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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근, 금계랍으로 ‘천국과 지옥’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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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 이병구 기자
  • 작성일 : 2007-02-12 08:31:40

해방후 신약 봇물…국내 제약사 경영난
윤용구 세탁비누.간장으로 위기넘겨


가짝 약 아루바지루 사건(제 3330호 참조)으로 곤욕을 치른 궁본약방 이종근은 1943년 7월 조선매약과 궁부약방에서 외상으로 약품을 구입해 지방에서 판돈 900원을 갖고 만주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이종근은 경제 경찰의 삼엄한 경비를 뚫고 봉천에 도착했다. 그는 큰 돈을 벌기 전에는 이곳을 떠나지 않겠다고 작심했으나 상황은 여의치 않았다. 무엇보다 물가가 조선보다 10배나 비쌌다. 참외 하나에 50전 냉면 한그릇에 1원 20전이나 했다.


청운 ‘꿈’싣고 만주로


이종근은 순간적으로 조선을 내왕하면서 생필품 장사를 하면 큰 차익을 남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경찰의 눈을 피해 왕래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돈을 벌기 위해서는 기꺼이 이런 위험 쯤은 감수해야 한다고 여겼다.
하지만 조선을 내왕하는 것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차일피일 하는 사이 3개월이 훌쩍 지나고 가지고 갔던 노자돈 900원도 바닥이 났다.
아편장사나 소매치기, 인신매매를 하면 쉽게 돈을 벌 수 있었지만 그런 일은 하지 않았다. 최소한 상도는 지켜야 한다는 것이 이종근의 생각이었다. 그는 조선에서 1년은 너끈히 생활 할 수 있는 거금을 날리고 실의에 빠졌다. 돈을 벌기 위해 만주로 갔으나 반대로 빈털털이가 돼 조전매약 봉천지점에서 기차삯 20원을 빌려 서울로 돌아왔다. 당시 봉천에서 경성까지 기차요금은 18원 50전이었다.
그러나 이종근은 여기서 좌절하지 않았다. 인천 동서대약방 김순만을 찾아가 만주에서 동업을 적극적으로 권유했다. 김씨가 500원 이종근이 300원을 공동 출자해 금계랍·산토닌 등을 싣고 다시 봉천행 열차에 몸을 싣었다. 쓰라린 실패가 약이 됐다. 그는 700원 어치를 팔아 5,000원을 벌었다. 귀국한 그는 궁본약방의 사세 확장에 진력했다. 만주에서 보따리 장사를 계속할 수 있는 주변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전황은 일제에게 불리하게 전개됐고 경방단 활동만으로는 징용을 벗어날 수 없었다.
일제는 44년 한국인 청장년 모두에게 전면 징용제를 실시했다. 이종근은 전선에서 개죽음을 피하기 위해 완전면제의 길을 찾던 중 조선육군창고 군속에 근무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 징집을 벗어났다.
그는 월급 36원은 모두 일본인 상관에게 술대접 등으로 써버리고 대신 토요일 근무를 면제 받아 지방 매약 판매에 열을 올렸다. 약이 극도로 품귀를 빚었던 시기 였으므로 40% 이상의 차익을 얻는 것은 식은 죽 먹기 였고 한꺼번에 700원 이상의 이득을 남겼으니 월급 36원은 돈도 아니었다.
이종근은 더 큰 돈을 벌기 위해 서부약우회 친구였던 홍원표가 금계랍을 동업으로 만들어 팔자는 제의를 흔쾌히 수락했다. 금계랍은 일본인이 운영하던 명치제약에서 제조허가를 갖고 있었는데 명치는 원료가 없어 제조할 수 없었으므로 홍원표가 1만원을 주고 제조허가를 빌려 몇 십만 포를 만들기로 했다는 것이다. 해방되기 다섯달 전이었다.
금계랍은 학질 특효약인 키니네의 통속어 였다. 태평양 전쟁이후 수입이 끊겨 키니네 원료를 구할 수 없어 명치제약이 손을 놓고 있는 사이 한약제 고삼뿌리를 원료로 한 금계랍이 대용품으로 판매됐는데 신기하게도 말라리아가 잘 치유됐다. 말라리아는 조선은 물론 만주와 봉화 지방에서도 맹위를 떨쳤으므로 금계랍장사는 떼돈을 벌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1만개 허가, 3만개 제조


