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는 관점에 따라 인생은 짧다고 하지만 개인적으로 볼 때 매우 오랜 시간에 걸쳐 이루어진다. 나는 경기도 용인에서 태어나 국민학교를 마쳤다. 용인은 산도 많고 들도 많았다. 겨울이면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린 늑대들이 종종 사람들이 사는 마을까지 내려왔고, 이로 인해 피해를 본 농가도 심심찮게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들이나 냇가가 많아서 여름철이 되면 수영을 하며 지내기에도 좋았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퍽 멋있는 환경에서 자랐다.
6·25사변 때에는 둘째 형님의 친구 덕분에 제1차 의용군 모집에서 빠질 수 있었다. 당시에는 서울에 재학 중인 고등학교 학생들을 수백명 모아 놓고 '내 고장은 내가 지켜야한다'며 의용군을 소집했다. 손을 든 사람은 그 자리에서 트럭에 태워 의용군 시설로 보내졌다. 100명이 넘는 사람들 중 5~6명만 제외됐지만, 형님 친구의 도움으로 나도 그 5~6명 안에 들었다. 그 후 의용군모집이 본격화되자 나는 집에서 칩거하며 도망 다녔다.
의과대학을 졸업하고는 예방의학교실 조교가 됐는데 기초의학 요원이라고 해서 정부로부터 대학에 파견돼 편안하게 공부했다. 뜻하지 않게 서울대학에 '미네소타플랜'이 생겨나서 그 당시에는 하늘의 별따기 보다 어려웠던 미국 유학길에도 오르게 됐다.
유학 준비 과정에서 서류가 육군본부에서 국방부 그리고 문교부를 거쳐 외무부로 넘어가는 기간이 너무 길어서 거의 포기하다시피 했는데, 기생충학 조교였던 임한종(林漢鍾) 학우가 주선을 잘하고 거금을 내서 결국 미국유학의 꿈이 이뤄졌다. 그때 미국에 같이 가게 된 사람은 기생충학에는 임한종, 예방의학에서는 나와 고응린(高應麟) 교수였다. 꿈같은 현실이었다.
5·16혁명 이후에는 군에 복귀해서 반군반민(半軍半民) 형태로 사흘은 군에서 일하고 나머지는 대학에서 일하다 결국 군대에서 벗어나 제대하게 됐다.
이후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에서 보건학 석사과정을 가르치기 위해 WHO에서 특별장학금을 받아 두 번째로 미국에 유학했다. 이번에는 하버드대학이었다. 하버드대학 1년을 마친 후 존스홉킨스대학에서 국가보건계획 과정도 이수하고 여러 나라를 거쳐 한국에 돌아왔다.
특히 군대 제대 전에는 사단 의무참모로 일했는데, 사단장의 특별한 배려로 대학강단에 설 수 있는 기회도 생겼다. 그런 의미에서 봤을 때 나는 대단히 인복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된다. 세상에는 좋은 사람도 많고 나쁜 사람도 있다. 그러나 노력하기에 따라 좋은 인연을 맺을 수 있다.
이제는 나이를 먹어 현직에서 물러난 지도 오래됐고 체력에도 한계가 있어 활동하는 것이 예전 같지 않고 힘이 든다. 이제 인생 말년에 와서 모든 사람에게 고맙고 감사하다는 말을 남기고 싶다. 그리고 여력이 남아있는 한 남은 인생도 좀 더 쓸모 있게 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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