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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년 약업계 최대사건 ‘후루덱신’ 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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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 이병구 기자
  • 작성일 : 2007-02-12 08:32:24

멸균소홀로 제조약사 구속.금강제약 폐업
49년말 344개 제약사서 의약품 3,861종  생산


47년 해방 후  최대의 약화사건이 발생했다. 아마도 이 사건은 한국 제약 100년 사중 가장 큰 사건 중의 하나로 기록될 것이다. 그만큼 사회적 파장이 컸고 약에 대한 중요성과 일반인의 관심을 증폭시키기에 충분했다. 앞서 간헐적으로 언급한 후루덱신 사건이 바로 이것으로 재삼 자세히 언급하는 것은 약이 국민건강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잘못 될 경우 사람의 생명까지도 순식간에 앗아갈 수 있다는 역사에서 교훈을 얻고자 함이다.


의사동생 사망


이해 가을 서울 중구 묵정동 백의원(白醫院)에서 링거를 맞은 환자가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환자는 이 병원 원장의 친 동생이었다. 미군정의 혼란기에 사람이 죽는 일이 흔했지만 어쩐 일인지 이 사건은 세인의 큰 관심을 끌었다. 사망사건과 비슷한 시기에 중부경찰서에서 술취한 유치인에게 링거를 맞혔는데 취객은 금새 경련과 고열의 부작용에 시달렸다.
환자 사망과 취객 부작용은 금강제약이 생산하던 주사액 후루덱신 때문 이었다. 1935년 검정 의사인 전용순이 설립한 금강제약은 당시 주사약 전문메이커로 일제시대 한국인이 세운 제약사중 우에무라 등 일본의 제약사들과 대등한 경쟁을 벌이면서 국내 약업계의 자존심을 세워준 대표적인 제약사였다. 국내 최초로 매독치료제 살바루산 합성에 성공했으며 이어 살균 소독제 머큐로크롬과 화농성치료제 설파아미드를 내놓은 대단한 제약사였다.
사장인 전용순 역시 혼란한 초창기 약업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많은 업적을 남겼고 사건 당시 조선약품공업협회 위원장을 맡고 있어 약업계의 중심 인사였다. 그래서 그랬는지 당시의 모든 신문과 라디오 등은 이 사고를 관심있게 보도했다. 금강제약은 “반드시 약만 나쁘다고 할 수 없고 의사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반박했다. 그러자 의사들이 들고 일어났다. 의사들은 ‘금강제약 타도’ 등의 과격한 구호를 앞세우고 조직적으로 대응했다. 시민들도 종로 네거리에 모여 ‘마약장사 전용순 타도’, ‘아편장사 전용순 때려 부숴라’ 등의 현수막을 내걸었다. 검찰이 수사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담당검사인 안희경 검사는 여러 각도에서 수사를 진행했는데 먼저 주사실수(施注)는 없었는지를 가리기 위해 주사침, 주사기를 조사했지만 문제를 찾지 못했다.
멸균 상태가 양호했던 것이다. 수사는 당연히 주사약의 이상 쪽으로 방향이 잡히기 시작했다. 관계기관은 물론 유명한 세균학자들이 동원됐다. 약에 문제가 있다는 심증은 갔지만 이를 찾아낼 물증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여러 달 동안 조사한 결과는 고초균(枯草菌)때문으로 결론을 내렸다. 당시 군정의 보건행정 책임자인 이용설박사는 “주사약에 고초균은 있을 수 있다”는 내용으로 금강제약을 옹호 했지만 언론으로 부터는 보건부가 제약업자를 두둔한다는 비난을 샀다. 이 박사는 전용순과 절친한 사이였다.


