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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한양행, 국내 약업계 최초 주식회사

  • 고유번호 : 883
  • 작성자 : 이병구 기자
  • 작성일 : 2007-02-12 08:30:54

‘기업은 사회와 종업원의 것’ 경영이념
설파제 ‘프론토질’ 경이적 성공 밑바탕


약업계 최초의 주식회사는 유한양행으로 유한은 1936년 자본금 50만원으로 주식회사를 발족했다. 취체역사장(取締役社長)은 유일한이 맡았다. 전문취체역 전항섭, 상무취체역 예동식, 취체역 김영호·유호미리, 감사역 유정근·유순한 등이 멤버였다.
그해 11월 유한은 증자를 단행, 1주당 액면 50원의 신주 5000주(25만원)를 전액 불입하고 자본증가 등기를 마쳐 자본금이 1만주에서 1만5000주(75만원)로 크게 늘었다. 유한의 주식회사 변경은 대표취체역인 유일한의 경영철학의 결정체였다.
유일한은 “기업은 개인의 것이 아니며 사회와 종업원의 것이다”는 확고한 기업관을 갖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반세기를 훨씬 넘긴 지금까지도 유한의 이같은 기업정신은 계속되고 있다.


기업은 사회가 주인


주식회사를 발족한 유한은 수입과 매약 위주에서 탈피, 본격적인 약품 제조업을 시작했다. 이즈음 경기도 부천군 소사면 심곡리에 공장이 건설됐다.
공장 준공 이듬해인 37년에는 전년에 비해 20%의 매출증가를 가져왔다. 38년에는 전시통제로 수입억제가 강화되는 등 불리한 여건이었지만 전기에 비해 33%의 매출이 늘어나는 등 유한의 성장은 계속됐다. 인지도 증가, 적극적인 판로개척, 신제품 출시 등이 원인이었다. 39년에는 60%로 급신장했다. 중국은 물론 구미 지역의 수출이 본격화 되고 화문석 슬리퍼 죽세품을 제조하는 오류동 공장과 나전칠기를 제조하는 공장이 준공되고 많은 제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40년에는 봉천 출장소를 만주유한공사로 승격시켜 이곳을 거점으로 만주와 중국에 10여개의 공사 지점 사무소 출장소 주재소를 설치해 일본의 여러 제약사를 제치고 동북 아시아를 활동권에 넣는 저력을 발휘했다.
이같은 유한의 경이적인 성공에는 설파제 프론토질(Prontosil)도 한 몫 단단히 했다. ‘GU사이드’라는 상품명으로 수입된 이 약은 유한이 동양에서 최초로 수입했다는 것 외에도 뛰어난 약효로 인해 소비자들의 큰 인기를 끌었다. ‘GU 사이드’ 는 대대적인 광고를 통해 일반에게 널리 알려졌다. 유한은 제품광고 뿐만 아니라 기업이미지 광고도 병행했는데 38년 10월30일에는 동아일보에 전면광고를 할 정도였다. 이 광고는 계몽성이 강조돼 이윤의 추구보다는 나라와 사회에 공헌하는 제약사 이미지를 심어줬다. 사세확장이 됨에 따라 유한은 임원진을 보강했는데 40년에는 임원이 9명 기사와 직원이 82명 기타 64명 등 155명의 대식구로 늘어났다.
전쟁 막마지에 몰린 일제는 탄압을 강화했다. 특히 유일한이 미국 유학 등을 했다는 이유로 친미적이라는 구실을 붙여 수탈을 일삼았다. 하지만 유한은 민족계 제약업체라는 자긍심으로 당당히 일제에 맞섰다.1938년을 기준으로 민족계 제약업체는 총 33사 였고 전체 불입 자본금은 167만 6,000원 이었다. 유한이 75만원 이었으므로 전체 자본금의 45%를 차지했으니 유한의 사세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당시 민족계 제약사 중 자본금 10만원 이상의 경우는 유한양행(유일한) 금강제약(전용순) 삼성제약(김종건) 천일제약(조연섭) 신흥제약(차상철) 후생약품공업(박용균) 자선당제약(김일영) 청산제약(함승영) 동화약방(윤창식) 일화제약소(최영함) 중앙약품공업(신호균) 경성신약(주세환)삼양공사(윤용구) 삼룡제약(오용출) 전신양행(전항섭) 국제신연(황호연)동양제약(이덕휘) 조선매약(이동선) 동아제약사(강중희) 제생당약방(이경봉) 등이었다.


