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아응급실 압수수색 파장…의료계 "환자 안전 먼저"
의협·소청과학회·지역의사회 잇따라 성명…"환자 안전·진료 연속성 침해"
"임의제출 등 대체수단 있었는데 왜 응급실까지"…의료사고 수사도 전문적 의학 검토 우선 촉구
진료가 이뤄지고 있는 소아전문응급의료센터에 경찰이 압수수색을 실시한 것을 두고 의료계의 반발이 확산되고 있다. 대한의사협회를 비롯해 대한소아청소년과학회, 대구광역시의사회, 성남시의사회, 전국전공의노동조합 등이 잇따라 성명을 내고 "응급의료 현장의 특수성을 무시한 강제수사는 또 다른 환자의 안전을 위협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논란의 발단은 지난 9월 30일 경기 남부 지역 한 대학병원 소아전문응급의료센터에 대한 경찰의 압수수색이다. 경찰은 지난여름 해당 센터에서 치료받던 환아가 사망한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법원으로부터 영장을 발부받아 압수수색을 진행했다.
문제는 당시 센터에서 다른 환아들의 진료가 진행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의료계는 진료용 컴퓨터와 전산자료 등을 확보하기 위해 수사 인력이 실제 응급의료 현장에 들어온 것은 환자 안전과 진료 연속성을 훼손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의무기록과 당직표 등은 병원의 협조를 통한 임의제출이나 별도의 전산·의무기록 부서 등을 통해 확보할 수 있었던 만큼, 진료 중인 응급실까지 직접 들어가 압수수색을 해야 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생사 오가는 응급실, 강제수사 공간 될 수 없어"
대한의사협회는 이번 사태를 "전대미문의 사태"로 규정하며 강한 유감을 나타냈다.
의협은 먼저 사망한 환아와 유가족에게 애도를 표하면서도 "진료가 한창인 응급실을 강제수사 대상으로 삼은 것은 사실관계 규명과 별개로 따져야 할 문제"라고 밝혔다.
소아응급센터는 몇 분, 몇 초의 지연이 환아의 생명을 좌우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것이다. 처방과 검사 지시가 응급실 컴퓨터를 통해 이뤄지고 중증 환아가 예고 없이 내원하는 만큼, 수사 인력이 진료용 컴퓨터를 확인하는 과정 자체가 의료진의 업무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의협은 "임의제출로 확보할 수 있는 자료에 압수수색을 집행한 것이 강제처분 최소화 원칙에 부합하는지"를 문제 삼았다.
경찰을 향해서는 진료 중인 응급실을 압수수색 대상으로 삼은 이유와 압수수색이 반드시 필요했는지를 명확히 밝히라고 요구했다. 또 응급실·수술실·중환자실 등 생명과 직결되는 공간에 대해서는 진료에 지장을 주지 않는 방식으로 자료를 확보하도록 별도의 수사 집행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소청과학회 "수사보다 환자 안전이 먼저"
대한소아청소년과학회도 소아응급의료 현장에 대한 강제수사에 우려를 표했다.
학회는 소아응급실을 단순한 의료시설이 아닌 "생명이 위급한 아이들이 찾아오고 의료진이 한순간의 판단과 처치에 집중해야 하는 공간"이라고 강조했다.
영유아와 중증 소아환자는 상태가 급격히 변할 수 있어 짧은 진료 지연이나 의료진의 집중력 저하도 환자 안전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지적했다. 다만 의료사고에 대한 객관적인 사실 규명과 정당한 수사 필요성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의료계 역시 정당한 조사와 수사에 성실히 협조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학회가 문제 삼는 것은 수사의 방식과 의료사고 책임을 판단하는 절차다.
학회는 "중증 소아환자의 사망이라는 결과만으로 의료진의 과실이나 형사책임을 예단해서는 안 된다"며 내원 당시 중증도와 기저질환, 질병의 자연경과, 급격한 악화 등 다양한 의학적 요인을 종합적으로 살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따라 의료진의 책임 여부를 판단하기에 앞서 해당 진료의 특수성과 당시 임상 상황, 의료행위의 적절성에 대한 관련 분야 전문가의 충분하고 객관적인 의학적 검토가 선행돼야 한다고 요구했다.
