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 법철학과 의(醫)철학

허정 교수의 보건학 60년/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전 보건대학원장)

1957년 의과대학을 나와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예방의학 교실에서 무급조교 생활을 시작했다. 지금도 대학로에 이름이 남아 있는 학림다방이나 대학다방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과 문리과대학, 법과대학 교수들이 모이는 아지트 같은 곳이었다.

국어국문학 1인자였던 이희승 박사나 법과대학 한태연 교수, 황산덕 박사도 이곳을 드나들었고 의과대학에서 내가 모시고 있었던 김인달 교수님도 좋아하던 곳이었다. 젊은 사람으로는 문리과대학 정치학과 조교였던 손재석 선생이 자주 왔다.

한때 박정희 정권에 반대해 옥고를 치렀던 황산덕 교수는 후일 박 대통령 밑에서 법무부 장관을 지내기도 했다. 그는 주로 법철학을 강의했으며, 이 분야에 높은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법대로 해야 한다는 제정법 보다는 유럽에서 통용됐던 자연법사상과 도가사상을 높이 산 얘기를 들은 기억이 난다.

요즘은 세태가 시끄러워서 그런지 툭하면 ‘법대로 하자’고 한다. 국회의원이나 장관 같은 유명인사들의 잘못에도 무조건 법대로 다스려야 한다는 신문기사를 자주 본다. 그럴 때마다 황산덕 교수가 주장했던 도가사상에 더욱 관심이 갈 수밖에 없다. 공자의 말을 빌리더라도 법으로 다스리는 것은 좋은 정치가 될 수 없고 더불어 법을 적용하지 않더라도 無爲而化해야 한다고 강조한 기억이 난다. 법을 쓸 수밖에 없어진 각박한 세상살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의학은 오늘날 과학에 근거해서 질병을 예방하고 치료하는데 힘쓰고 있다. 그러나 유명한 의학자들이 말한 바와 같이 의학은 순수과학이 아니다. 서양의학사를 쓴 20세기의 유명한 의사학자 가스트리오니가 지적한 바와 같이 의학은 본질적으로 과학인 동시에 예술이다. 요새는 너무 실증적인 증거를 앞세운 일면만이 현대의학에서 강조되고 있다. 황산덕 교수가 말한 바와 같이 법조인에게는 철학이 필요하듯이 의료인들에게도 의학의 앞날을 가늠하는 철학이 있어야겠다.

최근 늘어나고 있는 대부분의 생활습관병은 우리 주변 생활과 정신건강에 따라 발생한다. 치매나 알츠하이머병을 의학만으로 고칠 수 있다고 장담하는 의사들은 없다. 오히려 정신건강과 관계를 맺는 종교의 힘을 빌려 정서적 안정도 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사람은 세상에 태어나면 늙고 병들 수밖에 없다. 특히 세상살이에서 생겨나기 쉬운 정신병을 약만 가지고 고친다는 것은 옛날 얘기다. 신체적·정신적 안정과 편안한 정신세계로 유도하기 위해 의학에도 철학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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