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 선택권 없는 복막투석 확대, 투석 방식 강요 안된다"
투석협회 "의사·환자 선택 존중해야… 작위적 목표는 의료 왜곡"
환우회 "조혈제 기준 상향·식사 지원 절실…환자 목소리 들어야"
"환자 중심·공동 의사결정" 강조… 정책 방향 전환 요구 거세져
대한신장학회 일부 교수들이 내놓은 '2033년까지 복막투석 환자 비율 33% 달성' 목표가 임상 현장과 환자 단체로부터 강한 반발을 사고 있다.
의료계와 환자들은 "환자의 현실과 선택권을 무시한 탁상 정책"이라며, 환자 중심 의료를 강조하는 시대에 역행하는 발상이라고 입을 모았다. 특히 현장과 환자 단체의 공통된 요구는 단순한 비율 확대가 아니라, 환자가 안전하고 존엄하게 치료받을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는 것이 우선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한투석협회(이사장 김성남)는 지난 13일 세종대 대양AI센터에서 '투석전문의를 위한 심포지엄'을 개최하고, "모든 의료 정책은 환자와 국민의 입장에서 시작돼야 한다"고 전제하며, 인위적인 복막투석 확대 정책이 환자 중심 의료라는 시대정신에 역행한다고 지적했다.
토론회에는 신장학회, 한국신장장애인협회, 병원투석간호사회, 국회 관계자 등이 참석해 환자 중심의 말기콩팥병 관리체계 개선을 논의했다.
먼저 김성남 이사장은 "고령화로 투석 환자가 급증하는 현실에서 안정적인 치료와 관리체계는 필수"라면서 "의료 정책은 어디까지나 환자와 국민의 입장에서 시작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환자 등록제, 인공신장실 인증, 진료비 부수비용 지원 같은 제도적 정비가 시급하다"며 복막투석 비율 확대 같은 인위적 목표보다 기본 틀의 보완을 먼저 제시했다.
주제 발표를 맡은 이승헌 원장(전 예일대 교수) 역시 "의사-환자 관계는 상호 존중과 협력을 기반으로 한 동반자 관계로 변화해야 한다"며 환자 중심의료와 공동 의사결정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이 원장에 따르면 국내 말기신부전 환자는 2022년 신규 1만8598명, 누적 13만4800명에 달하며, 평균 연령은 66세로 환자의 절반 이상이 고령층이다. 이같은 환자 발생률은 세계 2위에 이를 정도로 급증하고 있으며, 환자들의 치료 수요를 감당하는 중심축은 여전히 혈액투석이라는 것.
이 원장은 "국내 혈액투석 환자의 5년 생존율은 70~80% 수준으로, 미국(40%)보다 월등히 높다. 이는 국내 암 환자의 5년 생존율(72.1%)과 비슷하거나 더 좋은 성과"라며 "이는 단순한 치료 성적을 넘어, 국내 혈액투석 인프라가 세계적 수준임을 보여주는 지표"라고 강조했다.
"복막투석 확대, 환자 현실 무시한 작위적 접근"
이날 토론회 핵심 쟁점은 최근 일부 신장학회 교수들이 제시한 '복막투석 33% 확대' 정책이었다.
김성남 이사장은 "복막투석은 소아나 오지 환자 등 꼭 필요한 영역에서 필수의료 역할을 하지만, 비율 목표를 설정하는 순간 작위적 접근이 될 수밖에 없다"고 꼬집었다. 그는 "현재 복막투석 환자 비율이 5%대까지 낮아진 것은 의사가 기피해서가 아니라, 환자의 고령화와 현실적 한계가 반영된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과거 투석환자 평균 연령이 40대였던 것과 달리 현재 60대 등 고령환자가 많은 상황에서 인지 기능이 떨어지고 신체 활력이 저하된 이들이 가족 도움 없이 재택투석을 수행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지적이다.
이와함께 ▲협소한 주거 공간으로 인한 장비 보관 문제 ▲치료 과정에서의 고립감과 우울감 ▲응급 상황 대처의 불안감 ▲의료폐기물 처리 어려움 ▲젊은 환자들의 도관 삽입 기피 등이 대표적인 사례로 들었다.
이 원장은 "집 밖에 나가면 편하게 투석을 받을 수 있는데, 왜 굳이 집에서 힘들게 해야 하느냐는 질문은 피할 수 없다"며 "복막투석이 혈액투석을 완벽하게 대체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답은 아직 '아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생존율 데이터 역시 혈액투석이 다소 우위에 있고, 젊은 환자조차 몸에 장치를 다는 것을 꺼리는 등 현실적 한계가 뚜렷하다"며 "복막투석은 자기 관리가 어려운 환자에게는 합병증 위험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 원장은 또 "환자의 권리 의식이 높아진 만큼, 이제는 환자 중심의 치료법 선택이 존중돼야 한다"며 "미국처럼 대학병원은 응급·중증 투석만 남기고 인공신장실 규모를 축소해 남는 인력으로 복막투석 등 재택치료 교육과 관리에 투입하는 전달체계 개편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환자 단체 "투석 방식 강요 안 돼… 현실적 지원이 우선"
환자 단체도 복막투석 확대 정책에 부정적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한국신장장애인협회 김세룡 회장은 "정책은 환자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것이지 환자에게 특정 방식을 강요하는 수단이 돼서는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 회장은 환자들이 가장 시급히 원하는 과제로 ▲빈혈 개선을 위한 조혈제 급여 기준 상향(헤모글로빈 10→12) ▲투석 후 극심한 피로를 완화할 수 있는 식사 지원 방안을 꼽았다.
그는 "투석을 '낮병동 입원'으로 인정하면 보험급여 내에서 치료식 제공이 가능하다"며 구체적 방안까지 제안했다.
정치권 "전달체계 개편 공감… 지역 불균형 해소 정책 고민"
이러한 제언에 대해 정치권도 공감을 표하며 정책적 대안을 모색하겠다고 화답했다.
더불어민주당 조원준 수석전문위원은 "상급종합병원이나 종합병원급 이상에서 투석실 비율을 계속 높이거나 유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수가 조정을 통해 이를 자연스럽게 정리하는 방안을 검토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수도권 공급 과잉과 지방 인프라 부족 문제에 대해서도 "지역에 차등 수가를 적용해 인프라 확충을 유도할지, 혹은 복막투석 같은 대안적 방식을 통해 의료 공백을 보완할지에 대한 정책적 판단이 필요하다"며 학회와의 공동 논의를 제안했다.
간호사들 "환자 선택권 존중…현실적 어려움 살펴야"
현장 간호사들 역시 환자 중심의 정책을 강조하면서도, 현실적인 어려움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병원투석간호사회 탁은영 부회장은 "과거에 비해 혈액투석 치료의 수준이 비약적으로 발전해 더 많은 중증 환자를 살릴 수 있게 됐다"며 "반면 복막투석은 환자 수가 늘지 않아 전담 간호사 인력 유지가 어려운 것이 현실"이라고 전했다.
그러면서 "복막투석에 대한 고민이 상대적으로 줄어든 데에는 이러한 현실적인 이유가 있다"며 정책 수립 시 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해달라고 당부했다.
Copyright @보건신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