일제 탄압 극심


한편 도매업에서 크게 성공을 거둔 궁부약방은 제약업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강중희 사장이 동양제약 근무 시절부터 매약의 생산과정에 관심을 갖고 약종상 자격증을 얻기 위해 일본약국방이나 매약류에 대한 기초 지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매약생산에는 자신이 있었다. 특히 부인 이복림이 약사 였으며 친분이 있던 채예석(蔡禮錫.후에 대한약회장 역임) 역시 약사 였기 때문에 약 생산을 주저하지 않았다.
경성약전 1회인 채예석은 당시 조선총독부 위생시험소에서 근무하면서 강중희에게 많은 도움을 줬다. 42년 제조업 허가를 받은 궁부약방이 생산했던 품목은 감기신약 ‘가제나오르’, 소아용약’ 소아일품’, 정장제(整腸劑) ‘快腑’ ,소화제 ‘생명수’, 피부질환용제 ‘피부파스타’ 등 5품목 이었다.
제약업 허가를 받았지만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직후여서 한국도 이미 전시체제에 돌입해 물자품귀와 통제의 이중고로 고생을 해야 했다. 그러나 강중희는 좋은약을 빨리 선보여야 겠다는 일념으로 허가 받은지 2년 만에 감기신약 ‘쾌부’, 소아용약 ‘소아일품’ 등을 선보일 수 있었다. 45년 해방직전 주식회사 설립을 꾀할 정도로 사세를 키웠던 궁부약방은 해방과 더불어 어려운 상황을 맞았다.
해방 후에는 미군에 의해 많은 구호의약품이 쏟아져 들어왔다. 페니실린은 물론 다이아진 구와니딘 비타민 APC 등과 소화제 DDT 쥐약 모노후라톨 비듬약 셀손 등이 넘쳐났다.
이에따라 무슨 약인지 조차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배급 되는 통에 많은 부작용이 발생하기도 했다. 설파제인 다이아진은 만병통치약으로 알려져 감기에 걸리거나 배가 조금만 아파도 다이아진을 찾았고 심지어 말라리아에 사용되는 아데보닝은 옷에 황색염색을 하는데 이용되기도 했다.
이처럼 양약이 물밀듯이 들어와 기존 약과 대체 되면서 궁부약방은 넘쳐나는 재고를 처리할 방법이 없었다. 재고 가운데는 양약보다는 매약이나 위생재료가 특히 많았다. 이들 제품들이 미제 신약과 경쟁할 수 없었던 것은 자명했다. 강중희는 결단을 내려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일본인 이름의 상호인 궁부약방부터 갈아야겠다고 결심하고 즉시 ‘넓게 퍼지라’는 뜻의 동아약품공사로 명칭을 변경했다. 상호를 변경했지만 38선이 그어 지면서 자금압박에 시달리고 마침내 체권단 회의가 열리는 등 풍전등화의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강중희의 인품과 신용을 믿었던 채권단은 동아약품공사에 6개월 무이자로 상환을 연기하는 결정을 내렸고 이 결정은 동아가 기사회생하는 버팀목이 됐다.


도매한계 제약시작


강사장은 물론 임직원들의 사기는 크게 올랐고 지방영업을 강화한 결과 순조롭게 재고가 처리돼 동아는 서서히 회생의 길로 접어 들었다. 그러나 구호의약품에 대한 전권을 가진 조선의약품통제주식회사가 탈바꿈한 배급회사는 도매업을 경시하고 도매상에 대한 결제가 지연되는 등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강중희는 도매업의 한계를 느끼고 비록 제약이 부업 수준에 머물러 있었지만 제약으로 승부를 하기로 결정했다. 47년 도매업을 시작한지 15년 만에 동아는 도매를 포기하는 일대 결단을 내렸다.
비록 위생재료부터 시작했지만 한국인 도매상으로는 가장 규모가 큰 위치에 까지 왔던 동아약품공사는 거대한 시대의 조류에 편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약업으로 변경하면서 동아는 인력을 재구성 했는데 남자 10명 소분 및 포장을 맡은 여자 35명의 인력을 새로 짰다. 47년 경성약전 출신의 김성익 약사가 동아에 입사 했는데 김 약사는 유한양행에서 생산기술자로 근무한 경험이 있어 김약사의 활약에 동아는 큰 기대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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