홍원표가 돈을 주고 산 금계랍 허가권은 1만개 였으나 2만개를 만들기로 하고 고삼가루를 사다 제환(製丸)집에 청부를 주고 환약을 만들었다. 온 식구가 매달려 포장해 고바야시 광업회사에 납품해 엄청난 이득을 봤다. 홍원표는 다시 부산으로 내려가 1만개 허가권을 얻어 다시 2만개를 만들고 다시 1만개 허가권으로 3만개를 만들었다. 두 번째 까지는 대성공이었다. 그런데 3만개를 만들었을 때 ‘미국의 소리’ 방송에서 일본이 패망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재고는 산더미 처럼 쌓였다. 일본이 망한 것처럼 홍원표도 망하고 이종근도 망했다. 아루바지루 산 사건이후 7년만에 다시 찾아온 시련이었다.
한편 자선당에서 삼용토닉, 삼양공사에서 홍진산을 만들어 진가를 인정받은 윤용구(제 3331호 참고)는 기업정비령으로 어수선한 시기에 일동제약을 인수했다.
그는 위장약 이노아레와와 기응환 건위고장환 자애산 홍진산을 집중 판매하기로 했다. 이중 홍진산은 전쟁 말기에도 불구하고 날개돋친 듯 팔려나가 그의 주머니에서 돈이 떠날 날이 없었다. 그는 한충근 전무와 어울려 술을 즐겼고 고기를 실컷 먹을 만큼 불경기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서울에서도 귀한 전화기가 집에 있을 정도였다. 그의 안암동집 앞에는 여운형의 조카가 살고 있었는데 가끔 찾아와 전화를 빌려 쓰곤 했다. 해방되던 날도 그 부인이 급히 집안으로 들어오면서 일본이 항복했다고 외쳤다.
용구는 이 중대 소식을 평소 민족 의식이 강해 외무를 담당했던 정종철은 물론 그밖의 간부들에게 알리고 중국요리를 먹으며 감격의 기쁨을 누렸다. 9월 총독부 약무행정 관리 제 1진이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 갔고 잇따라 일본 약업인들도 오랫동안 쌓은 업체의 기반을 고스란히 남긴 채 입술을 깨물며 배에 올랐다.
일본인이 경영하던 제약회사와  한국지점, 대리점, 도매상, 약국 등이 한국인 종업원이나 관계자들에 의해 속속 접수되고 이양됐다. 이 과정에서 숱한 말썽과 분쟁이 일어났다. 이런 다툼은 시간이 지나면서 차쯤 해결돼 갔다.
일본군이 물러나고 미군이 진주하자 듣도 보도 못했던 신기한 신약들이 군용물자와 함께 시중에 쏟아져 들어왔다. 페니실린 다이아진 살충제 DDT 등 이었다. 약효는 대단했다. 국산약은 설 자리가 없었다. 사망률이 높아 불치병으로 인식됐던 결핵은 더 이상 질병이 아니었다. 경이 그 자체였다. 일동제약의 경영은 어려워 졌다. 윤용구는 훗날 “ 모두가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원료 수급이 어려워 약을 만들기 쉽지 않았다. 이때 나는 비누 판매로 난국을 뚫기로 했다” 고 술회하고 있다.


다시 제약업으로


세탁비누에는 비둘기 상표가 찍혀나왔고 이는 일동의 상징이 됐다. 여공 20명을 포함 40여명의 직원들이 약이 아닌 비누 생산으로 연명할 수 있었다. 일동뿐만 아니라 다른 제약사들도 변칙으로 회사를 운영했는데 어떤 제약사는 위스키를 만들어 판매하기도 했다. 49년 용구는 창신동에서 신설동으로 사옥을 옮겨 떡을 만들어 팔기도 했다. 간장도 만들어 팔았다.
콩을 염산으로 분해하면 아미노산이 됐는데 아미노산은 그 양이 많을수록 구수해 지는데 질을 높이기 위해 희석을 덜해 인기가 높았다.
하지만 변칙영업은 한계가 있었고 용구는 장사꾼 이전에 약사 였으므로 제약업에 대한 미련을 떨칠 수 없었다. 그는 3년 정도의 공백을 딛고 기침약 새당액 건위고장환 등 원료를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부터 생산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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