지역 의사회도 잇따라 규탄
지역 의료계에서도 반발이 이어졌다. 대구광역시의사회는 "수사의 필요성이 환자의 생명과 안전보다 앞설 수는 없다"며 이번 압수수색을 강력히 규탄했다.
대구시의사회는 소아응급센터에 수사 인력이 직접 들어올 경우 의료진의 집중력이 떨어지고 다른 응급환자 진료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의무기록과 전산자료, 당직표 등은 병원의 협조와 적법한 자료 제출 절차를 통해 확보할 수 있는 만큼 진료 중인 응급의료 현장까지 직접 압수수색한 것이 불가피했는지 따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성남시의사회 역시 "환자의 안전이 최우선"이라는 입장을 내놨다.
성남시의사회는 경찰이 진료에 지장이 없는 시간에 압수수색을 실시했다고 설명했지만, 의료진은 실제 진료에 차질이 있었다고 반박하고 있는 만큼 당시 상황과 압수수색이 진료에 미친 영향을 명확히 설명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아울러 향후 응급의료기관에 대한 강제수사 과정에서 환자 안전을 최우선으로 고려하고 진료 영향을 최소화할 수 있는 구체적인 절차를 마련해야 한다고 밝혔다.
전공의노조 "경찰·법원 모두 책임 밝혀야"
전국전공의노동조합은 경찰뿐 아니라 영장을 발부한 법원에도 문제를 제기했다.
전공의노조는 "임의제출 등 자료를 확보할 다른 방법이 있었음에도 경찰이 수사 인력을 응급실에 투입했다"며 "영장 발부와 압수수색 과정에서 의료 현장에 미칠 영향을 충분히 고려했는지 경찰과 법원에 묻지 않을 수 없다"고 밝혔다.
특히 의료행위의 결과가 좋지 않으면 곧바로 형사수사로 이어지는 구조가 반복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중증·응급환자를 많이 진료할수록 예상치 못한 사망이나 합병증을 경험할 가능성이 높지만, 최선을 다한 진료 이후 형사수사와 압수수색까지 이어진다면 의료진이 필수의료 현장을 지키기 어려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전공의노조는 경찰과 법원에 이번 압수수색 영장의 신청·발부·집행 과정에서 환자 안전을 위해 어떤 조치를 고려했는지 밝힐 것을 요구했다. 정부와 국회에는 의료 관련 수사 가이드라인 마련을 촉구했다.
의료계가 공통적으로 우려하는 대목은 이번 압수수색이 소아응급의료를 비롯한 필수의료 현장에 미칠 '위축 효과'다.
의협과 대구시의사회 등은 2017년 이대목동병원 신생아중환자실 사건을 거론했다. 당시 의료진이 형사입건과 구속 등 사법적 압박을 받았고 이후 재판에서 최종 무죄가 확정됐지만, 사건이 소아청소년과와 필수의료 현장에 상당한 부담을 남겼다는 것이다.
의료계는 중증 환자를 많이 진료하는 의료진일수록 예기치 않은 사망이나 합병증을 마주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강조한다. 최선을 다한 진료에도 불구하고 좋지 않은 결과가 발생할 때마다 진료 현장이 형사수사의 대상이 된다면 중증 환아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치료할 의료진이 줄어들 수 있다는 논리다.
결국 피해는 의료진이 아니라 환자와 가족에게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대한소아청소년과학회는 "아이를 잃은 가족을 위한 진실 규명과 아이들의 생명을 지키는 의료현장의 보호는 서로 대립하는 가치가 아니다"라며 충분한 전문적 검토와 합리적인 절차를 통해 두 가치를 함께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의협 역시 수사기관의 정당한 수사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다만 수사가 다른 환자의 생명을 지키는 진료를 막아서는 안 되며, 의료진의 의학적 판단이 적절했는지는 의학적 전문성을 바탕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의료계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응급실·중환자실·수술실·분만실 등 생명과 직결된 의료현장에 대한 강제수사 원칙을 명확히 마련하고, 의료사고 수사에서도 의학적 감정과 전문가 검토가 우선 이뤄지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고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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