은 천일약방과 세브란스 의약품상회 등 굵직한 업체 들 이었는데 한 번은 세브란스에서 붕산 200파운드를 주문 받았다.
그러나 전쟁통이라 그만한 물량을 공급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모두다 어렵다고 여겼다. 하지만 정형식은 백방으로 수소문해 주문량을 배달했고 그후 세브란스의 주문은 거의 정형식을 통해 이루어 졌다. 당연히 영업실적은 크게 늘어났다.
정형식은 기무라에서 만 6년간 근무하고 43년 23살 되던 해 퇴사했다. 기무라를 나온 것은 기무라와 아라이 약방 등에서 약품 도난 사건이 발생했고 이들 두 약국의 일본인 종업원 들이 정형식과 7명의 조선인을 의심해 성동경찰서에 고발하는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간신히 누명을 벗기는 했지만 정형식은 자신이 몸담은 회사에서 의심 받았다고 생각하자 정이 떨어졌다. 이 무렵 그는 영업사원에서 경리직으로 보직이 변경되기도 했다. 그는 미련없이 기무라를 나왔다. 정형식은 기무라약방을 퇴사한 후 의약품 소매에 깊은 관심을 갖고 약방 경영을 염두해 두었으나 형편이 안되고 약종상 허가나 자격이 없어 고민했다.
또 당시 일본은 전시를 핑계로 조선계 점포에 대해 통합 소개 등 강력한 통제 정책을 펴고 있었기 때문에 약국 개설은 사실상 어려웠다.
그러던 어느 날 단성사 앞에 있는 해동약국에 들렀다가 주인 조영환으로부터 약국경영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정형식은 다 쓰러져 가는 약국을 살려내는 수완을 발휘했다. 주인은 그에게 거액의 사례비로 답례했다.
그는 또 맥각주사약, 사루소부로카논 같은 통제의약품의 군납을 통해 자본을 축적했다. 경성방직에는 황산알루미륨과 황산나트늄을 납품하는 과정에서 일본인 호소노 판매주임의 신임을 얻어 세탁비누를 10상자씩 선물 받기도 했다. 당시 세탁비누 1장이 쌀 한 말과 바꾸던 시절이었으므로 돈으로 환산하면 엄청난 것이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정형식은 자본을 모았다.
44년 북한지역 여행은 그에게 또다른 기회를 안겨 주었다. 정형식은 일본인 화장품 도매상에서 근무하던 친구 장상보와 청진 나남 등을 여행하면서 청진 지역의 약품 품귀 현상이 서울보다 훨씬 심각한 것을 알았다.
여러 약국을 둘러 보던 정형식은 숙소 근처에 있던 십자당약국에서 진열장 곳곳에 쌓여 있던 대량의 고신말(苦辛末)을 발견하고 사업수완을 발휘했다. 그는 고신말을 전량 인수하기로 마음먹고 주인과 흥정에 들어갔는데 주인은 뜻밖에도 현금대신 영신환 당사향소합환 상사향소합환 청심환 우황포룡환 등 주로 천일약방과 조선매약의 약들과 교환을 조건으로 내세웠다.
정형식은 고신말을 순식간에 팔아 막대한 이득을 냈고 협정가격으로 영신환 등을 보내면서 엄청난 차익을 남겼다. 정형식은 그 돈으로 45년 의약품 소매상인 한성약관을 거금 13만원을 주고 인수했다. 


고신말 팔기 큰돈


그는 자건거를 타고 시내를 누비면서 사업에 열중했다. 중외제약 유한양행 경성신약 협화제약 등 당시 이름난 제약사들의 제품들을 진열했다. 사업은 번창했다. 또 당시에는 국방약화공약품(局方藥化工藥品) 등 새로운 약품들이 쏟아져 나와 사업은 한결 수월했다.
이를 기반으로 46년 공신약업사를 창업했다. 일양약품이 창립년도가 46년인 것은 바로 공신약업사 창업이 일양의 모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신약업사는 얼마후 이름이 더 좋은 공명약업사로 명칭 변경됐다. 공명약업사는 하루 평균 4만원의 매출을 올리는 사업장으로 성장했다. 사업에 성공한 그는 그해 11월에는 이자영(李子英) 여사를 만나 결혼해 평생의 반려자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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