‘마약장사’ 전용순 비난


멸균을 소홀히 한 제조 책임자인 주사부의 조시환, 전용동 약제사가 구속됐다. 약사가 관리상의 책임을 지고 형사처벌 되는 초유의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군정의 약무 책임자 였던 양계동은 즉각 제약공장의 시설기준을 강화했다. 당시의 제약공장은 위생시설은 물론 환경이 제대로 갖춰질리 없었고 무균실 조차도 완비하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뒤늦게 약학전문가들은 고초균인 파이로겐(Pyrogen) 때문에 약화사고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크다는 말을 했다. 파이로겐은 1923년 미국의 생화학자 세이버트가 발견한 발열성 물질로 세균의 대사산물인데 멸균에 의해 제거되지 않기 때문에 주사후 발열성 부작용의 원인이 되는 경우가 많다. 후루덱신의 주성분은 전화당(轉化糖)으로 백당 50%의 용액에 일정량의 염산으로 가수분해 하면 두 개의 분자인 포도당과 과당이 되는데 이를 중화해 농도를 맞추어 20% 당액을 만들어 주사약을 제조한 것이다. 그런데 그 원료는 3~4시간내에 처리가 완료 되지 않으면 발효해 곰팡이가 나기 시작하고 그러면 거기에서 미생물이 발생해 파이로겐이라는 대사물이 생긴다. 금강제약은 당시 후루덱신을 만들기 위해 토요일에 만든 원료로 월요일에 주사약을 만든 것으로 밝혀졌다.
후루덱신 사건 당시에는 파이로겐을 몰랐고 6.25동난 중 부산피난지에서 일본약국방 6개정에 수록된 것을 입수하면서 알려지게 됐다. 사건이 난 이듬해 봄 금강제약은 문을 닫았다. 당시 국내 3대 제약사였던 금강제약이 역사속으로 사라진 것은 우리 약업계의 큰 손실이었다. 마약성분인 네오페지날로 떼돈을 번 불세출의 약업인 전용순도 금강제약과 함께 사라졌다. 제약업을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 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3만원 제의 거절 ‘화근’


훗날 전용순은 사건이 일어난 직후 백의원 원장이 사건수습을 이유로 3만원을 요구한 사실을 털어놨다. 당시 3만원은 거금 이었다. 그러나 합의금 명목의 장례비용 3만원을 지급하는 것은 사인의 원인이 주사약이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어서 금강제약은 이를 거절했다. 만약 그때 전용순이 백의원의 이런 제의를 받아 들였다면 오늘날 제약계를 풍미하고 있을 금강제약을 떠올리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지도 모른다.
역사에 가정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하지만 금강제약이 제약업 초기 한국약업사에 남긴 크나큰 족적을 생각한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한편 그 당시 일본인들이 남기고간 재산인 적산 제약사와  이를 관리한 한국인은 다음과 같다. 일본의 대 메이커 삼공이 세워 주로 농약을 생산했던 조선삼공은 최동이 맡아 운영했다. 필동공장의 규모가 컸으며 해열진통제 소보린과 로지농 포도당 등 각종 주사약을 생산했던 조선무전약품은 이세만이 관리했다. 이세만은 후에 조선무전약품을 근화약품으로 명칭 변경했다. 함경도 흥남에 공장이 있었고 서울 을지로 2가에 지점과 사무실이 있었던 일질염야제약(日窒鹽野製藥)은 예동식이 포도당 주사액을 생산했고 후에 대한중외제약으로 이름이 바뀐 중외제약 경성지점은 이원우가 부산에서 제일 큰 계림화학공장으로 재출발한 유기위생화학연구소는 서용택이 맡았다.
하합제약소 부산공장은 지달삼이 인수해 조선간유제약으로 개칭, 간유구를 만들었으며 후에 종합비타민 당의정 생산을 계기로 대한비타민화학공업으로 발전했다. 이밖에도 강원도 금화에 활성탄소공장과 진남포에 염화나트륨 공장을 운영했던 조선등택약품, 원남동에 공장이 있고 비로헤루민을 생산한 조선위생시험소, 파리약 크레오소드를 생산한 동방제약, 디히드로몰피논의 원료를 생산한 판본약품부, 주사약 시설로 유명했던 식촌제약, 신호균이 인수한 약국방약 전문의 환인제약, 경남제약은 김무준·황영섭이 동아약화학은 박차갑이, 부산에 있던  백수의약은 박정근이 도리아놈 정제와 주사약을 생산한 조선전변제약은 박주형이 새로운 주인이었다. 제주도에는 옥도를 생산한 일본 옥도가 있었다.


적산제약사 ‘몰락’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전란까지 겹치자 몰락의 길을 걸었다. 제약공장 뿐만 아니라 약국 약종상 등 일본인이 경영하던 숱한 가계들은 한국인 종업원들에 의해 처분되거나 계승자가 없어 업종 변경 혹은 폐쇄되는 운명을 맞았다. 이런 가운데서도 제약업체수는 늘어나 49년 말에는 344개 제약사가 3,861종의 의약품을 생산했다. 해방 당시와 비교했을 때 업체수는 89개 품목수는 1,598종이 증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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