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사 줄이고 탄소 낮추고…세계 병원들, 지속가능 의료 실천
스위스 혈액검사 25% 줄이고 무릎 엑스레이 비율도 4%로 낮춰
호주 마취가스 개선·스페인 가정투석 확대…필리핀은 무료식수
환자 안전과 의료의 질을 지키면서 환경 부담을 줄이려는 세계 병원들의 실천이 확산하고 있다. 불필요한 검사와 저가치 진료를 줄이는 적정진료부터 탄소 배출 감축, 가정투석 확대, 지역사회 식수 지원까지 지속가능한 의료를 위한 변화가 진료 현장과 병원 운영 전반으로 넓어지고 있다.
20일 서울 코엑스 마곡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제49차 국제병원연맹(IHF) 세계병원대회에서는 '실제 세계의 지속 가능한 의료: 병원을 통한 환자와 인력의 여정'을 주제로 스위스·호주·스페인·필리핀 의료기관의 사례가 소개됐다.
각국 발표에서 공통적으로 강조된 것은 지속가능성이 단순한 비용 절감이나 환경 보호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환자에게 필요한 진료에 집중하고 의료진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동시에, 병원의 자원을 지역사회 건강 증진에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먼저 스위스 제네바대학병원(HUG)은 불필요한 검사를 줄이는 적정진료를 통해 성과를 거뒀다.
이날 로베르트 마르디니 최고경영자는 의약품과 의료기기가 병원 탄소 배출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며, 에너지와 이동수단 개선을 넘어 임상 관행 자체를 바꾸는 데 주력했다고 밝혔다.
병원은 230개 진료 단위에 교육과 근거 기반 친환경 진료 지침을 제공하고, 각 부서가 환자에게 적합한 개선 과제를 선택하도록 했다.
그 결과 노인병동에서는 일상적인 혈액검사를 환자별 필요에 맞춘 검사로 대체해 3개월 만에 정기 혈액검사를 25% 줄였다. 성인 응급진료에서는 무릎 손상 환자에게 '오타와 무릎 규칙'을 적용해 불필요한 엑스레이 검사 비율을 26%에서 4%로 낮췄다.
마르디니 최고경영자는 "환자에게 실질적인 이득이 없는 검사와 위해 가능성이 있는 진료를 줄이고, 필요한 의료행위에 자원을 집중하는 것이 적정진료의 핵심"이라며 "진료의 질과 안전, 지속가능성을 별개의 목표가 아닌 하나의 과제로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호주 노던시드니 지역보건지구는 의료진의 제안을 정책 변화로 연결해 탄소 배출 감축에 나섰다.
사이먼 래드모어 전략·최고경영자실 총괄이사는 마취과 의료진의 논의에서 시작된 데스플루란 사용 개선 사례를 소개했다. 의료진이 관련 근거와 대체 방안을 제시하자 뉴사우스웨일스주 보건부는 데스플루란을 주 전체 처방 목록에서 제외했다.
현재는 아산화질소 사용 개선도 추진하고 있다. 누출 감지와 사용량이 적은 구역의 공급 배관 철거 등을 진행하면서도 임상적으로 필요한 경우에는 실린더를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래드모어 총괄이사는 "현장의 아이디어가 성과로 이어지려면 병원과 지역, 주정부 차원의 지원이 필요하다"며 "의료진의 자발적인 제안에 제도적 뒷받침이 더해져야 변화가 의료체계 전반으로 확산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와함께 스페인 산타리아 몰레 의료재단은 의료진과 직원의 참여를 바탕으로 지속가능성을 병원 문화에 정착시키고 있다.
나탈리아 알루에 의료책임자는 "각 부서에서 지속가능성에 관심이 있는 구성원을 '지속가능성 앰배서더'로 선정해 부서별 개선 전략을 수립하도록 지원한다"며 "직원 교육을 통해 환경 보호를 일상적인 진료와 운영에 접목하는 노력도 이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가정투석 프로그램도 주요 사례다. 만성 신장질환 환자가 병원을 정기적으로 방문해 투석받는 대신 가정에서 치료할 수 있도록 해 이동 부담을 줄이고 환자의 자율성을 높이는 방식이다. 병원 측은 가정투석이 이동 횟수와 물 소비량을 줄이는 데도 도움이 된다고 설명했다.
지역사회 건강을 위한 협력도 진행 중이다. 지방자치단체와 환자, 약사 등이 참여하는 지구 건강 위원회를 구성해 대기오염과 수질, 자연공원 접근성 등을 살피고 이동수단과 영양, 대기질 개선 방안을 마련하고 있다.
필리핀 세인트루이스대학교 성심의료센터는 병원이 보유한 자원을 활용해 지역사회의 식수 문제 해결에 나섰다. 폴 퀴티퀴트 의료센터장은 "물 공급이 불안정하고 식수 비용 부담이 큰 지역 상황을 고려해 병원 앞에 무료 식수 충전시설을 설치했다"며 "환자와 직원뿐 아니라 학생과 건설 노동자, 택시 기사, 인근 주민 등 누구나 이용할 수 있도록 개방했으며, 이후 대학 캠퍼스 전체로 확대했다"고 말했다.
병원 내부에도 식수 충전시설을 설치해 일회용 플라스틱 물병 사용을 줄였다.
퀴티퀴트 센터장은 "플라스틱 물병 사용 감축 계획이 한 달 최대 50만개의 물병을 줄일 수 있는 규모로 확대됐다"며 "지역사회와 자원을 공유하면서 병원에 대한 신뢰도 높아졌으며, 병원 측은 순추천고객지수(NPS)가 56점 상승했다"고 밝혔다.
한편, 이날 세션을 주재한 카란 타쿠르 인도 아폴로병원 부사장은 의료기관이 전 세계 온실가스 배출량의 약 4~5%를 차지한다는 점을 언급하며 의료계의 적극적인 대응을 촉구했다. 기후변화가 폭염과 홍수, 대기오염, 감염병 등을 통해 환자 건강과 병원 운영에 영향을 미치는 만큼 지속가능성을 병원 경영과 임상 의사결정 전반에 반영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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